72화
힐다에게서 ‘치료’라는 걸 받은 지 2주일이 다 되어갈 때였다.
나는 여전히 신전 지하에 갇힌 사람들과 킬리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은 자연히 데반으로 이어졌다.
데반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펠로스는 데반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신전에서 킬리언을 이용해 데반을 처리하려고 한다고. 어쩌면 이미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거기에 펠로스가 데반의 부탁을 받아 하고 있다는 일은 또 무엇일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답답함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
별궁에서 데반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는 카렌뿐이었다. 그는 별궁과 나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머무른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내가 별궁을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 같았지만.
그 이야기는 꼭 데반이 위험한 곳에 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별궁 역시 위험하다는 소리 같기도 했고.
항상 말이 많은 카렌이었지만, 그는 데반의 행방에 대해선 함구했다. 술을 먹이고, 이리저리 떠봐도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내가 제정신을 지키고, 대책 없이 별궁을 나서지 않은 건 힐다 덕분이었다.
힐다는 데반을 걱정하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게 꼭, 아무 일도 없는데 나서서 걱정한다는 표정 같았다.
그녀는 전지전능해 보였으니까. 데반이 무사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나를 저렇게 바라보는 거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당장 별궁을 탈출할 것 같았다.
뭐라도 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침내 데반이 돌아왔다.
*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창문 밖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몸을 붙였다. 내려다보이는 정문에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마차? 설마…….”
이 시각에 손님이 올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노집사와 몇몇의 시종들이 헐레벌떡 마차로 향하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나 봐요!”
내 옆에 붙어 나란히 창문을 바라보던 시녀가 말했다. 힐다가 자신의 몸을 잠깐 빌렸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그녀는, 여전히 내 전담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요, 대공비 전하! 그렇게 하고 가시게요?”
“어?”
황급히 다가온 시녀가 커다란 숄을 내 어깨에 둘러줬다. 나는 그제야 내가 잠옷 차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보고 싶으셔도 그렇지.”
은근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뻣뻣하게 마주 웃어줬다.
숄을 단단히 여미고 나는 데반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데반의 침실은 같은 복도 끝에 있었지만, 어쩐지 그가 집무실로 향했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똑똑―
두꺼운 나무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들어와.”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벌컥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건 상당히 지친 표정의 데반이었다.
그는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던 듯 내 얼굴을 보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꼭 바로 어젯밤 본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질문에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자는 결심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무슨 일이냐고요? 그게 지금 할 소리예요? 결혼하자마자 사라져놓고?”
원망이 가득한 내 타박에 데반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보다 나른한 표정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군. 사과하지.”
나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데반이 순순하게 사과를 하다니. 오히려 기분이 더 이상했다.
“사과는 됐어요. 도대체 어딜 갔다 오신 거예요? 제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아세요? 카렌은 별궁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고, 아무도 데반이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른다고 하고! 꼭 백작가에 살았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고요.”
“보고 싶었나?”
“……뭐, 뭐라고요?”
데반이 느물거리며 웃었다.
“보고 싶다니. 그게 아니라 저는―”
“나는 보고 싶었는데.”
“…….”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데반이 집무실 책상에 등을 기댄 채 나를 빤히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데반이 레이디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하필이면 이럴 때 카렌의 말이 떠오를 건 뭐란 말인가.
데반은 그저 말을 돌리려는 것뿐이었다. 무슨 일을 했는지 내게 알려주지 않으려고. 이런 단순한 수법에 넘어가선 안 됐다. 나는 얼굴을 더 딱딱하게 굳혔다.
“장난은 그만해요.”
“장난은 아니었는데. 그러지.”
순식간에 미소를 지운 데반이 나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왜, 왜요?”
갑자기 가까워진 얼굴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데반은 집요하게 내 얼굴을 훑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냥. 잘 있었나 해서.”
그 태평한 어조에 나는 다시금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졌는데 잘 있었겠어요? 묻고 싶은 게 한 가득이라고요!”
“그래? 과연 무슨 질문을 할지 궁금하긴 한데…… 내일하면 안 되나?”
나는 그제야 데반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보통 피곤한 게 아닌 듯, 말투는 평소보다 느릿했고 눈가엔 졸음이 가득했다.
“……피곤해서 그래요?”
“조금 그렇군.”
데반이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정말 피곤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럼 침실로 가시지, 왜 여기 오셨는데요?”
내 말에 데반이 다시 살짝 웃었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사고를 치고 다녔나 확인해야지.”
“사고라니, 그런 거 안 쳤어요! 오히려 정원을 가꾸느라 바빴죠.”
“정원?”
데반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당연히 그가 시킨 줄 알았는데, 몰랐던 일인가?
“노집사가 떠맡기던데요?”
“아아……. 정원이라. 좋은 핑계를 찾았군.”
핑계? 그 말은 역시…….
“데반이 명령한 거죠? 제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못하도록?”
“너를 위해서였지.”
“전 괜찮아요. 멀쩡하다고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해야 하는 거죠?”
“글쎄…….”
데반이 한 손으로 턱을 쓸었다. 전혀 믿지 않는 눈치라 가슴이 답답했다.
“같이 신전을 무너트리기로 했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결혼을 했던 거고요. 당신은 제 신력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랬었지.”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아시잖아요, 제가 평범하게 자라지 않았다는 걸요.”
나는 백작가의 학대에서 벗어나 데반에게 일부러 납치됐다. 그 후엔 그에게서 도망쳐 엘리운으로 향했고,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일 년을 버텼다.
그런데도 데반은 마치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영애인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이 정도 일은 극복할 수 있다고요.”
“나도 알아. 그래서 싫었던 거고.”
“……네?”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한때 가족이었던 자가 죽었다. 그걸 고작 ‘이 정도 일’이라고 하는 게…….”
“제가 냉정해 보이나요? 너무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 말이 아니야. 그저 나는……. 네가 조금 더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거다.”
편하게?
“아등바등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위험한 일에 뛰어들지 않고 철없이 지내길 바란다는 말이야.”
“……신전을 무너트리기 전까지는 불가능해요. 아시잖아요.”
신전은 여전히 나를 노리고 있었다. 내 안에 가득한 흑마법은 점점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편하게 지낸다는 말인가.
데반이 낮게 한숨 쉬었다.
“그래, 네 말이 맞군. 그게 먼저지.”
“그래요, 그러니까―”
“안 그래도 이제 슬슬 말하려고 했었다. 언제까지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다만 준비가 조금 필요했지.”
나는 숨죽인 채 이어질 데반의 말을 기다렸다. 데반은 잠시 말을 골랐다.
“신전 지하에 갇힌 사람들을 구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움찔 몸이 떨렸다. 반사적으로 그 끔찍했던 광경이 다시 떠오른 탓이었다.
“그래서요? 뭔가…… 알아낸 거예요?”
“알아냈다기보다는, 뭐 조금 무식한 방법이야. 간단하게 말하자면 몰래 들어가서 몰래 빼오는 게 다지.”
“어떻게 몰래 들어가는데요? 어떻게 신전에 들키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을…….”
“에블린.”
흥분한 내 목소리를 진정시키듯, 데반이 나를 불렀다. 그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하지.”
“아…….”
“걱정하지 마. 어디 가지 않을 테니까. 숨지도 않을 거고.”
힘겨워 보이는 데반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그를 자세히 아래위로 훑어봤다.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니죠? 다친 거라면 제가 치료해 드릴 수 있어요.”
데반이 살짝 웃었다.
“그런 거 아냐. 그저 정말로 피곤해서 그런 거지.”
“……알았어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다 왔길래 저토록 피곤해 하는 건지, 궁금한 게 산더미였다. 그러나 나는 데반의 말을 믿기로 했다. 이제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가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네? 피곤하다고 했잖아요.”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데반이 나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왜요?”
그는 대답 대신 손을 까딱거렸다. 잡으라는 건가? ……혹시 아파서 그런가? 신력으로 치료해 달라고?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데반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다음 순간, 데반이 가볍게 힘을 줘 나를 끌어당겼다.
“데반?”
그리곤 그대로 내 손을 붙잡고 집무실 한 켠에 마련된 소파로 향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그에게 끌려갔다.
저기서 치료를 해 달라는 건가? 하긴, 예전 대공 저에서 치료할 때도 소파에서 마주 보고 했으니까.
그러나 소파에 도착한 데반이 한 행동은 나를 소파 한쪽 끝에 앉히는 거였다.
“…데반? 뭘 하려는….”
그러더니 벌러덩 누워 내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는 게 아닌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