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힐다는 자연스럽게 별궁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뻔한 태도였다.
오래전, 나를 제외한 모두의 기억을 지우고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던 게 꼭 없었던 일 같았다.
그러나 딴죽을 걸 수도 없었다. 혹시나 마음이 상해 다시 사라져 버리면 곤란한 건 내 쪽이었으니까.
“으음, 밥이나 먹을까?”
어느새 시녀의 목소리로 돌아온 힐다가 물었다.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명백한 명령이었다.
나는 노집사를 불러 다이닝룸에 식사를 차려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저녁을 먹을 시간이기도 했다.
“아, 두 명분을 준비해 주세요.”
“누가 오십니까?”
노집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데반이 별궁을 비운 지 꽤나 오래됐고, 그동안 나는 혼자서 식사를 했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그게……. 네, 뭐. 그렇게 부탁드려요. 식사 다 차린 후에는 모두 나가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마님.”
수십 년간 데반을 옆에서 모신 사람답게, 노집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순식간에 테이블 가득히 음식이 차려졌다. 그동안 힐다는 별궁 이곳저곳을 흥미로운 눈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럼 즐거운 식사하십시오.”
노집사가 손짓하자 시종과 시녀가 빠르게 다이닝룸을 나갔다. 그럼에도 힐다가 움직이지 않자 노집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지금 힐다의 겉모습은 내 시녀였지.
“저 시녀는 괜찮아요. 시중들 사람이 필요해서. 그만 나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이만.”
노집사까지 방을 나가자 마침내 힐다와 나 단 둘뿐이었다.
힐다는 내가 권유하기도 전에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모두를 내보낼 필요는 없었는데.”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힐다가 제 모습을 한 번 훑어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몸이 시녀라서? 넌 이제 대공비고?”
“……그래.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좀처럼 없거든.”
“아하, 하여튼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쓴다니까. 너한테 하는 말은 아니야. 너를 포함한 모든 인간한테 하는 말이지.”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힐다의 태도에 움찔 몸이 떨렸다. 물론 힐다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응?”
나는 떨리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힐다를 빤히 바라봤다.
“넌 도대체 누구야?”
별 재미없는 이야기를 다 듣는다는 듯 힐다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푹 찍었다. 그러더니 나이프는 사용하지도 않고 그대로 큰 덩어리를 들어 올렸다. 소스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에 대해 안다고 네가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게 왜 궁금하지?”
“살려달라고 해도 살려주지 않을 거잖아. 내가 죽는 게…… 순리라며.”
“흐응…….”
“너에 대해 알아내서…… 나 스스로 살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아, 너의 그 똑똑한 친구를 믿는 건가?”
“똑똑한 친구?”
“그 왜, 전혀 신관 같지 않은 아이.”
펠로스를 말하는 건가? 힐다는 정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방금 전 정원에서도, 그녀는 내가 신전과 백작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사실을 아는 것처럼 말했었다.
정말로…… 전지전능하기라도 하다는 건가?
“신앙심이 없는 것 하나는 마음에 들더라. 똑똑하기도 하고. 하지만 인간이 똑똑해봤자지. 안 그래?”
힐다가 고기 덩어리를 통째로 입에 욱여넣어 씹으며 투덜거렸다.
나는 그녀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의 정체에 대해 입을 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그 몸은?”
“몸?”
“그래, 그 몸의 주인……. 그러니까 그 시녀도 처음부터 너였던 거야?”
“이 몸 자체를 내가 만들어 낸 거냐고 묻는 거야? 그건 아니야.”
“아니라고?”
“잠깐 빌린 것뿐이야.”
“그럼 진짜 시녀는? 그녀는 어떻게 된 거지?”
고기를 오물거리며 씹는 힐다의 입가에 핏물이 가득했다. 식사 예절이라고는 하나도 배우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왜? 걱정돼? 네 목숨이나 걱정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힐다를 노려봤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뚝 떨어진 입맛은 시간이 가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답 없이 계속 노려보자, 힐다가 슬슬 눈을 피했다. 그러더니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알았어. 몸은 주인한테 곧 돌려줄게.”
“……그럼 넌? 설마 또 사라질 생각은 아니겠지?”
“그건 아니야. 다른 몸을 빌릴 수도 있고, 새롭게 만들 수도 있지.”
“만든다면…….”
나는 오래 전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힐다는 힐다랍니다. 힐다는 처음부터 힐다였어요.’
<“그래, 그때처럼.”>
또다시 두 갈래로 나눠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어느새 그녀가 내 속마음을 읽은 게 분명했다.
<“주, 주, 주근깨가 가득한…… 겁이 많은 히, 힐다로 있을 수 있어요. 아, 아가씨.”>
태연한 표정을 하곤, 힐다는 목소리만 벌벌 떠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고기를 씹는 입을 멈추지 않는 게 가증스러웠다.
<“어, 어때요. 아가씨?”>
“……그만해.”
“왜? 마음에 안 들어? 그냥 이 몸으로 계속 있을까?”
나는 장난기가 가득한 힐다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아까부터 그녀의 말이 영 거슬렸다.
“계속 있는다는 건…… 여기서 지내겠다는 거야?”
“그래.”
“왜?”
“싫어?”
금방이라도 심통을 부릴 듯, 힐다가 볼을 부풀렸다.
“아니, 싫은 건 아니야.”
서둘러 힐다를 달랬다. 그녀가 좋은지 싫은지 묻는다면 당연히 싫었다.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힐다는 또 희망이었다. 그녀는 내 몸에 가득한 흑마법이 무엇인지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리고 어쩌면…… 신전 지하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할 방법 역시 알고 있을지도.
“그럼 좋아?”
“뭐?”
생각에 빠져 있는 나에게 힐다가 불쑥 물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포크를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식탁에 얼굴을 괬다.
“내가 있으면 좋아?”
어린아이나 할 법한 질문이었다. 비록 어조나 표정은 두려울 정도로 싸늘했지만.
나는 드래곤에게서 우리를 구해줬던, 그날의 힐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번 한 번뿐이야. 재미없는 건 싫으니까.>’
그 변덕스러운 태도와 지금의 반응, 거기에 힐다를 보고 떠올렸던 데이지의 꽃말인 ‘순수’까지. 나는 힐다를 다루는 방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느새 힐다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이 조금쯤 가셔 있었다. 이 존재에게는 악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그저…… 변덕일 뿐인가?
정말 그렇다면 변덕으로 날 살려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네가 있는 게 좋아.”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힐다가 어깨를 으쓱이곤 콧노래를 불렀다.
“계속 여기 있으면 좋겠어.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뭐든 다?”
“그러니까 네가 먹고 싶은 음식이나 갖고 싶은 것, 그런 거 말이야.”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건네듯 말하자 힐다의 표정이 점점 풀어졌다.
그러더니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결심했어.”
“여기에 계속 있을 거야?”
“그래. 그리고 널 도와줄게.”
“정말?”
나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와준다니.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힐다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응.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네.”
“도와준다는 건…… 그러니까 살려준다는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해?”
빠르게 테이블을 벗어난 힐다가 문가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잠깐만, 어디 가?”
“널 도와줄 준비를 해야지.”
“뭐?”
다이닝룸의 문을 활짝 열고, 힐다가 웃었다.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거 어쩐지……. 영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힐다가 말하는 ‘도와줄 준비’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이.
*
‘도와줄 준비’를 한다던 힐다는 그날 이후로 별궁에서 지냈다.
본래 시녀의 몸은 돌려주고, 내가 알던 몇 년 전 힐다의 모습으로 변해서.
다만 예전처럼 평민 하녀가 되기는 싫다고 했다.
“시중 드는 게 얼마나 귀찮았는지 알아?”
그녀는 손가락을 한 번 튕겨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했다.
순식간에 힐다는 귀족 영애가 되어 있었다. 제도에서 먼 곳에 살다가, 친구인 나를 만나기 위해 별궁에 방문한 남작 영애로.
나에게 친구가 있을 리도 없고, 힐다처럼 예절을 모르는 귀족 영애가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방 바로 옆에 있는 손님방을 쉽게 차지했다.
“공작이 제일 좋은 거면 공작 영애로 할 걸 그랬나.”
그런 소리를 하며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원하는 대로 주문했다. 그래봐야 무리가 될 정도로 비싼 것들은 없었다. 힐다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내 행동 자체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힐다는, 치료를 시작했다.
“……치료?”
“그래. 얼른 누워.”
내 방에 온 힐다가 침대를 가리켰다.
“누우라고?”
“도와준다고 했잖아.”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힐다를 바라봤다.
“도대체 뭘 하는 건데? 그 치료라는 걸 하면…… 내가 살 수 있는 거야?”
“그건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거야. 어서 누우래도?”
힐다의 눈썹이 날카로운 산을 만들었다. 이 이상 물어봤다간, 치료고 뭐고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아 서둘러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나는 데반도 없는 별궁에서 힐다에게 몸을 맡겨야만 했다.
그렇게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힐다는 내가 궁금한 건 하나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거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정원이 얼추 꾸며지고, 힐다와 함께 지내는 것도 꽤 적응 됐을 때였다.
마침내 데반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