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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70화 (70/123)

70화

데반이 나를 좋아한다고? 웃기는 소리.

펠로스도 틀릴 때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정원을 혼자 거닐며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래서야 정말로 킬리언이 신전에 끌려간 게 맞는지, 또 끌려간 이유가 데반 때문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거 아냐?”

펠로스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반쯤 잃어버렸다.

“거기에 내기를 하긴 왜 해?”

나는 카렌이 와인 대작으로 위보우 가문의 가보를 펠로스에게 넘겨줬던 일을 떠올렸다. 펠로스가 그 가보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는 걸로 봐선 분명히 이번 내기도, 펠로스가 먼저 하자고 했으리라. 거기에 이길 자신도 있었을 거고.

그 이유는…… 데반이 나를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어서?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참나, 좋아하기는 무슨.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면 모두가 날 우습게 볼 게 뻔했다.

데반이 나를 좋아할 리가. 그 냉랭한 얼굴을 하고선? 더군다나 나는 그에게 사기를 쳤다.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라고, 데이지 향이 나는 그 목걸이까지 만들어서.

그래, 우리는 고작 그렇게 엮인 사이일 뿐인걸.

새삼스럽게 축 가라앉는 마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발로 툭 찼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정원 이곳저곳에 패인 구멍들을 바라봤다. 아직 화목을 모두 심지 못한 상태라, 정원은 조금 황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 하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별궁 전체를 빙 두르고 있는 정원을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터졌다.

내게 이런 일을 맡겨놓고, 데반은 얼굴 한 번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가 킬리언의 일에 신경 쓰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 일을 맡긴 게 틀림없었다. 점점 확신이 들었다.

거기에 데반은, 내가 이렇게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쏟아붓는 동안 혼자 바삐 행동했다.

결혼식이 끝난 다음 날부터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길래, 별궁에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는 걸까. 식사를 할 때도 없는 것은 물론 한 번 집무실에 찾아갔을 때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아예 별궁을 나간 건가?”

우리가 한 건 그저 계약으로 이루어진 결혼일 뿐이었으나, 꼭 결혼식을 하자마자 소박맞은 기분이었다.

“역시 좋아할 리가 없지.”

좋아하면 이렇게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 리가…….

“……응?”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별궁의 담이 보였다. 생각에 빠져 무작정 걷다 보니 언제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돌아가려고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잠깐만.”

무언가 이상했다. 담이 푸릇한 잎사귀로 가득한 것까지는 그런가 보다 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주변에 온 적이 없었으니까. 비록 정원은 황폐해도, 담벼락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을 수도 있지.

문제는 그 아래였다.

멀리 보이는 별궁의 담 아래에 새하얀 꽃이 가득했다.

꽃이 저기 왜 있지? 이번에 정원 관리를 맡게 되면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원에 마구잡이로 나 있는 잡초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꽃도 함께 제거하기로 했다. 새로 정원을 꾸미는 데 방해가 됐으니까.

그러니…… 꽃이 저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실수가 있었던 걸지도. 그렇다면 다시 시종을 불러 꽃을 뽑으라 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꽃 무더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새 나는 홀린 듯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새하얀 꽃이었으니까. 너무나 익숙한…….

어느덧 발치에 가득한 꽃을 멍하니 내려 봤다.

데이지 꽃이었다. 또다시, 심은 적도 없는 데이지 꽃이 가득했다. 새하얀 눈처럼.

“말도 안 돼…….”

거들떠도 안 봤던 꽃이었다. 애초에 정원에 새하얀 꽃은 절대 심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었다.

아니, 설령 심었다고 하더라도 벌써 꽃이 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일 리 없었다. 저번에 본 데반의 어린시절처럼, 모두 힐다의 환상이리라.

허리를 굽혀 데이지 꽃에 막 손을 데려고 했을 때였다.

“아가씨!”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먼발치에 시녀가 서 있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어? 아니, 그게…….”

시녀가 의아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정말로 환상이라면, 시녀는 보지 못해야 하는 게 아닌가?

“벌써 날이 저물었어요. 이제 그만 들어가셔야죠.”

그러나 시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저 혹시…….”

“네?”

“혹시 이 꽃이 보여?”

“그럼요. 왜요?”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시녀에게도 보인다고? 내가 뭔가 착각한 건가? 정말로 그저 실수가 있었던 건가?

어쩌면 데반이 별궁 정원에 데이지를 심으라고 명령해둔 건 아닐까? 대공 저에도 데이지 꽃이 가득했었으니까…….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시녀가 이젠 내 팔을 끌기 시작했다.

“얼른요, 아가씨. 얼른 들어가요.”

“어어…….”

그녀에게 맥없이 끌려 몇 발자국을 걸었을 때였다.

“잠깐……. 잠깐만.”

“네? 왜 그러세요, 아가씨?”

나는 시녀의 팔을 세게 털어냈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너…….”

시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아스트릴라의 명령으로 나를 보살피는 황궁 시녀였다. 내가 황궁에 온 건, 이미 데반과 결혼을 약속한 뒤였고.

그러니까 그녀는…… 나를 한 번도 ‘아가씨’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아이참, 아가씨. 왜 그러세요. 데이지 꽃이 신경 쓰이세요?”

저런 식의 말투를 쓰면서 미소 짓지도 않았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힐다…….”

“네?”

가증스럽게 깜빡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구나, 너……. 돌아왔구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곤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야, 그새 눈치가 더 빨라졌네.”>

“너……!”

<“오랜만이야.”>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시녀, 힐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물러나던 것을 멈추고 덥석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생각해보니 도망칠 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들어야 할 것도.

“이번엔…… 이번엔 그냥 사라질 수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힐다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그렇게 붙잡는다고 내가 사라지지 못할 것 같아?”>

“그건…….”

<“걱정 마, 술래잡기는 끝났으니까.”>

“뭐?”

<“너도 슬슬 느끼고 있잖아. 네 힘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그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너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아. 네가 내 안에 이상한 힘을 넣은 거지? 그것 때문에 신력이 사라지고 있는 거고.”

<“이상한 힘이라니, 서운하네.”>

“뭐?”

힐다는 정말로 섭섭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심통이 난 어린아이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그 힘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잖아, 잊었어?”>

“그거야, 그렇지만…….”

친근한 척하는 그녀의 태도가 어색했다.

<“신력은 신력이라고 해주면서.”>

힐다가 팩 고개를 돌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걸. 흑마법…은 아니잖아, 안 그래?”

살살 달래듯 말하자, 힐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래. 이름 붙여지지 않은 힘이지. 나에 대해 꽤 조사를 했나 봐?”>

“그야…….”

<“나 때문에 죽을까 봐? 내 힘이 신력을 몰아내 널 죽일까 봐?”>

힐다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방금 전까지 삐져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즐거운 표정이었다.

“……정말로 죽어?”

<“왜? 죽기 싫어?”>

“……그래. 난 죽기 싫어.”

<“알아. 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거 다 봤거든. 신전에 있을 때, 백작가에 살 때, 대공 저에 있을 때도. 넌 참 살기 위해 열심히야, 그치?”>

“그럼……!”

나는 부질없을 걸 알면서도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줘. 살고 싶어.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지?”

힐다가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그것조차 퍽 과장돼 있어, 약 올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어쩔 수 없어. 넌 죽어야 돼.”>

“뭐?”

<“그렇게 정해졌는걸. 그것도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말이야.”>

죽는다고? 정말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의 입에서 단정적인 말이 나오자 나는 충격에 빠졌다.

<“너, 그 녀석과 만났지?”>

내가 받은 충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힐다가 물어왔다.

<“그 녀석 말이야. 신.”>

“……그렇다면?”

<“그 녀석한테 듣지 않았어? 모든 것은 순리가 있다나, 뭐 그딴 말.”>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걱정하지 마렴. 모든 건 순리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니까.>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건데?”

<“내가 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거든.”>

“……내가 죽는 게, 순리라는 거야? 정해져 있는 일이라고? 거스를 수 없는 일?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억울함에 말을 쏟아냈지만, 힐다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 킬킬대며 웃었다.

<“바로 그거야.”>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코앞으로 불쑥 다가온 그녀가 탁-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주위에 가득하던 데이지 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허벌판이 된 황량한 정원에는 기괴한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는 법이거든.”>

나는 즐거운 듯 웃고 있는 힐다를 바라보며, 며칠 전 봤던 데이지 꽃말을 떠올렸다.

‘순수’

힐다의 웃음은 그와 꼭 닮아 있었다.

아무런 악의도 품지 않은 순수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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