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잠깐만, 거긴 비워줘!”
내 고함소리에 열심히 땅을 파던 시종 하나가 멈칫했다.
“그래, 거기. 거기는 내가…… 내가 따로 심을 게 있어.”
“무슨 꽃인데요? 말씀해 주시면 준비해 오겠습니다.”
시종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냐. 내가 알아서 할게. 그게 조금 구하기 어려운 꽃이라서.”
대충 얼버무렸다. 시종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서도 순순히 다음 자리로 넘어갔다.
“레이디, 덥지 않으십니까?”
시종들이 열심히 땅을 파고 묘목을 심는 걸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불쑥 한 사내가 나타났다.
갑옷을 입고 있는 카렌이었다.
“카렌 경?”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덥지 않느냐면서 저는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 것도 그렇고, 애초에 카렌의 얼굴을 본 게 퍽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이냐니요. 저도 이곳에 살고 있는데요. 더군다나 지금 레이디가 계신 곳은 제가 일 년 내내 훈련을 하는 연무장 근처가 아닙니까.”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보자, 과연 저 멀리 병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근처라고 하기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별궁에 온 지 아직 일 년이 되지 않았으니, 일 년 내내 훈련을 한다는 말도 어폐가 있고요.”
“레이디! 자꾸 그렇게 따지실 겁니까?”
카렌이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렌은 역시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장난이에요. 그래서 왜 오신 건데요?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그냥 괜찮으신가 해서요. 불과 얼마 전에 큰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카렌다운 말에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가 내 눈치를 보느라 킬리언의 일에 대해서 묻지도 않는데.
“별로 안 괜찮아요. 잠깐, 대체 그때 카렌은 어디 계셨던 거예요?”
생각해보니 카렌은 꽤나 대단한 기사였다. 데반의 친한 친구이자 보좌관이기도 했고.
데반의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을 이유도 없거니와, 있었다면 나서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카렌만 있었다면 킬리언을 더 빠르게 제압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의아하게 바라보자 카렌이 고개를 저었다.
“저야 전하가 대기하고 계셨던 오른쪽 방에 있었죠. 타이밍에 맞게 검을 던져주던 제 모습을 보지 못하신 겁니까?”
“아…….”
그제야 커튼 너머로 누군가 데반의 검을 던졌던 일이 떠올랐다.
“그 후에는요? 그 후엔 어디 계셨는데요?”
“신전 안에 있던 신관이나 하객들을 밖으로 피신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자가 병력을 얼마나 데려왔을지 모르니까요. 혹시라도 일반인이 다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나는 그 말에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야 그렇다 쳐도, 자신의 친한 친구이자 주군을 그렇게 버려뒀다고?
“왜 그러십니까? 설마 제가 레이디를 구해주지 않아서 심통이 나신 겁니까?”
“……제가 아니라 데반이요. 데반은 당신의 친구잖아요.”
내 말에 카렌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요. 그러니까 레이디는…… 제가 데반을, 그러니까 전하를 도와줬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구해줬어야 한다고?”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기사잖아요.”
“이것 참, 레이디는 아직도 전하를 모르시는군요.”
“……네?”
“제도로 올라올 때 마물을 상대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덟 마리였던가. 거기에 드래곤도 있었고요. 그 모든 걸 해치운 게 레이디는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물론 데반이죠. 데반이 검을 잘 다룬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킬리언은 근위대장이고…….”
“레이디.”
카렌이 고개를 저으며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펠로스에게 이런 무시를 당한 적은 있었어도 카렌에게 당한 적은 없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여덟 살 때 말입니다. 저는 수습 기사였습니다.”
카렌이 돌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땐, 긴 이야기가 될 게 뻔했다. 난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카렌 경, 미안하지만 난 바빠요. 이 넓은 정원을 모두―”
“그리고 그때 전하를 처음 만났죠.”
데반? 나는 멈칫했다. 펠로스도 여덟 살 때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어린 데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위보우 가문은 대대로 황궁 근위대장을 역임했습니다. 걸출한 기사들을 배출했고, 특히나 저희 아버지께서는―”
“잠깐만요, 카렌 경. 그래서요?”
“예?”
“그때 데반을 만나서 뭐가 어땠는지부터 이야기해줘요.”
“아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예, 그러니까 제 말의 요지는 하여튼 저희 가문은 대단했고, 그러니 저 역시 어린 시절부터 걸출한 기사들 사이에서 훈련 받았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 나이나 경력에 비해 검술이 뛰어났고요.”
또 줄줄이 이어지는 궁금하지 않은 내용에 카렌의 말을 반쯤 흘리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전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분께선…… 단 한 번도 검을 잡은 적 없으셨죠.”
“단 한 번도요?”
솔깃해 묻자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황태녀 전하께선 고작 다섯 살에 목검을, 일곱 살에 진검을 들었던 걸 생각한다면요.”
“그런데요?”
“그래서 제가 전하에게 검술을 가르쳐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정원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로 시작했죠. 그리고 진검을 쥐기까지 고작 두 달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
“진검을 쥔 그날, 저를 연무장 바닥에 쓰러트리셨죠.”
“카렌 경을요?”
“예, 태어날 때부터 검을 쥔…… 글보다 먼저 검을 배운 이 카렌 위보우를 말입니다.”
난 그제야 카렌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입니다, 전하께서는. 레이디, 지금도 제가 왜 전하를 두고 일반인을 대피시키는 데 집중했는지 궁금하십니까?”
나는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킬리언 디에고, 그자가 근위대장이라고요? 미안하지만 레이디, 그 자리는 제가 고사한 자리입니다. 그런 저를 수하로 두신 게 전하시고요.”
카렌은 결국 자신이 킬리언보다 강하고, 또 그런 자신보다 데반이 강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데반이 나에게 어서 도망가라고 한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나. 킬리언을 쉽게 제압할 자신이 있어서…….
“……알았어요. 충분히 납득했어요.”
“그런데 레이디, 혹시 저희 가문에 대해선 안 궁금하십니까? 저번에 펠로스에게 들은 건데, 저희 가문 가보를 궁금해하셨다고.”
“아니요, 안 궁금해요. 제발요, 카렌. 저는 바빠요.”
카렌을 한 손으로 슬쩍 밀며 여전히 화목을 심는 데 여념이 없는 시종들을 바라봤다. 카렌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실은 전 이런 이야기를 드리러 온 게 아니었는데요.”
“그럼 왜 온 건데요?”
“궁금한 게 있어서 왔습니다. 결혼식 예복 말입니다. 전하와 함께 고르셨다고 들었는데 정말입니까?”
“네?”
뜬금없이 예복이라고? 카렌이 예복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질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종잡을 수 없는 화제에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카렌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꾸미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 모습을.
“두 분 다 예복이 아주 아름답더군요.”
“어……. 고마워요?”
“고마우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레이디!”
“예?”
도대체 뭐라는 거지? 카렌은 이제 발까지 구르며 억울해 하고 있었다.
“아름다우면 안 되죠!”
“예에?”
“레이디 덕분에 제가 내기에서 진 게 아닙니까!”
내기?
“무슨 내기요? ……제 결혼식에 내기를 거셨다고요?”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잔뜩 흥분한 카렌은 내 표정 따위는 눈치도 채지 못하고 제 할 말만 이었다.
“도대체 데반의 고집을 어떻게 꺾으신 겁니까!”
평소처럼 전하가 아니라 데반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대체? 제가 지금 세 번째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요. 쓸데없는 소리를 하실 거라면 그만 가주세요. 전 바쁘다고요, 카렌 경.”
“레이디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데반의 그 끔찍한 미적 감각을요. 그러니 지금 정원도 레이디께서 가꾸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거야……. 아니, 그러니까 경의 말은, 제가 어떻게 데반을 설득해 아름다운 예복을 입혔는지 그게 궁금하시다는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셨죠? 저에게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협박하셨습니까? 레이디의 신력을 쓰셨나요?”
“신력이 무슨 힘인지는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카렌은 표정을 풀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카렌은 정말로 진지해 보였다. 대답을 듣기 전까진 쉽게 자리를 뜨지 않을 기세였다.
“말해주십시오, 레이디.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제가 내기에서 져서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펠로스가 저를 얼마나 이용해먹는지―”
“펠로스와 내기를 하신 거예요?”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어떻게 설득한 건지나 알려 주십시오!”
어떻게 설득했냐니…….
나는 데반과 예복을 고를 때를 떠올렸다. 카렌이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은 결단코 한 적 없었다.
“그냥…….”
“그냥?”
카렌이 귀를 쫑긋했다. 나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냥…… 그런 건 안 어울린다고 했는데요.”
“예?”
“이쪽이 훨씬 잘생겨 보인다고……. 잘생긴 얼굴 뒀다 뭐할 거냐고? 뭐 그런 소리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뭐라고요? 그러니까 고작 칭찬 조금 해줬다고 데반이 고집을 꺾었다, 이 말입니까?”
카렌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거짓말 마십시오, 레이디. 제가 그런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믿든 안 믿든 그게 진실인걸요.”
어깨를 으쓱이자 카렌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펠로스가 한 말을 믿는 게 낫겠습니다.”
“펠로스가 뭐라고 했는데요?”
과연 그 자칭 천재는 무슨 대답을 했을까 궁금해서 물었다. 이번엔 카렌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툭 내뱉었다.
“데반이 레이디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