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럼 레이디, 부디 오늘 하루만은 데반의 말대로 해주십시오.”
내 방 창문을 열며 펠로스가 말했다.
“설마 갈 때도 거기로 가실 건가요?”
“저에게도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요.”
“문을 이용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게 대체 뭔지 궁금하네요.”
펠로스가 좁은 창문 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아무튼 푹 쉬세요. 제발 황궁 감옥에 가겠다거나, 킬리언을 찾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방금 데반이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신전에서 데반을 처리할 생각이라고요.”
그것도 나 때문에.
밖으로 몸을 반쯤 뺐던 펠로스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 레이디. 참 손이 많이 가는 분이시군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 레이디가 뭘 하실 수 있습니까?”
“그건…….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요? 당신은요?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는데요?”
발끈해서 소리치자 펠로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저도 없는데요?”
“……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사내는 자신의 친구가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어떻게 저렇게 태연한 걸까?
“그럼 데반을…… 내버려 두실 건가요? 데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거예요?”
“지금은요.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급한 일이 뭔데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펠로스를 훑어봤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현재 입고 있는 낡은 옷과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는 데반의 부탁을 수행하는 중이랍니다. 그것도 레이디와 데반 둘 모두를 위해서요.”
나와 데반을 위해서? 그 말은 신전과도 관련이 있다는 건가?
“그리고 데반은 걱정 마십시오. 첫째, 데반의 옆에는 제가 있습니다. 둘째, 저는 굉장히 똑똑하고요. 셋째, 저는 데반을 죽게 놔두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가 황좌에 오르기 전까지는요.”
“……네? 황좌요?”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펠로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저는 그 녀석을 반드시 황제로 만들 거거든요.”
“하지만, 황태녀 전하가 있잖아요. 그, 신전에서 이미 정해둔 거고…….”
“아아, 정당성이요! 하지만 재미없지 않습니까. 정해진 길로만 가는 건.”
도대체 뭘 어떻게 할 생각이지? 반란이라도 벌이겠다는 건가? 펠로스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건 뭐, 나중 이야기고요. 레이디께서 신경 쓰실 일도 아닙니다.”
이젠 나와 결혼한 사람인데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
“그럼 말을 말지 그러셨어요.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요.”
“하지만 왠지 레이디껜 말하고 싶었는걸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레이디와는 말이 잘 통한다고. 그러니까 레이디. 제발 알아주십시오. 모든 건 레이디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꼭 억지나 부리는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레이디께선 쉬실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어요. 이러나저러나 레이디와 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요.”
펠로스가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 제발, 쉬십시오.”
그 말을 마치고 펠로스는 좁은 창문 밖으로 몸을 다시 내밀었다.
“……고마워요, 정말.”
창문을 빠져나가더니 순식간에 창틀에 매달린 펠로스가 싱긋 웃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고맙다는 인사는 됐다고. 꼭 하고 싶다면 제가 아니라 데반 놈에게 해주세요.”
“네? 데반이요?”
“다 그 자식이 부탁한 거니까요. 오늘 이곳에 온 것도, 레이디에게 전할 말도 모두. 레이디는 저 같이 솔직한 사람이 하는 위로가 아니면 들어먹지 않을 거라면서요.”
데반이 그랬다고? 내 어깨를 두드리며 걱정하지 말라던 데반의 서툰 위로가 떠올랐다.
그저 우리가 계약 관계이기 때문에, 일이 잘못될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온전히 나를 걱정했던 건가?
그렇다면, 어쩌면 어젯밤 꿈처럼 들렸던 그 낮은 목소리도…….
“저는 그 놈이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처음 만난 여덟 살 때를 제외하곤 처음이었습니다.”
생각에 잠긴 나에게 펠로스가 덧붙였다.
“여덟 살이요?”
광장에서 꽃을 들고 웃던, 아마도 힐다가 꾸며낸 게 분명한 데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되묻자 펠로스가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물어보셔도 당장은 대답해 드리지 않을 겁니다. 레이디는 호기심을 좀 죽일 필요가 있어요. 자, 그럼 저는 이만.”
그 말을 끝으로 펠로스가 휙 뛰어내렸다.
“펠로스?”
깜짝 놀라 아래를 굽어보자, 어느새 능숙하게 벽을 타고 있는 펠로스가 보였다. 그리곤 얼마 안 가 바닥에 착지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것도.
“데반이 부탁한 일을 하러 간다고 했지…….”
도대체 그게 뭘까? 뭘 하길래 저런 옷을…….
‘레이디는 호기심을 좀 죽일 필요가 있어요.’
나무라는 듯한 펠로스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펠로스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호기심을 가질 때가 아니라, 푹 쉴 때였다. 그리고 다음을 대비해야지.
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침대에 누웠다.
‘저는 지금 디에고 백작이 죽은 게 레이디의 탓이 아니란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확신에 차 있던 펠로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정말 데반이 나를 걱정하고 있을까? 펠로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진짜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데반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이 올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
다음 날, 나는 눈을 뜨자마자 시녀를 불렀다.
배가 고파 죽겠으니, 제발 씹을 수 있는 음식을 가져와 달라는 말에 그녀는 반색했다.
마침내 식사를 마치고는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고작 하루 만인데 바깥 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마님!”
“집사?”
그리고 방 밖으로 나온 나를 붙든 건, 다름 아닌 노집사였다. 노집사와 나는 황궁으로 오고 나서부터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가 너무 바빠 보이는 탓이었다. 물론 나도 결혼식 준비로 이것저것 바빴고.
“마침 잘 됐습니다! 안 그래도 찾아뵐 생각이었는데요!”
“음, 왜요?”
어쩐지 불안한 느낌에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자 노집사가 싱긋 웃었다.
“별궁의 정원 말입니다. 그걸 마님께서 관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원이요?”
난 미간을 찌푸렸다. 별궁에는 커다란 정원이 딸려 있었다. 본 황궁에 비할 바는 안 되지만 상당한 크기였다. 그걸 나보고 관리하라고?
“아시다시피, 대공 전하께서는 음……. 이런 쪽에 조금 무관심하셔서요.”
조금? 조오금? 눈을 흘기자 노집사가 시선을 피했다.
“대공 저에서는 할 일 없는 병사들이 정원을 가꿨지만, 차마 황궁 근위대에게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그야……. 더군다나 그들은 모르긴 몰라도 지금 킬리언의 일로 한창 바쁠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요? 저보고 잔디를 깎고 꽃을 심고, 뭐 그러라는 건가요?”
“그런 거야 시종들이 하겠지요. 마님께서는 그저 어느 곳에 무슨 꽃을 심을지 명령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노집사가 들고 있던 책과 서류 뭉치를 내게 건넸다.
“이게 뭐죠?”
얼떨결에 받은 그것들은 부피가 상당했다.
“정원의 약도와 화목의 종류입니다. 참고하시라고 중앙 귀족들이 꾸민 정원을 그려 넣은 샘플도 준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 정원을 꾸미는 데 필요한 자료라고?
황당함에 서류와 집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집사는 여전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마님, 어서 정원으로 가시죠. 꽃이 피는 계절이 되기 전에 모든 화목을 심어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어…….”
그러면서 나를 떠미는 손길엔 힘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쩌면 이 일조차 데반의 계략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정원을 꾸미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킬리언이나 신전의 일에 신경을 못 쓰게 하려는 계략.
그도 그럴 게 정원의 크기는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 화목의 종류도 차마 외울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이 일을 다 끝냈다간, 며칠이 아니라 몇 주는 더 걸릴 것이 분명했다.
“다시 결혼식 예복이라도 고르는 기분이네.”
내 눈엔 다 똑같아 보이는 화목의 종류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내 옆에 있던 시녀가 작게 웃었다.
“이거, 진짜 꽃말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야?”
“그럼요, 전하. 이것 봐 보세요. 여기 이 남작은 꽃말을 서로 이으면 한 편의 시가 되도록 화목을 심었대요.”
시녀가 내 앞에 그림을 내밀었다. 집사가 줬던 샘플 중 한 장이었다.
심드렁하게 바라보다, 나는 문득 그 그림 속에서 보이는 새하얀 꽃에 시선을 빼앗겼다. 고작 작게 그려진 그림일 뿐인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모양새였다.
“이거……. 혹시 데이지 꽃인가?”
시녀가 내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음, 그러네요. 왜요? 데이지를 좋아하세요?”
“뭐?”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반문하자, 시녀가 목을 움츠렸다.
“왜, 왜 그러세요?”
“아…. 아니야. 미안. 데이지는… 데이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러세요?”
시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옆에서 떨어졌다.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날 건 뭐람.
‘아가씨, 데이지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주 오래전, 대공 저에 있을 때 힐다가 나에게 했었던 똑같은 질문이.
힐다는, 아니 그 존재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드래곤이 우리를 공격했을 때, 그리고 데뷔탕트를 하러 가던 때……. 힐다가 나타난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힐다가 나타나야, 내 안의 흑마법이 무엇인지 또 그걸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을 텐데.
대답해 주는 건 또 다른 문제였지만.
나는 종이 위에 작게 그려진 데이지 꽃을 응시하다,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대신 다른 꽃들을 구경할 생각으로 책을 펼쳤는데, 우연인지 그도 아니면 운명인지 펼친 게 데이지 꽃에 관한 페이지였다.
하필이면…….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려다, 나는 멈칫했다.
데이지의 꽃말.
여러 가지 단어가 나열돼 있는 데이지의 꽃말 중, 한 가지에 시선이 꽂힌 탓이었다.
‘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