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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67화 (67/123)

67화

겨우 배가 찬 건지 펠로스가 의자에 축 늘어졌다. 쿠키 한 통을 거의 다 비운 뒤였다.

나는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펠로스의 옆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디에고 백작이 죽고 난 후, 백작 저의 상황에 대한 내용이었다. 재산의 행방이라든가, 나머지 사용인들의 처지 같은 것들.

나는 그런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다가, 대수롭지 않은 척 물었다.

“그래서…… 킬리언은요?”

“그 자는 잡히면 최소 종신형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킬리언이 사라졌다고 하셨잖아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고, 그게 누구인지도 아신다고 했어요.”

펠로스가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들을 말은 들어야만 했다.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의미를 담아 단호하게 묻자 펠로스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제가 그랬던가요?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군요.”

“……누구죠?”

펠로스는 쩝, 입소리를 냈다.

“레이디, 저는 사실 레이디를 썩 좋아한답니다.”

“고백을 듣자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요.”

“레이디와는 말이 잘 통하거든요. 데반 놈은 무슨 말을 하든 본론만 말하라며 윽박지르고, 카렌 놈은 제가 하는 말을 반절은 이해한 건지 모르겠고…….”

“비교 대상이 그 둘뿐이라면 별로 고맙지도 않네요.”

“그래서…… 저는 레이디에게 제가 아는 사실을 모두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포석은 그만 까시고요.”

단호한 내 말에, 펠로스는 불쌍한 척 하던 것을 관두고 어깨를 으쓱였다.

“데반이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킬리언을 빼돌린 게 누구인지, 저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요? 데반이? 왜요?”

“정확히는 킬리언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레이디께서 더 잘 아시지 않나요?”

“저는 모르겠는데요?”

“이것 참…….”

펠로스가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데반 놈의 말만 들으면 레이디와 데반이 둘도 없는 신혼 부부 같던데요. 꼭 서로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교감하는 사이 같다고나 할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데반이 레이디를 걱정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나를…… 걱정하고 있다고?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로 예상치 못하셨나 보군요.”

“그야…….”

나는 요 근래의 일을 되짚어 봤다. 신전에 잠입해 코델리아를 비롯한 희생자들을 마주했고, 그 다음엔 오라비가 아비를 죽여 내 앞에 나타났다.

……걱정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펠로스의 말대로 신혼부부니 뭐니 그런 게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응당 걱정할 만한 일들이 내 앞에 일어나고 있었다.

더군다나 우리의 목표를 위해선, 내가 꼭 필요했으니까.

“제가 쓰러질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군요.”

“네?”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자, 펠로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것도 맞긴 합니다만…… 어딘가 논점이 어긋난 것 같군요? 저는 데반이 레이디를 정말로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로 걱정한다니…….

신전에서 도망쳐오던 새벽이 떠올랐다. 그날도 데반은 나를 걱정하는 얼굴을 했었지.

그야, 우리는 같은 걸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 내가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곤란하겠지. 그것뿐일 거다.

“네, 뭐. 그래요. 그건 알겠어요.”

대충 손을 휘젓자 펠로스가 중얼거렸다.

“이거야 원, 데반도 고생 좀 하겠군요.”

웬 고생?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큰 목소리였지만 나는 펠로스의 말을 무시했다.

그보단 다른 게 급했으니까.

“아무튼 데반의 걱정은 잘 알았고요. 전 괜찮아요. 솔직히 지금까지 겪은 일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이젠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안 놀랄 것 같아요.”

“레이디…….”

“그러니까 얼른요. 답답하게 굴지 말고 말해줘요.”

펠로스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 저는 제가 굉장히 몰인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네요.”

“그런 저조차, 지금 레이디에게 닥친 일이 너무 벅차다는 생각이 듭니다.”

“……펠로스.”

“저도 데반과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 레이디는 쉬실 때에요. 킬리언을 데려간 게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보다 맛있는 걸 먹고 아름다운 것만 바라보며 심신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제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죠.”

펠로스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하는 게 뻔했다.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당신이라면요?”

“네?”

“당신이라면 모른 척 쉴 수 있어요? 당신과 깊게 관련된 일들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아주 슬프고, 잔혹하고,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죠.”

“레이디…….”

“모르고 살면 편할지도 모르죠. 맛있는 걸 먹고 아름다운 걸 바라보는 거, 좋아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겠어요?”

펠로스가 낮게 한숨 쉬었다. 테이블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하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렸다는 건 꼭 비밀로……. 하아, 아닙니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레이디, 그저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오.”

“……약속할게요.”

“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절대로 자책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주십시오.”

나는 꼴깍, 마른 침을 삼키곤 최대한 진심을 담아 말했다.

“……노력해볼게요. 정말로요.”

“또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이라는 것도 알아주십시오. 그저 허무맹랑한 망상일 수도 있다는 것도요.”

펠로스가 추측이라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아주 높은 확률로 진실이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말해줘요.”

“킬리언을 데려간 건, 아마…… 신전일 겁니다.”

“……네?”

나는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신전? 신전이라고?

“신전에서 킬리언 디에고를 이용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게……. 도대체 어디에요? 어디에 이용한다는 소리죠? 왜요? 왜 하필 킬리언을……. 왜요?”

“레이디, 진정하세요.”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은 나를 펠로스가 겨우 저지시켰다.

나는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황궁 감옥에 갇혀 있던 킬리언을 신전에서 빼갔다……. 그를 이용하기 위해……. 도대체 무슨 용도로?

“이해가 되질 않아요. 킬리언은… 중범죄자예요. 아까 당신도 그랬잖아요. 그대로 뒀다면 킬리언은 최소 종신형, 아마도… 사형이었을 거라고.”

“그랬었죠.”

“그런 자를 도대체 어디에 이용한다는 거죠? 이제 킬리언은 근위대장의 권력도, 백작가의 재산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그 대신 새로 얻은 게 있지 않습니까?”

“……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위치…….”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킬리언이…… 백작을 죽여서?

“사람을 죽인 경험……. 뭐 그런 것들이 있죠.”

펠로스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그 말은… 그들이 킬리언을 이용한다는 게 사람을 죽인다는….”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사실 신전에선 돈만 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할 수 있는 사람을 아주 많이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요? 왜 하필 킬리언이죠?”

“그는 보통의 용병보다 믿음직하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모자란 게 없지 않습니까. 황태녀 전하께서는 보기보다 객관적이십니다.”

여기서 갑자기 황태녀 얘기가 왜 나오는 거지?

“킬리언이 근위대장이 된 건, 백작가의 후광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검을 잘 다룬다는…….”

“그것뿐이겠습니까? 고작 대공 저의 병사들을 책임질 뿐인 카렌 녀석도 생각보다 똑똑하답니다. 하물며 근위대 전체를 통솔하는 근위대장은 어떻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 작자는 대단한 검술뿐 아니라 비상한 두뇌를 가졌을 겁니다.”

킬리언이 똑똑하다고? 의아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자 펠로스가 덧붙였다.

“제가 말하는 건 전략과 술수에 능하다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그거거든요.”

“그래서… 킬리언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어요. 신전에서 탐을 낼 만하다는 것도요. 하지만, 하지만 킬리언이 아무나 죽일 리 없어요. 당신 말대로 똑똑하다면 더더욱요. 백작을 죽인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죽일 리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머릿속에 킬리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붉은 피로 온 몸을 적신, 그 기괴한 모습이.

정말로 킬리언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나는 결국 대답을 피했다.

“……그가, 그가 왜 신전이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거야 서로 얻을 게 있기 때문이지 아니겠습니까.”

“킬리언이 얻을 거요?”

“그래요. 킬리언이 얻을 것. 얻고 싶은 것.”

펠로스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바로 거기에 이 모든 문제의 정답이 있습니다. 자, 한 번 생각해보세요. 레이디께선 그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킬리언이 얻고 싶은 것…….

나는 킬리언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이제…… 이제 나와 함께 갈 수 있지, 에블린?’

‘에블린, 에블린! 나에게 오거라, 응?’

……나?

순간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눈치챈 펠로스가 말했다.

“그는 디에고 백작을 죽인 후, 레이디께 일부러 부채감을 심어줬습니다. 당신의 부탁 때문에 백작을 죽였다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죠.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내가, 죄책감을 가지라고……?”

“그리고, 레이디를 다시 손에 넣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그리고 지금 레이디를 지키고 있는 가장 커다란 게 뭐죠?”

“……대공비라는 지위 말인가요?”

“그렇죠. 그건 달리 말하자면…….”

“……데반?”

“신전과 킬리언의 뜻이 맞았다면 어떨까요? 그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요?”

눈앞이 아찔했다.

신전은 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데반이 그 무엇보다 방해가 되리라.

킬리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데반을 증오했다. 나와 결혼한 데반을, 내가 선택한 데반을.

“그렇다면 설마…….”

“그렇습니다. 그들은 데반을 처리하고 싶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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