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꼬박 하루를 앓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를 반긴 건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데반을 비롯하여 저택의 사용인 모두가 킬리언에 대해서 함구했다. 디에고 백작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기에 디에고 백작가는 화목한 가정으로 보였다.
백작은 포장하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지하실에 감금했던 것을 보호로, 킬리언을 통제했던 것을 단순한 훈육으로 꾸며냈다.
물론 몇몇 중앙 귀족들은 디에고 백작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그가 오로지 돈을 위해 나를 입양했다는 것도.
그러나 그가 나를 지하실에 가둔 채 학대와 체벌을 일삼았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나를 동정할 수밖에.
나는 한순간에 사랑하는 아비를, 사랑하는 오라비의 손으로 잃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그 편이 편하긴 했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사용인들조차 나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특히나 그 참상을 눈으로 직접 본 시녀는 더 했다.
킬리언의 마지막 고함을 듣고서도, 그녀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정신이 나간 자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녀는 나를 아이처럼 돌봤다.
“전하, 조금 더 드셔야지요.”
이런 식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앞까지 미음 그릇을 들고 올 지경이었다.
충격을 받은 것도 맞고, 몸에 힘이 빠진 것도 맞긴 했지만 이 정도로 아픈 건 아닌데.
“……됐어. 그보다 좀 나가고 싶은데.”
“안돼요, 전하. 오늘 하루는 더 침대에 누워 있으세요.”
미음을 치운 시녀가 이불을 끄집어 내 가슴팍에 덮어줬다. 정말로 유모라도 된 것 같은 태도였다.
어색한 눈으로 바라보자, 시녀는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괜찮아요, 전하. 하루쯤 더 누워 있는다고 누구도 전하를 탓하지 않는답니다.”
내 탓이 아니라고?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기, 혹시 어제 나 잘 때 방에 누가 들어왔었어?”
“어젯밤이요?”
“응, 누가…….”
누가 날 돌봐줬던 것 같은데……. 여전히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은 미간을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렀다.
“제가 시시각각 들어오긴 했었지요. 열이 통 내리질 않으셔서…….”
“아……. 그래?”
그럼 그건 꿈이었나? 시녀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낮았으니까.
“어쩌면 대공 전하실 수도 있겠네요.”
“뭐?”
“새벽에 다시 나와서 방에 오려는데, 복도 끝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아시다시피 이 복도에는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의 방 밖에 없잖아요.”
“……설마.”
“걱정돼서 잠깐 들르셨는지도 몰라요.”
금세 설렌 표정이 된 시녀가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사용인들은 나와 데반이 서로를 사랑해 결혼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데반이라고?
‘네 탓이 아니야…….’
‘……잘자, 에블린.’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그럴 리가. 데반이 그토록 상냥한 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부드러운 손길은 또 뭐고.
아무래도 내 착각인 모양이었다. 하긴, 그렇게 수많은 꿈을 꿨는데 그 중 하나쯤은 다정한 꿈이었을 수도.
“그럼 전하, 푹 쉬세요.”
“……그래.”
시녀가 내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어주곤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방에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루 동안 앓은 탓인지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와 있었다.
킬리언이 디에고 백작을 죽였다. 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러니 앞으로의 일이 중요했다.
일단은 킬리언을 만나서 다시 이야기를 해보고…….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는 거라면 책임을 지면 될 일이었다.
지금 킬리언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근위대병들이 붙잡았으니 황궁 감옥에 있을까?
시녀는 하루 더 쉬라고 했지만 처음부터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이불을 걷고 막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을 뗐을 때였다.
똑똑—
응? 노크소리에 문가를 바라봤지만 별다른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똑똑한 번 더 노크소리가 들렸다. 노크 소리도 평소완 달랐다. 둔탁한 문이 아니라 꼭, 조금 더 얇은 걸 두드리는 것 같은…….
설마. 홱, 고개를 돌렸다.
“레이디!”
펠로스였다. 펠로스가 창가에 간신히 매달린 채 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기는 2층인데!
“얼른 열어주십시오! 팔이 떨어지겠습니다. 팔이 떨어지면 저도 떨어질 텐데요!”
창문을 사이에 둔 펠로스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렸다.
서둘러 뛰어가 창문을 열었다. 펠로스가 낑낑대며 몸을 밀어 넣다가, 결국 방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펠로스!”
나는 황당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펠로스를 바라봤다. 저번에는 황궁 도서관에서 불쑥 나타나더니 이번엔 창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저번엔 기사인 척 갑옷을 입고 있었던 사내는, 오늘은 웬 거적때기같은…….
“도대체 무슨 옷을 입고 있는 거죠?”
“레이디께서는 제 아름다운 외모보다 이 초라한 옷가지가 먼저 눈에 들어오시나 봅니다.”
“초라한 걸 알긴 아는군요. 그러니까 왜 그런 옷을 입고 있는 거냐고요.”
“그건 저보다 훨씬 초라한 옷을 입은 대다수의 제국민들에게 실례되는 발언이 아닙니까?”
실례는 무슨. 입가에 느물거리는 웃음을 매단 채 그런 소리를 해봤자 하나도 설득력이 없었다.
“그 말이 아니잖아요.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느냔 말이에요!”
“레이디는 제가 틈만 나면 무슨 일을 꾸밀 것 같으십니까?”
“당연하죠. 또 어딘가에 잠입하기 위해 그런 옷을 입은 거잖아요.”
“꽤나 통찰력이 뛰어나시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펠로스가 옷을 팡팡 털었다. 먼지가 날려 미간을 찌푸리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설마 제 방에 잠입하려고 그런 옷을 입으신 건 아니겠죠?”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나저나 레이디, 뭐 먹을 것 없습니까? 배가 고픈데.”
뻔뻔하게 방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에 앉은 펠로스가 물었다.
“미안하지만 없네요. 배는 나도 고파요.”
“레이디께서 배가 왜 고프십니까?”
“그건 뭐…….”
내가 크게 앓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시녀가 밥 대신 미음만 먹였으니까.
침대 협탁에 놓인 작은 접시를 본 펠로스가 미소 지었다.
“아하, 아픈 척을 하셨군요.”
“……척이 아니라 진짜 아팠어요.”
“데반 놈의 말이 사실이었네요.”
“네?”
“아닙니다. 그보다 전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펠로스는 꼭 제 방처럼 테이블 위를 뒤졌다. 그러더니 결국 상자 안에 든 쿠키를 찾아냈다.
“전할 말이요?”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손에 들린 쿠키를 빼앗았다.
“미안하지만 난 바빠요. 전할 말이 있는 거라면 빨리 하고 가세요.”
“바쁘다니요? 설마하니 황궁 감옥이라도 가실 예정이셨던 건 아니겠죠?”
“뭐라고요? 당신 그걸 어떻게…….”
쿠키를 내려놓으며 펠로스를 노려봤다. 펠로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가 내려놓은 쿠키마저 입안에 욱여넣었다.
“가봤자 디에고는 없을 겁니다. 아, 제가 말하는 건 아들 쪽 디에고입니다. 이름이 킬리언이랬던가.”
입안 가득 쿠키를 물고서도, 펠로스는 제법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킬리언이 없다니? 그보다 내가 감옥에 가려고 한다는 건 또 어떻게 안 걸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펠로스를 흘겨봤다.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킬리언 디에고가 디에고 백작을 죽였다. 죽이자마자 레이디의 결혼식에 나타났다. 거기서 난동을 피웠고, 근위대에게 끌려갔다.”
거기까지는 제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요?”
“킬리언은 디에고 백작을 죽였다는 걸 당신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디에고 백작은 킬리언과 당신에게 몹쓸 짓을 했다. 레이디, 몹쓸 짓이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저를 부디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욕설을 내뱉을 수 없는 신분인지라.”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대체 이 사내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내 의문을 눈치챈 듯 펠로스가 덧붙였다.
“제가 키베온가의 사람이라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리고 세간에서 저를 천재라고 하는 것도요.”
그러니까 펠로스는 스스로가 중앙 고위 귀족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에, 그 정보를 빠르게 파악할 두뇌까지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 한 가지 더 있군요. 썩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요. 제가 어제 그 자리에 있었던 레이디의 남편과 친한 친구라는 사실 말입니다.”
“……데반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나요?”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답니다.”
난 슬슬 펠로스의 선문답 같은 대답에 지쳐가고 있었다. 머리가 두통을 호소했다.
“정말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누워 계셔도 괜찮습니다.”
“……됐어요. 당신만 나가면 안색이 좋아질 것 같네요.”
“저는 우리가 꽤나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적어도 지금은 아닌 것 같군요. 도대체 여긴 왜 온 거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레이디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그게 뭐냐구요!”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펠로스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제의 일 탓인지 평소와 비슷한 펠로스의 말장난에도 예민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미안해요, 머리가 아파서.”
“괜찮습니다, 익숙한 일이라서요.”
“……펠로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펠로스의 옆으로 향했다. 그리곤 그를 내려다보며, 할 수 있는 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그만 말해줘요. 전할 말이 대체 뭐죠? 황궁 감옥에 킬리언이 없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요?”
“으음……. 그 두 가지 질문에는 하나의 대답이면 충분하겠군요.”
“빙빙 돌리지 말고 제발 빨리 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입 안에 남아 있던 쿠키를 꿀떡 삼키며, 펠로스가 나를 올려다봤다.
“디에고가 황궁 감옥에서 사라졌습니다. 아, 물론 아들 쪽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