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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64화 (64/123)

64화

나는 킬리언의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응시하며 앞으로 나섰다.

“에블린.”

데반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내 말에 동의라도 하듯, 킬리언이 들고 있던 검을 내동댕이쳤다.

새파란 날을 빛내던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킬리언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에블린…….”

데반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는 여전히 치켜든 검을 치우지 않고 있었다.

“에블린…. 내가, 내가 돌아왔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검을 내동댕이치는 걸 보면 아무래도 킬리언은 누군가를 해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데반 혼자 킬리언을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도 들지 않았고.

그러니 시녀가 병사들을 끌고 올 때까지, 킬리언을 진정시키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나는 짐짓 당당한 척 턱을 약간 치켜들며 말했다.

“……도대체 어딜 가셨다가 이제야 오신 거죠? 이 소란은 결혼 선물인가요?”

내 말에 킬리언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선물……. 아니, 에블린. 내 선물은 따로 있단다.”

“……뭐?”

선물이라니. 킬리언의 말에 기대가 되긴커녕 더욱 불안해졌다.

킬리언은 나와 데반의 결혼을 막고 싶어 했다. 무릎을 꿇으며 빌기까지 했었다. 그런 자가 제대로 된 결혼 선물을 가져왔을 리 없었다.

당황한 내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킬리언이 제 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데반은 한쪽 팔을 들어 나를 뒤로 보냈다. 킬리언이 품 안에서 무얼 꺼낼지, 그 역시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일까.

킬리언은 여길 왜 온 거지? 그저 결혼을 훼방 놓기 위해서인가? 방금까지 전쟁터에서 굴렀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저 꼴은 또 뭐고.

신전은 권위를 가장 중요시했다. 결혼식 하객의 대부분은 콧대 높은 중앙 귀족이었고.

한 마디로, 이런 짓을 했다가 손해 보는 쪽은 킬리언이라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이 같은 일을 벌였다는 건…… 손해 보지 않을 자신이 있거나, 혹은 손해 보더라도 상관이 없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겠지.

한참동안 품 안을 뒤적거리던 킬리언이 꺼낸 것은 작고 반짝거리는 무언가였다.

그는 제 바지춤에 그것을 벅벅 닦아냈다.

피가 대충 닦이자, 그제야 그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품속에 소중히 담아온 건 금색으로 빛나는 반지였다.

……반지? 정말로 결혼 선물이라는 건가?

의아함에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에블린…….”

킬리언이 반지를 든 손을 내게 내밀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어, 그건 꼭 선물을 준다기보다는 바치는 것처럼 보였다.

무심코 받으려고 하자, 데반이 내 손을 중간에서 저지했다.

“무슨 수작을 해뒀을지 알고.”

데반을 노려보던 킬리언이 이번엔 반지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곤 툭 굴려 내 쪽으로 보냈다.

반지는 데구르르 굴러서 내 발치에 멈춰 섰다.

“어서, 어서 내 선물을 확인해봐.”

킬리언이 상기된 말투로 말했다. 그는 꼭 칭찬을 바라는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블린, 조심해.”

데반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나는 허리를 굽혀 반지를 찬찬히 살펴봤다. 여전히 피가 곳곳에 묻어 있었다.

“특별히 뭔가 느껴지진 않아요. 마법 같은 게 걸려 있다면 제가 알아챘을, 흐읍….”

손을 뻗어 반지를 집었던 나는 숨을 날카롭게 들이마셨다.

“에블린?”

“에블린!”

의아한 데반의 목소리와 뿌듯한 킬리언의 목소리가 겹쳤다.

“선물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드냐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바닥에서 차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에블린? 뭔데 그러지? 괜찮은 건가?”

손바닥 위에 놓인 반지,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 반지에 새겨져 있는 디에고 가문의 인장에서.

태양의 여신이 피를 뒤집어 쓴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디에고 가문의 몰락을 예고하기라도 하듯.

킬리언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했잖아. 에블린, 내가…. 내가….”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내 머릿속을 파고든 예감에 난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블린, 정신 차려!”

영문을 모르는 데반이 내 팔을 부여잡았다. 그 틈을 타 거리를 좁힌 킬리언이 물었다.

“이제…… 이제 나와 함께 갈 수 있지, 에블린?”

“……뭐?”

그는 어느새 빛을 잃은 눈동자를 하고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괴한 미소였다.

“내가…… 도와줬잖아.”

도와주다니…. 도대체 뭘…….

그 순간, 아주 오래전, 킬리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뭐 도울 일은 없나.’

‘백작을 죽여.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야.’

대공 저에서 다시 만났을 때, 실성한 사람처럼 킬리언이 중얼거렸던 말도.

‘내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래, 도와줄 수 있어!’

손에서 반지가 툭 떨어졌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에블린! 괜찮은 건가?”

어느새 검을 내려둔 데반이 쓰러지려고 하는 내 몸을 껴안았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에블린!”

넋을 잃은 내 시야에 바닥을 구르고 있는 반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킬리언이 있었다.

제 아비의 피를 뒤집어쓴 킬리언이.

“그런…….”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그 백작이 죽었다고? 정말로? 킬리언이 백작을 죽였다고? 정말로?

나는 데반의 옷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아름다운 예복이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에블린……?”

그런 나를 킬리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왜 그러는 거지, 에블린? 네가……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 에블린.”

그가 당황스럽다는 듯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은빛 머리카락에 검붉은 피가 엉겨있었다.

피를 볼 때마다 자꾸만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정말로 죽었을 리가…….

“괜찮나, 에블린?”

데반이 주저앉은 나를 껴안았다. 뜨거운 품에 낮은 고동이 느껴졌다.

“데반…….”

“그래, 괜찮은 건가?”

나는 데반의 품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거세게 뛰던 심장이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건지, 킬리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에블린!”

데반은 나를 껴안기 위해 검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킬리언이 그 틈을 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블린, 에블린! 나에게 오거라, 응?”

마침내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벌컥-예배당의 문이 열리더니, 수십의 근위대병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저기, 저기예요!”

떨리는 목소리가 소리쳤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근위대가 우리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곤 킬리언의 주위를 빈틈없이 포위했다.

“대공비 전하! 괜찮으세요?”

근위대병을 끌고 온 것은 내 시녀였다. 시녀는 내 옆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았다.

내가 주저앉아 있는 게, 킬리언이 무력을 행사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데반은 시녀 쪽으로 나를 부드럽게 밀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일어났다.

“저자를 구속하라.”

그의 낮은 목소리에, 근위대병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문제의 사내가 불과 얼마 전까지 그들의 상관, 근위대장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허둥댔다.

그러나 피를 뒤집어쓴 갑옷을 입은 꼴이 수상했고, 데반의 명령도 있었기에 그들은 킬리언의 양 팔을 세게 붙잡았다.

둘로는 킬리언의 힘을 이기지 못해 네다섯 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이거 놔!”

킬리언이 팔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는 꼭, 피칠갑을 한 채 결혼식 중간에 난입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에블린……!”

킬리언이 도와달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억울함을 호소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그를 간신히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킬리언의 고함소리가 더욱 커졌다.

“에블린……. 내가 너를 도와줬어.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줬단 말이다, 에블린!”

킬리언이 소리쳤다. 그는 제 주위의 병사들은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꼭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보였다.

“당장 데려가.”

데반이 낮게 명령했다. 근위대병들이 킬리언의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에블린! 에블린!”

킬리언은 버둥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의 발에 반지가 채여 아무렇게나 굴러갔다.

예배당 바닥에 깔려 있는 새하얀 천 위로 붉은 핏자국이 죽 그어졌다.

“에블린, 네가 나한테 부탁한 게 아니냐! 에블린!”

점점 멀어져 가는 킬리언의 목소리를 들으며, 결국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디에고 백작이 죽었다.

다음 날 나를 찾아온 데반이 소식을 전해줬다. 킬리언이 디에고 백작을 살해했다고.

숨길 생각도 없었던 듯, 목격자와 증거가 넘쳐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사실보다도 데반의 의중을 살피기에 급급했다.

그는 킬리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들었다.

내가 킬리언에게 백작의 죽음을 사주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주라. 어쩌면 그게 사실인지도 모르지.

디에고 백작의 죽음, 그것도 그의 아들이 저지른 살인은 제국 전체에 커다란 화젯거리가 됐다.

평소 킬리언의 행실을 알고 있는 자들이 많았기에 더욱 그랬다.

도대체 그 올곧던 기사가 왜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는가.

가십은 우후죽순 생겨났다. 개중에는 누군가 킬리언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백작을 죽인 범인은 분명 따로 있을 거라고.

나는 하루를 꼬박 침대에서 앓았다.

열이 올라 꿈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하며, 잠에서 깼다가 그대로 기절하듯 잠들다를 반복했다.

꿈속에서 나는 신전에 사는 어린아이였다가, 지하실에 묶여 있다가, 이유 없이 죽은 강아지가 되기도 했다.

킬리언이 되어 백작을 죽이기도, 백작이 되어 킬리언에게 죽임 당하기도, 또 나 자신이 되어 킬리언에게 백작을 죽이라 명령하기도 했다.

‘에블린, 네가 나한테 부탁한 게 아니냐! 에블린!’

그때마다 킬리언의 마지막 말은 낙인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디에고 백작은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다. 돈과 권력을 위해 자신의 아이를 비롯해 나를 학대했다.

그의 이유 없는 괴롭힘 때문에 목숨을 끊은 영주민들도 수십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가 죽어도 된다는 뜻일까?

디에고 백작은 나 때문에 죽은 건가?

내가 그를 죽인 건가?

킬리언이 그렇게 된 것도 모두 내 탓인 걸까?

그 순간이었다.

“네 탓이 아니야.”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구겨진 미간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정말? 정말로 내 탓이 아니야?

“……네 탓이 아니야.”

목소리는 꼭 내 말을 들은 듯 화답했다.

내 탓이 아니라고……. 정말?

“그러니 푹 자.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그래.”

그 목소리는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눈앞에서 일렁거리던 킬리언의 얼굴, 디에고 백작과 강아지의 새까만 눈망울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잘 자, 에블린.”

낮은 목소리와 함께 나는 꿈이 없는 긴 잠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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