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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63화 (63/123)

63화

예배당 안으로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결혼식의 시작이었다.

안쪽 방에서 나타난 신관이 주례석 앞에 섰다.

자리에 앉아 있던 하객들이 모두 그를 보고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결혼을 주관하는 신관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 그는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을 제외하곤 다른 행사에는 좀처럼 얼굴을 비추는 일이 없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제국민은 그가 보통의 신관과는 다른, 그러니까 대신관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그는 그저 대신관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신전에서 치러지는 결혼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꼭두각시.

심드렁한 얼굴로 신관을 바라봤다. 그는 들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성서를 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곤 두 손을 양 옆으로 들어 올리자, 하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대공비 전하! 이제 나가셔야 해요!”

나는 시녀의 재촉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 맞은편에서 데반도 서서히 걸어왔다. 여전히 입가엔 오만한 미소를 띤 채였다.

‘아름답군.’

방금 전의 입모양이 떠올라 나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저…… 나를 놀리기 위해 한 말일 뿐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데반을 바라보기 민망했다. 난 애써 데반의 시선을 피했다.

마침내 우리는 신관의 앞에 나란히 섰다.

우리를 한 번씩 바라본 신관은 성서를 몇 페이지 넘기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연설의 시작인 듯 했다.

나는 지루한 연설을 듣는 대신 내 옆의 데반을 힐끔거리는 것에 더 집중했다.

날카로운 콧대나 기다란 속눈썹, 그 안에 숨겨진 아름다운 적색 눈동자 같은 것을. 한참을 그랬을까.

툭-내 손을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데반? 의아한 표정을 하자, 여전히 신관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데반이 다시금 입모양으로 말했다.

‘집중해.’

비난보단 짓궂음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내가 계속 넋을 놓고 구경하는 걸 모두 눈치챈 게 분명한 표정.

얼굴에 다시 열이 오를 것 같아 서둘러 시선을 뗐다.

“자, 그럼…….”

신관이 제 앞의 성서를 닫았다.

마침 연설이 모두 끝나고, 신랑 신부가 반지를 교환해야 하는 순서였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반지는 어떻게 된 거지?

결혼식을 위해 내가 준비한 일은 독에 내성이 생기도록 차를 마시는 것과 데반과 함께 예복을 고르는 것뿐이었다.

예복도 내가 사정사정을 해서 겨우 함께 고른 건데, 데반이 반지를 준비했을 리는 없었다.

결혼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 역시 반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식 준비를 도와준 집사도 반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신전과의 소통이나 하객 초대 같은 것은 데반이 알아서 한다고 했었는데…… 그럼 반지는?

설마 데반도 잘 몰라서 나한테 준비하라고 말을 못한 건가?

그럴듯한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하지? 반지가 없어도 식을 무사히 진행할 수 있나?

겉으로는 차마 티도 못 내고, 속으로만 허둥대고 있을 때였다.

데반이 능숙하게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데반?”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난 얼떨결에 데반과 마주보게 됐다.

“반지를 교환해야지.”

……준비를 했다고? 설마 데반이 직접?

데반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품 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나는 데반과 예복을 골랐던 일을 떠올렸다. 그 끔찍했던 미적 감각을.

데반이 직접 골랐다면 그건… 정말…. 머릿속에 수많은 기괴한 디자인의 반지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마도.

눈을 질끈 감은 채 손을 내밀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반지가 끼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나치게 무겁거나 이상한 감촉은 아닌 걸 보니 내 생각보단 괜찮은 모양이었다.

“자, 나도 껴줘야지.”

데반의 말에 겨우 눈을 가물가물 떴다.

“……응?”

데반이 내게 내민 반지는 놀랍게도 평범한 디자인이었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커다란 해골이 달려있다거나, 손가락 마디만큼 두꺼워 무겁거나, 보석이 괴상한 모양으로 커팅 돼 있지 않다는 소리다.

아니, 웬걸…. 반지는 평범한 정도가 아니라 아름다웠다.

물방울무늬로 커팅 된 오팔 주위를 작은 다이아가 감싸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티아라의 형태를 띠고 있는 백금 반지였다.

혹시 반지를 고르는 걸 노집사에게 시켰나?

“에블린?”

넋을 놓고 반지를 구경하다, 데반의 부름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네.”

데반은 나에게 반지 케이스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그 안에는 데반 몫의 반지가 들어있었다.

데반의 것은 내 것과 다르게 심플한 백금에, 오팔이 얇은 선처럼 세팅 되어 있었다.

내 것과 비슷한 듯하면서 각자의 개성이 묻어난 반지였다.

그것까지 확인하자 확신이 들었다. 반지를 데반이 골랐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당연하다는 듯 내밀어진 데반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천천히 반지를 끼웠다. 새하얗고 기다란 데반의 손가락과 무척 잘 어울렸다.

데반이 뿌듯한 표정으로 저와 내 손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럼 반지 교환을 완료 했으니, 이제 서약을 진행하겠습니다.”

신관이 한쪽 손을 들었다. 하객들의 앞에서 결혼 서약을 읊을 차례였다.

신호에 맞춰 몸을 돌리자, 예배당의 쭉 뻗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디에고 백작도 왔으려나?

나는 서약을 읊는 척하며 하객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애초에 우리의 결혼은 디에고 백작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유도 있었으니, 데반이 그를 초대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러나 예배당을 가득 채운 하객 사이에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디에고 백작이 오지 않았다고? 어째서?

백작은 실리를 지독하게 따지는 성격이었다.

내가 제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뻔뻔하게 되돌아왔다는 사실에 화를 내기보단, 대공의 사돈이라는 지위를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오지 않았을 리 없는데…….

미간을 미약하게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벌컥-예배당의 문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커다란 인영이 문가에 서있었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듯 보였다. 한 손에는 기다란 검을 들고 있었다.

누구지?

쏟아져 들어오는 빛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이 거행 중인 신성한 예배당에 이 무슨…!”

신관이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러나 상대는 들리지 않는 듯 천천히 주례석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왔다.

……설마.

그림자가 다가올수록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익숙한 덩치에 익숙한 시선이었다. 달라붙는 듯 집요한 시선.

몸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데반이 슬쩍 내 손을 잡아 제 뒤로 숨겼다.

“저 자가 여긴 왜….”

데반의 생각도 나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았다.

그래, 도대체…… 도대체 킬리언이 여긴 왜?

예배당 문을 벌컥 열고 등장한 불청객은 킬리언 디에고였다.

내가 황궁에 온 지도 벌써 꽤나 시간이 흘렀다. 킬리언은 그동안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어디론가 잠적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왜 나타난 거지?

킬리언이 점점 다가옴에 따라, 앉아 있던 하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 이곳저곳에 묻어 있는 선혈 때문이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들고 있는 검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피……?”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휩쓸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킬리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이제 보니 그는 한쪽 발을 조금 끌고 있었다.

다친 건가? 자신의 피인 건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신관이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데반이 눈짓하자, 오른쪽 커튼 뒤에서 검이 날아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미리 대비를 해둔 모양이었다.

“데반, 이건…….”

“신관과 함께 피해.”

“네? 하지만…….”

“하지만 뭐. 네 오라비라고?”

“……네.”

킬리언이 이곳에 온 이유는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네 오라비든 아니든 지금은 도망치는 게 낫겠군. 도무지 대화를 할 상태로 보이진 않아서 말이야.”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데반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집무실에서 본 적 있던, 손잡이가 아름다운 검이었다.

온통 새까만 검신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가오던 킬리언이 눈을 크게 홉떴다. 그가 질질 끌고 오던 검 손잡이를 세게 부여잡는 게 보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어느새 하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고 있었다.

황급히 도망치느라 의자가 넘어지고, 사람들이 서로 부딪혔다.

비명소리가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신성한 결혼식은 순식간에 참상으로 변했다.

“전하! 대공비 전하!”

언제 나타난 건지, 시녀가 내 몸을 끌었다.

“어서 가요, 전하!”

그녀는 몸을 바들거리면서도 나를 세게 붙잡고 있었다.

나는 데반의 뒤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도망치기엔, 킬리언의 눈동자가 내게 못 박혀 있었다.

내가 도망친다고 과연 일이 해결될까? 저 갑옷, 피, 흉흉한 눈동자까지…….

혹시 나를 죽이러 온 건가, 킬리언은?

주위를 둘러봐도 우리를 도와줄 병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신전은 대외적으로 검과 피, 권력 따위에서 자유로운 곳이었으니까. 그놈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부러 호위 기사도 없는 척 행동했다.

“……에블린.”

순간 들리는 킬리언의 목소리에 움찔 몸이 떨렸다. 어느새 킬리언은 우리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데반이 위협적으로 목을 울렸다.

그 협박 때문인지, 혹은 치켜든 데반의 검을 의식한 건지 킬리언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점점이 떨어지는 핏방울이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끈질기게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에블린, 어서.”

미간을 찌푸린 데반이 나에게 턱짓했다. 얼른 도망치라는 신호였다.

나는 도망치는 대신 내 팔을 꼭 붙잡고 있는 시녀에게 속삭였다.

“병사들을 끌고 와.”

“네, 네?”

“어서!”

시녀가 잔뜩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떠밀며 재촉했다.

그녀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나는 데반을 지나쳐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킬리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나는 그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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