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다음 날, 우리는 사용인들과 함께 다시 신전으로 갔다.
어제와 똑같이 하얀 천을 뒤집어쓴 신관이 우리를 맞았다. 얼굴을 볼 수 없어 같은 이인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대공 전하, 어젯밤은…….”
신관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데반이 선수 쳤다.
“어젯밤에 웬 이름 모를 사내들이 잠들어 있는 우리를 덮쳤네.”
“……예?”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신전을 도망쳐 나왔지. 신전의 보안에 대해선 따로 말을 얹지 않겠네. 세상에는 이런저런 변수가 많은 법이니까.”
신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데반이 그 좋아하는 명분을 사용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신전이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신전 역시 알고 있다.
이러한 내막이 세상에 밝혀지면 불리한 건 신전이었다. 데반은 지금, 이 건에 대해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우리의 결혼식을 입 다물고 진행하라며 압박하고 있었다.
신전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가 실제로 신전에서 무슨 일을 했건, 먼저 우리를 공격한 신전이었으니까.
신관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하필 그런 일이 일어났다니 유감입니다. 신전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결혼식은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어쨌든… 정화 의식을 위한 세이로의 공간은 거치셨으니까요.”
억지로 말하는 게 분명한 억눌린 목소리였다.
“고맙네.”
데반은 가볍게 응수한 후, 안내하라는 듯 턱짓했다. 신관이 앞장섰다.
나는 남몰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신전을 그렇게 빠져나오면서, 내심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결혼식은 신전의 예배당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보통은 신관들의 예배를 위해서만 사용되는 공간이라, 일반인들에게 열리는 건 결혼식 날이 유일했다.
나도 물론 처음 가보는 공간이었다.
“안쪽에서 대기해주시면 됩니다.”
신관이 예배당 뒤쪽 문을 가리켰다. 왼쪽과 오른쪽 문으로 나뉘어 있었다.
“신부님은 왼쪽, 신랑님은 오른쪽으로 가십시오.”
“그럼, 이따 보지.”
데반이 먼저 오른쪽 문으로 사라졌다. 나는 몇 명의 시녀들과 함께 왼쪽 방으로 향했다.
방은 역시나 새하얬다. 치장을 위해 준비된 거울과 탁자를 제외하곤, 별다른 가구도 없었다.
결혼식 대기실이라고 보기엔 황량했다.
“대공비 전하, 그럼 지금부터 치장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황궁에서부터 계속 전담으로 봐줬던 시녀가 나를 화장대에 앉혔다.
거울에 피로한 얼굴이 비쳤다. 내내 잠을 설친 탓이었다.
눈을 감으면 코델리아의 모습이 떠올랐고, 눈을 뜨면 스스로를 신이라 칭했던 자의 말이 맴돌았다.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시녀가 머리칼을 만지기 시작했다.
“하아…….”
그 부드러운 감촉에 절로 한숨이 터졌다. 그런 일을 코앞에서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작 머리를 단장하기 위해 앉아 있다니.
거울 너머로 시녀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게 보였다. 사실 그녀뿐 아니라 사용인들 모두가 의아할 테다.
뜬금없이 새벽에 돌아와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시 신전으로 데려왔으니까.
거기에 누가 봐도 안 좋아진 얼굴로, 이젠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으니.
데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바로 이 건물 지하에 여전히 그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당장 구해주어야 하는데, 마음만 급할 뿐 아무런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데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제의 그는 꽤나 자신만만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수백의 사람을 신전 지하에서 몰래 빼올 수 있는 방법. 그런 게 정말 있긴 한 걸까?
“하아…….”
한 번 더 한숨 내쉬었을 때였다.
“아얏!”
시녀가 돌연 작은 비명을 질렀다.
“뭐야?”
깜짝 놀라 뒤를 돌자, 시녀가 제 손가락을 움켜쥐고 있는 게 보였다.
“다쳤어?”
“죄송합니다, 대공비 전하. 핀에 조금 찔린 모양이에요. 얼른 다른 것을 가져올게요.”
“어서 봐봐.”
“네?”
시녀가 머뭇거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가져왔다.
조금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꽤나 많은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인상을 한 번 찌푸리곤, 바로 정신을 집중했다.
“저, 전하?”
“가만히 있어.”
얼마 안 가 내 손에서 새하얀 빛이 나오고,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던 피가 멎었다.
“전하, 이건 설마…….”
시녀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손수건을 하나 들고 이미 흐른 피까지 깨끗하게 닦아냈다. 어느새 손은 무슨 상처가 있었냐는 듯 멀쩡해졌다.
“전하! 어머…….”
“이제 됐어. 핀도 대충 아까 그거 닦아서 다시 꽂아줘.”
“이게 신력…….”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시녀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신력은 웬만한 사람은 보기도 힘든 것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말, 정말 감사해요. 전하.”
“……별 거 아냐.”
시녀가 아까보다 눈에 띄게 친근해진 태도로 내 머리를 다시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뿌듯할 겨를도 없었다.
뭔가…. 방금 분명히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 신력을 썼을 때 분명 몸 안의 신력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내 안의 신력이 코델리아와 연결되었던 바로 그 감각이.
새하얀 빛줄기가 내 신력을 그녀에게 자꾸만 보내던 모습이.
‘그럼 그 힘이 제 신력을 모두 먹으면…….’
‘그만큼의 공간을 쓸 수 없게 되는 거죠.’
처음 만난 날, 펠로스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 내 안에 들어온 이후로, 흑마법은 계속해서 내 안을 좀먹고 있었다.
그런데다 어제 코델리아에게 신력을 빼앗기기까지 했으니…….
심장이 불안하게 날뛰었다.
이렇게 신력이 점점 줄어들다, 마침내 모두 사라진다면….
‘죽을 겁니다, 아마.’
펠로스가 했던 말이 저주처럼 꽂혔다.
*
나는 머리카락에 수많은 진주와 꽃, 반짝거리는 보석을 달았다. 풍성한 원단을 겹겹이 두른 화려한 드레스까지 갖춰 입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그렇다고 설레거나,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아니었다.
걸리적거려…….
명색이 결혼식 주인공인데도, 나는 여전히 적진 한복판에 있는 기분이었다. 이런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몇날 며칠을 낭비했다는 사실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결혼을 하는 이유는 오직 신전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젯밤 그런 광경을 보고 나자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긴 한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마주친 존재가 정말 신이라면.
신이 실존하고, 신전이 정말로 신을 모시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들이 자행한 모든 일 역시 신의 뜻이란 소리잖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녀가 옆에서 나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응?”
“전하, 대공 전하가 오셨어요!”
그녀의 속삭임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신전에서의 결혼식은 행진 없이 치러졌다.
각자의 방에서 나온 신랑 신부는 주례 역할을 맡은 신관이 올 때까지 복도 양 끝에서 대기한다. 신부는 왼쪽에, 신랑은 오른쪽에.
얇은 커튼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다, 신관이 중앙 주례석에 오면 가운데로 걸어와 만난다.
그 후 신관에게 신의 축복을 받고 서약을 하면 끝이었다.
아직 신관이 도착하지 않았기에, 나는 주례석 왼쪽 끝 복도에서 식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방금 데반이, 반대편 오른쪽 커튼 뒤로 나타난 것이다.
“어쩜……!”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시녀가 헙,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만 내지 않았다 뿐이지 내 심정도 비슷했다.
방금 전까지 생각한 신전이니 신 같은 게 순식간에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런 게…… 소용이 있긴 하구나.
나는 처음으로 결혼의 허례허식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몇날 며칠, 데반을 집요하게 설득한 보람이 있었다. 데반이 고른 말도 안 되는 수술이 잔뜩 달린 예복을 어떻게든 저지시키고, 아름다운 예복을 입힌 보람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럴 정도로 새하얀 커튼 뒤에 나타난 데반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몸에 꼭 맞춘 새하얀 예복은 데반의 넓은 어깨와 긴 다리를 더욱 부각시켰다.
오직 하얀 옷만이 허용되는 터라 그의 몸에는 새까만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검게 일렁이는 그의 오른쪽 눈을 제외하곤.
신관도 아닌 주제에 대단히 금욕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반쯤 올라가 드러난 날카로운 얼굴선과 번뜩이는 눈동자는 금욕과 거리가 멀었다. 내가 고집을 부려 그의 예복에 달아놓은 적갈색 루비처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눈이 마주쳤다.
반투명한 커튼 사이로 데반이 나를 바라봤다.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곧 결혼할 신부가 아닌 먹잇감을 눈앞에 둔 표정 같기도 했다.
내 모습을 샅샅이 바라보던 데반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전달하는 말이었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도록.
“대공비 전하! 이제 준비하셔야 돼요!”
“어, 어.”
시녀의 말에 드레스를 추스르면서, 나는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아름답군.’
오만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던 데반의 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