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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58화 (58/123)

58화

뚜벅이는 발소리와 함께 천박한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렸다.

나를 잡기 위해 신전에서 고용된 용병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림잡아 다섯 명은 넘는 것 같았다. 다섯 명이라.

난 내보내던 신력을 멈추고 데반에게서 손을 뗐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자, 그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보단 둔해보였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이 몸으로 다섯을 해치울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는 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도마저 가져간 것 같군.”

품 안을 뒤적거리던 그가 뇌까렸다.

난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우러러봐야 한다는 표현이 딱 맞는, 높다란 창문에서 푸른 달빛이 희미하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

달빛은 방 안에 줄지어 선 아름다운 석고 기둥을 비췄다.

기둥……? 기둥이 이렇게 어정쩡한 위치에 있다고? 난 눈을 찡그렸다.

기둥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의 형상을 한 조각상이었다.

여자와 남자, 노인과 아이……. 수많은 생김새를 가진 조각상이 마치 기둥처럼 우뚝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만하게.

“……신.”

“뭐?”

“……신이 우릴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데반이 날 바라봤다.

그 순간, 덜컹― 바로 도처에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이 방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근처까지 도달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내 말 잘 들어요.”

난 데반에게 빠르게 계획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가 한 바퀴 주욱― 조각상을 훑어봤다.

“과연. 그야말로 신이 절실히 필요하겠군.”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부턴 시간 싸움이었으니까.

용병들이 이곳저곳의 문을 열었다 닫으며 수색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신전이 우리를 어떤 방에 가둔 건지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에게 신전의 자세한 지리를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으리라.

하긴, 내가 신력을 사용하지만 않았더라도 우리가 깨어날 일은 없었을 테다.

그들은 날이 밝기 전까지만 날 찾아내면 됐고, 아직 해가 뜨려면 꽤 말미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깨있는 것은 그들로선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문 바로 앞, 어두운 구석에 서서 우리는 숨을 죽였다.

발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이제는 그들이 이 방에 들어올 차례였다.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없었던 일처럼 넘어갈 순 없겠죠?”

난 새삼스러운 질문을 했다.

내 뒤에 서 있던 데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차라리 잘 됐지. 저들이 먼저 시작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린 그저 맞섰을 뿐이야.”

“그 좋아하시는 명분이 생겼다 이 말이군요.”

그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몸에 힘이 없기 때문인지 그 미소조차 평소보다 나른해보였다.

“……할 수 있겠어요?”

그 순간 덜컹― 문이 열렸다. 흡, 난 황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여긴 뭐가 이렇게 수상한 거요?”

“수색해라.”

“수색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게, 이것 좀 보슈. 여기 조각상만 죽 늘어놨네. 창고라도 되는갑지?”

사내들이 일렬로 늘어놓은 조각상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조금 더 숨을 죽였다.

“이래서 못 배운 것들은. 이게 다 전능하신 신 아니냐.”

가까이 다가와 조각상을 빤히 바라본 수염 난 사내가 타박했다.

“모습이 다 다른뎁쇼?”

“신께선 우리 주위에 그 어떤 모습으로든 강림하실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럼 저건 뭐요?”

“저거 뭐?”

순조로웠다.

한 사내의 시선이 창문 바로 밑, 새하얀 천을 뒤집어 쓴 조각상으로 향했다. 방금까지 우리가 누워있던 천이었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어느 정도로 어두웠냐면―

“……사람인가?”

조각상과 사람을 헷갈릴 정도였다.

다른 조각상들과는 달리 혼자만 천을 뒤집어쓴 수상한 모습이 그들의 의심을 더욱 부추겼다.

“그 계집인가?”

한 사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그들은 한 손을 검대에 놓은 채 천천히 조각상 쪽으로 향했다.

그 조각상은 방 가장 안쪽에 있었기에, 그럴수록 저절로 문과는 멀어졌다.

난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막, 조각상에 도달해 휙― 천을 걷어냈을 때였다.

“지금이요!”

퍽― 첫 번째 조각상 앞에 서 있던 데반이 거칠게 발길질했다.

내 고함에 사내들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그 사이에 데반이 찬 조각상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조각상은 바로 옆 조각상을, 그 조각상은 또 그 옆 조각상을 부수며 빠르게 넘어갔다.

어두운 방 안에서 사내들이 상황을 파악했을 땐 이미, 그들에게 이 방 안에서 가장 커다란 신이 강림하고 있었다.

“으, 으아아!”

쿠웅―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신이 산산조각 났다.

더 두고 볼 것도 없었다. 난 방을 나서서 복도를 내달렸다. 데반도 곧 내 뒤를 따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어쩐지 기뻤다. 신전이 숭배해 마지않는 신을 쳐부쉈기 때문일까.

“길은 알고 있는 건가?”

어느새 날 앞지른 데반이, 내 손을 낚아채 붙잡았다.

“허억― 헉…….”

난 간신히 숨만 몰아쉴 뿐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달리는 것만으로 벅찼다.

쯧, 작게 혀를 찬 데반이 돌연 날 덥석 들어올렸다.

시야가 위아래로 크게 뒤바뀌었다. 어느새 난 그의 한쪽 어깨에 짐짝처럼 올라가 있었다.

“무슨……!”

“효율적으로 가고 싶으니, 조용히 하고 길이나 말하지.”

“앞이, 허억, 안 보이는데 어떻게 말해요!”

“대충 봐.”

그의 팔 틈 사이로 복도가 보이긴 했으나, 뒤집힌 탓에 거꾸로였다.

멀미가 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효율성을 따지자면 데반의 말이 맞아 난 반박하는 대신 불만스럽게 말했다.

“저쪽 계단으로 내려가야 해요.”

데반이 내 말을 듣고 재빨리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난 고개를 번뜩 들어 뒤쪽을 바라봤다. 다행히 용병들은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다.

따라올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고. 신은 꽤나 무거우셨으니까.

“당신도 도면 보지 않았어요?”

“넌 이곳에 살았으니.”

“……십 년도 더 전인데요.”

“아까 내달리는 폼이 확신에 차있던데.”

“그건……. 아, 이 앞에서 오른쪽으로요.”

난 데반이 보여줬던 도면을 되새겨 보았다.

그 도면은 평면도였기에, 숨겨진 공간이 어딘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있었지만, 몇 층인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우린 모든 층을 돌면서 그 장소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그 방에서 날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조각상을 발견했을 때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한 층 더 아래요.”

데반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아직 몸이 완벽히 낫지도 않았는데, 사람 하나를 등에 업었다고는 믿지 못할 속도였다.

“한 층 더 가야 해요.”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려던 데반이 멈칫 발걸음을 멈췄다.

계단이 있어야 할 곳은 막힌 벽이었다.

“계단이―”

“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내려달라는 의미로 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데반이 날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옷매무새를 대충 정리하고 난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가 갇혔던 방은, 창문이 보였으니 일 층이었다. 계단을 두 번 내려왔으니 여긴 지하 이 층이었고.

“신전은 지하 이 층, 지상 이 층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넷이 신과 가장 가까운 숫자라고들 하던데.”

데반이 물었다. 확실히 신전은 그 높은 외양과 달리 지상엔 단 이 층뿐이었다.

그것도 복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그 높은 건물이 모두 쓸데없는 창문으로 가득했다.

모든 건 신을 우러러보기 위함이었다.

“대외적으론 그렇죠.”

난 양 옆을 가늠하다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용병들이 쫓아오는 낌새가 없었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아마 그들은 일을 맡긴 신전을 실망시킬까 봐 –정확히는 더 이상 일이 들어오지 않을까 봐― 우리가 깨어나 도망쳤다는 걸 신전에게는 비밀로 한 채 우리를 쫓아 올 터였다.

그들보단 내가, 나보단 신관들이 신전의 지리에 환했으니, 그들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길 바라야 했다.

“이 안으로 가야 해요.”

얼마나 걸었을까. 난 어렵지 않게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높다란 천장까지 닿아 있는 그것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크기가 내 키만 했다.

“……안으로?”

데반이 황당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조금 허리를 숙여 오르간의 아래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작은 문이 두 개 있었다. 난 그 중 오른쪽 문을 옆으로 밀었다.

“얼른요.”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계단이 있었다. 어둡고 폭이 좁은 나선형 계단이었다.

난 익숙하게 손잡이를 붙잡고 미끄러지듯 계단을 내려갔다.

데반은 여전히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군말 없이 날 따라왔다.

그렇게 빙글 돌아 한 층을 내려오자, 양옆으로 방이 빼곡히 들어찬 복도가 나타났다. 창문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지금까지 신전의 모습과는 달리 쾌쾌한 냄새가 났다.

손에 묻은 먼지를 대충 탈탈 털어냈다.

“왼쪽 문은 오르간 연주자가 들어가는 곳, 오른쪽 문은 지하 삼층으로 통하는 계단이죠.”

“지하 삼층이라니…… 여길 용케도 알았군.”

데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살았던 곳이니까요. 정확히는 부모 대신 신력을 가진 아이들이 살았던 곳이죠.”

“이곳에서 살았다고?”

“네, 그리고 아마 지금도…… 이곳에 아이들이 살고 있을 거예요.”

아이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복도는 고요했다. 난 발소리를 죽인 채,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성인 한 명이 겨우 몸을 눕힐만한 방 안에서 아이들 다섯이 지냈다.

우리는 항상 몸을 겹친 채 잠들어야 했다.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야 했고, 일어나면 신전을 전체 청소해야 했다.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가 든 식사 대신 신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물약을 마셔야 했다.

돈 많은 귀족들의 치료를 해야 했고, 모든 보수는 신전이 챙겼다.

그렇게 시달리다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신력을 모두 강탈당한 후에는 어딘가로 팔려가야 했다.

그렇게 나와 함께 지내던 아이만 백여 명에 육박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났고, 나는 그들 중 누구의 행방도 알지 못했다.

“잠깐.”

데반이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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