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방 안에선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저 모두 새하얗기 때문일까?
긴장으로 땀이 난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애써 문지르며 천천히 테이블로 발걸음을 향했다.
우리가 마주 보며 자리에 앉자, 신관이 문가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말했다.
“정화의 가장 첫 번째 의식, 세이로의 공간입니다. 그 어떤 흠도 없는, 신의 은총을 받고 태어난 상태 그대로 돌아가기 위한 자리입니다. 자리를 비켜드릴 테니 찻잔을 모두 비워주십시오.”
그가 허리를 깊게 숙이고, 천천히 문을 닫았다.
난 내 앞에 있는 찻잔을 빤히 바라봤다.
꼭 만들다 말기라도 한 것처럼 찻잔에는 아무런 무늬도, 심지어 손잡이조차 없었다. 유일하게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안의 찻물이었다.
“……괜찮은 거겠죠?”
조심스러운 내 질문에 데반의 시선이 문가를 향했다.
그가 몸을 낮춰 작게 속삭였다.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말을 아끼라는 뜻이었다.
찻잔의 반이 넘게 채워져 있는 차는 분명 일주일간 질리도록 마신 것과 색이 같았다.
조심히 들어 가까이하니 그 향도 동일했다.
“내가 먼저 마시는 게 좋겠군.”
데반이 날 저지하더니, 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내가 먼저 마셔야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그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일주일간의 훈련으로 어느 정도 독에 내성이 생긴 건 맞았지만, 안심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눈빛을 담아 바라보자 데반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차하면…….”
그가 말 대신, 제 오른쪽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검은 존재. 그 힘을 사용하라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가 한 번에 차를 들이켰다.
목울대가 몇 번 움직였다. 달칵, 그가 빈 찻잔을 제자리에 두곤 말했다.
“똑같군.”
우리가 준비한 차와, 내성을 만든 독과 똑같다는 의미였다.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그와 같이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그대로 차를 몇 모금 더 들이켰을 때였다.
“……잠깐―”
“네?”
데반이 테이블을 짚은 채 비틀거렸다.
“……데반?”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리곤,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데반!”
그를 붙잡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을 때였다.
눈앞이 핑 돌았다. 쓰러진다…….
그 순간 데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차하면…….
그 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지금껏 그 힘을 자의로 쓴 적이 있었던가?
바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든 게 느리게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몸 안 깊은 곳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게 느껴졌다. 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어두운 방 한구석에 누워있었다.
난 재빨리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둘러봤다.
생각보다 상태는 양호했다.
방은 깔끔하고 아름다웠으며, 바닥에는 부드러운 감촉의 천이 깔려 있었다.
머리가 울렁거렸다. 눈은 떴지만, 그러니까 의식은 있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옆에서 데반의 신음이 들렸다. 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데반, 정신이 들어요?”
“……그래.”
그가 대답 뒤에 뭔가 거친 욕을 붙인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건…… 예상과 다르지 않나요?”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건 데반도 매한가지인 듯했다. 그가 더듬더듬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당신이 먼저 쓰러졌어요. 차를 마시고……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았다가 금방 비틀거렸죠. 저도 그 후에 바로 쓰러졌는데…… 당신보단 덜 마신 덕인지 조금의 유예가 있었어요.”
“네가 힘을 쓴 건가?”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그 조금의 시간 동안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사실 그 힘은, 그러니까 힐다의 힘은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저도 어떻게 쓰는지 몰라요.”
“그래서?”
“……신력을 쓴 게 아닐까, 싶은데요.”
“아하.”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반은 한쪽 팔로 바닥을 짚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이내 팔이 푹 꺾이고 말았다.
“……젠장.”
데반이 다시 털썩 자리에 누웠다.
“네 신력 덕분에 독이 중화된 것 같군. 저번에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거든.”
데반의 눈짓을 따라 창문을 바라보자,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돼요. 애초에 우리가 왜 쓰러진 거죠? 그 차가 맞았어요. 향기도, 색깔도, 맛도 모두 같았다고요. 당신은 이미 그 독에 내성이 있다고 했고, 난 일주일을 훈련했어요. 오기 직전 점검도 했고요. 그런데 왜죠?”
다다다 쏟아내는 내 말에도 데반은 대답이 없었다. 아마 그도 답을 알지 못해서겠지.
순간 너무나 단순한 결론이 내 머릿속을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요. 정말로 그 차 때문일까요?”
“뭐?”
“황족은 모두 독에 내성이 있다고 했었죠.”
“그래.”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나요? 지금껏 신전에 와서 자격 시험을 치렀던 자는 모두 황족뿐이에요. 결혼식을 치렀던 자도 대부분 황족이죠. 데반 당신도 어릴 때부터 독에 내성을 길렀다고 했었잖아요. 내성이 있다면, 자격 시험을 치렀을 때 왜 쓰러졌겠어요?”
“…어릴 때였으니, 그저 내성이 부족해서 쓰러진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내성이 부족했던 게 아니에요. 애초에 그 독이 아니었던 거예요. 아니, 정확히는 그 차가 아니라고요!”
“정신을 잃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는 소리인가?”
“맞아요. 차는 함정이었어요. 그게 아니면 보험이었을지도요. 그들은 정신을 잃게 만들기 위해 차와 또 다른 무언가를 준비했던 거예요. 누군가 대비할 수 없게끔요.”
“또 다른 무언가……. 도대체 그게 뭐지?”
그래, 중요한 건 대체 무엇이 우리를 잠들게 했냐는 거였다.
난 천천히 그 ‘세이로의 공간’을 곱씹어봤다.
아무런 티끌도 없는 순수한 공간……. 그 순간 내가 느꼈던 위화감이 떠올랐다.
어째서 위화감을 느낀 걸까.
“그 방이요. 뭔가 이상하지 않았어요?”
“온통 새햐얬으니, 이상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하지만 신전은 원래 다 하얗잖아요. 우린 이미 하얀 복도를 한참 걸었는데, 하얀 방에 들어간 것만으로 그토록 위화감을 느낄까요?”
“그 방에 무언가 장치되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차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우릴 잠들게 한 거라면 그 방밖엔 없어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마력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 신관. 왜 자리를 비웠을까?”
“네?”
“차를 다 마시게 할 생각이었다면 옆에서 감시하는 편이 좋을 텐데. 굳이 문을 닫고 나갔어.”
나갔다……. 문을 닫고?
“……창문.”
“창문?”
“그 방에 창문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른 아침임에도 어두웠던 거예요!”
데반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다면…… 연기인 건가.”
“어떤 방법을 쓴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방 전체에 무색무취의 연기가 가득 차 있었고, 우리가 그걸 흡입했다면…….”
“그 신관이 어쭙잖은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군.”
난 팔을 천천히 올려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점점 피가 돌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일단 이 방이 어디인지부터 알아야 해요. 적어도 아까 차를 마셨던 방이 아닌 건 확실하니까.”
방안은 새벽녘의 달빛으로 어슴푸레했다.
난 눈을 감고 몸 안의 신력을 느꼈다. 이상한 차를 마신 탓인지 평소보다 미약한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사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새벽이에요. 시간은 있어요. 코델리아를 찾아야 해요.”
“이 지경이 되고도 그 아이를 찾겠다고?”
“오늘이 아니면 방법이 없잖아요.”
데반이 실소를 내뱉었다.
“오늘은? 방법이 있긴 한 건가?”
난 천천히 손을 움직여,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눈을 감고 집중했다. 새하얀 빛이 은은하게 퍼져갔다. 어두운 방 안이라 그런지 유난히 밝게 보였다.
“우리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제가 신력을 사용했다면, 그래서 그 덕에 완전히 잠들지 않은 거라면요.”
“지금 이 상태도 신력으로 고칠 수 있다는 거군.”
“아마도요.”
“그 후엔?”
“그 후엔…….”
그 순간이었다.
먼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순식간에 숨을 죽였다.
신전이 퍽 조용하기 때문인지, 거리에 비해 비교적 또렷하게 목소리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생겼다굽쇼?”
“꽤 예쁘장하다던데.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가 뭐가 중요하지? 어차피 지금 이 신전에 여자라곤 하나일 텐데.”
뭐? 난 데반을 홱 바라봤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마주 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쁘다고? 호오, 이거 갑자기 흥미가 생기는데?”
“닥쳐. 우리가 할 일은 그 년을 데리고 오는 것뿐이야. 신전에서 일이 들어오는 건 흔치 않다고. 앞으로도 밥줄이 끊기지 않으려면 시킨 일이나 똑바로 해.”
“누가 뭔 짓 한답니까? 그냥 눈이라도 호강하자는 거지.”
“거, 빡빡하게 굴지 마쇼.”
지금 신전에 있는 유일한 여자. 그들이 지칭하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나였다.
데반의 말이 맞았다. 이 결혼식은 신전에게도 기회였다. 그물 속에 제 발로 들어온 물고기를 낚을 기회.
그들은 날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것도 평소엔 쓰지 않는 용병까지 고용해서.
도대체 어떻게 하려는 거지. 아무리 대신관이 황제의 권위를 뛰어넘었다고 해도, 거기에 데반이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황족이라고 해도.
결혼을 앞둔 신부가 신전에서 사라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물론 신전에서 완전히 수습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겠지만, 날 데려가기 위해 그렇게까지 한다고?어쩌면 날 납치해서 순식간에 신력만을 빼앗은 뒤 모르는 척 돌려놓을 생각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더라도 좋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