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래, 그 데반이 결혼식 예복을 직접 고르고 있단 말일세!”
펠로스의 말에 카렌이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그 미적 감각으로 결혼식 예복을……. 얼른 레이디께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레이디 에블린이 직접 부탁한 거야. 아니, 명령했다고 해야 하나?”
“레이디께서는 본인의 결혼식을 망치기라도 할 셈이신 건가?”
펠로스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하하, 크게 웃었다.
“그게 말일세. 사실은 데반의 미적 감각을 고치기 위해서라는군.”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데반이 고르는 예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퇴짜를 놓겠다 이걸세. 그걸 반복하다 보면 데반의 미적 감각이 조금은 나아질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
“허, 참.”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카렌이 와인을 크게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해서 고쳐질 거라면 진작 고쳤겠지. 애초에 퇴짜를 놓는다고, 대공 전하가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자네는 데반이 레이디 에블린의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야 당연하지. 아예 시작도 하지 않으면 모를까, 전하께서는 본인이 손댄 것에 한해선 고집이 상당하네. 한 마디로, 어떤 예복을 보고 근사하다고 생각했다면 그 선택을 철회하지 않겠지.”
“흐음…….”
펠로스가 턱을 쓸었다.
“이러다 둘 다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결혼식을 하게 생겼군. 레이디도 참 쓸데없는 짓을 했어.”
“글쎄…….”
“글쎄?”
카렌의 얼굴에 의아함이 비쳤다.
“난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데. 데반의 고집을 꺾는 것 말일세.”
“……진심인가?”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걸 본 적 있나?”
카렌은 기억을 더듬었다. 펠로스는 농담을 밥 먹듯 하는 사내였지만, 이토록 웃음기 없는 얼굴로 거짓을 말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펠로스는, 인정하기 싫지만 머리 회전이 빨랐다. 그가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면 제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도 정말로 실현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번만큼은 의구심이 들었다.
“왜지?”
“궁금한가? 나를 영 못 믿는 눈치인데.”
“당연하지.”
“그렇다면 내기하는 게 어때?”
“내기?”
펠로스는 카렌의 손에서 와인을 낚아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이켰다.
“데반과 레이디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을지, 그게 아니면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
“무엇을 걸고?”
“자네가 이긴다면, 내가 이유를 알려주지. 어째서 데반이 고집을 꺾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말일세.”
“그럼 내가 진다면?”
“그럼…….”
펠로스는 짐짓 고민하는 척했다. 애초에 카렌과 만나 와인을 먹이고, 이 긴 이야기를 한 게 모두 지금의 내기를 위해서였다.
카렌은 신의를 최고로 아는 자였다. 약속을 저버리는 것은 위보우 가문에게도, 기사에게도 최악의 굴욕이었으니까.
고작 와인 대작으로 가문의 가보를 넘겨준 것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이 내기도, 카렌에게는 충분한 효력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필요하다고 할 때, 힘을 한 번 빌려주게.”
“힘?”
또한 카렌은 단순한 자였다.
“말 그대로의 힘. 예를 들어 무거운 걸 옮길 때라든가……. 내가 자네의 힘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지 않겠나.”
“그 힘 말이군.”
“그래. 내가 원한다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딱 한 번, 힘을 빌려주게.”
역시나. 펠로스의 예상대로 카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좋아!”
펠로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품속에서 와인을 한 병 더 꺼냈다.
“도대체 와인을 몇 병이나 숨겨온 건가? 신관이라는 작자가…….”
“그래서 안 마시겠다는 건가?”
카렌의 입가에도 설핏 미소가 비쳤다.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
퐁― 코르크 마개를 능숙하게 뽑으며 펠로스는 몰래 미소 지었다.
이기든 지든 손해 볼 리 없는 내기를 했다고 생각하면서.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결혼식 전날이었다.
“대공비 전하,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데뷔탕트 이후로 조금은 친근해진 시녀가 물었다.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 밤에 시행되는 정화 의식을 위해 하루 앞서 신전으로 향해야 했다.
신전에 들어가는 건 오직 데반과 나 둘뿐으로, 집사나 시녀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당연히 옷을 갈아 입혀줄 시녀도 없어, 나는 그대로 잠을 청해도 괜찮을 만한 편한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
물론 순순히 잠에 들어줄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드레스가 수수하니, 머리에 진주와 꽃으로 장식을 할까 봐요.”
별다른 무늬가 없는 연한 베이지톤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시녀가 덧붙였다.
“아냐, 그냥 아무것도 안 할래.”
“네에?”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데, 진주니 뭐니 불편해.”
“하지만……. 그럼 꽃이라도 해요! 꽃은 그냥 잡아 뜯으시면 되는데…….”
아쉬움이 가득한 시녀의 목소리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정화 의식이 아닌 코델리아를 만나러 가는 거였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마당에 머리에 주렁주렁 진주니 꽃을 달고 다닐 순 없었다.
“그냥 빗기만 해줘.”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시녀가 결국 내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치는 금빛 머리칼을 바라보며 나는 들리지 않게 한숨 쉬었다.
결혼식을 한다는 것만으로 긴장하기에 충분한데, 신전에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과 코델리아를 만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마음을 더욱 울렁이게 만들었다.
준비를 마치고 나가자, 데반이 마차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신전의 요구에 따라 검은빛이 들어가지 않은 옷을 입어야 했다. 때문에 데반 역시 새하얀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꼭 내 드레스와 맞춘 모양새라, 나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
“긴장되나?”
마차 앞에 선 나에게 데반이 물었다.
“……조금요.”
“아니라고 했으면 서운할 뻔했군.”
“네?”
“결혼식 날 긴장이 되지 않는다는 건, 상대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다는 뜻이니까.”
데반이 내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꼭 춤을 청할 때와 비슷한 동작이었다.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한숨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기껏 마차 앞에서 기다렸더니,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무시할 셈인가?”
“저번?”
“데뷔탕트 때.”
데뷔탕트 때? 나는 기억을 더듬어, 데반이 데뷔탕트 날 굳이 마차 밖에서 나를 기다렸던 일을 떠올렸다.
반쯤 올린 머리에 넋을 놓고 있다가, 구두 때문에 발이 아프다는 핑계로 서둘러 마차에 올랐었지.
그럼 그날도 일부러 마차 앞에서 기다렸다는 건가?
그 날 기분이 안 좋았던 것도 그럼…….
데반이 재촉하듯 손을 까딱거렸다. 곧게 쭉 뻗은 손가락을 빤히 내려다봤다.
“……이런 걸 챙기시는 성격인지는 몰랐는데요.”
“누가 챙길 기회도 안 줘서 말이야.”
떨리는 손을 맞잡고, 괜스레 툴툴거리며 말했다.
“누군지 몰라도 참 너무하네요.”
“그렇지? 따끔하게 혼내줘.”
얽혀오는 손가락 너머로, 데반이 미소 지었다. 내 얼굴이 달아올라 있다는 게,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신전은 웅장했다. 어쩌면 황궁보다도 더.
저 멀리 첨탑이 보이고, 마차에서 내리고, 신전 안으로 한 걸음 내딛는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난 자꾸만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입이 바싹바싹 말라왔고, 손은 빳빳하게 굳어갔다.
돌아왔다, 이토록 끔찍한 곳으로. 기어코 돌아왔다.
“내일 식에 앞서, 정화 의식을 치르기 위해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얼굴 위에 새하얀 천을 뒤집어쓴 신관이 우리를 정중하게 안내했다.
그 모습은 신성하기보단 기괴해 보였다. 개인적 감상이 다분히 들어갔기 때문인지도 몰랐지만.
“어떻지? 어린 시절과 그대로인 것 같나?”
나보다 반 발자국 정도 앞서 나가던 데반이 낮게 속삭여왔다.
어린 시절이라. 내가 신전에서 디에고 백작가로 입양됐던 건 일곱 살 때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어린 시절의 일 따위, 그것도 살았던 공간의 지리 따윈 기억하지 못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난 전생의 기억을 품은 채 컸으니 남들보단 기억이 또렷했다.
“……잘은 몰라도 그대로인 것 같아요.”
다만 애초에 난 신전에서도 구석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결혼식을 치르게 될 예배당과 그 주변에 대해선 거의 무지했다.
우리는 열심히 주변을 살피면서도 최대한 의심 받지 않으려 노력하며 신관의 뒤를 따랐다.
그는 딱히 우리를 의심하진 않는 듯, 목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먼발치에서 걷고 있었다.
“정화 의식 때문인가 보군, 저 새하얀 천.”
“신관조차 깨끗하지 않다는 뜻일까요?”
“보여주기 위함이겠지. 천을 뒤집어쓴다고 더러운 게 사라질 리도 없고.”
“애초에 신전에서 하룻밤 자면 정화가 된다는 것부터 안일한 생각이죠.”
커다랗고 높은 공간에 우리 셋뿐이라, 아무리 작게 말해도 소근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내일이면 식을 치를 부부의 수다스러움이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
난 입을 꾹 다물고 대신 고개를 들어 신전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어릴 때 내가 살았던 곳이 신전 내에서도 유난히 허름한 공간이긴 했지만, 그사이에 신전이 더 부흥한 것도 맞는 것 같았다.
신전은 지나치게 화려하고 웅장했다.
모든 것이 새하얀 석고로 만들어진 건물에는 조금의 흠집이나 티도 없었다.
천장은 부채꼴 모양의 화려한 조각으로 뒤덮여 있었고, 양옆으로는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기둥 사이사이로 창문이 나 있었는데, 매달린 하얀 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 모든 게 한 가지를 뜻하고 있었다.
신의 권능.
기가 막힐 정도로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곳입니다.”
마침내 신관이 발을 멈췄다.
문을 열어준 그는 멀찍이 물러난 다음, 우리에게 손짓했다.
방안은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햇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했다.
가운데에 테이블과 찻잔이 준비돼있었는데, 벽면을 포함해 모든 것이 새하얬다.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