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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55화 (55/123)

55화

데뷔탕트가 끝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사교계에 내 얼굴을 알리겠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그러나 만족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다음 주가 결혼식이었으므로.

“어떻게 하실 거죠?”

“뭘?”

데반은 한가로이 홀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결혼식이, 정확히는 우리가 신전에 쳐들어가 코델리아를 만나고 단서를 찾을 수 있는 날이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그는 지나치게 여유로워 보였다.

“결혼식이요!”

“일단 앉지.”

그가 제 맞은편을 턱짓했다. 초조한 건 나뿐인 듯했다.

“자격 시험을 봤을 때, 맥없이 잠들었다고 했잖아요. 그건 신전이 무슨 수를 썼던 거고요. 우리도 마찬가지가 되면―“

“그러니까 앉으라고.”

데반이 내 말을 끊으며 다시 맞은편을 가리켰다.

난 그를 빤히 바라보다 씨근대는 것을 멈추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전에 말했었지. 짐작 가는 게 있다고.”

데반이 찻잔을 내 앞으로 건넸다.

난 그제야 테이블 위에 찻잔이 지나치게 많다는 걸 눈치챘다. 최소한 두 사람이 마실 양은 아니었다.

“……이게 다 뭐죠?”

“널 위한 거지.”

“저요?”

“이 나라의 황족들은 말이야.”

그가 턱을 괴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주 조금씩 독을 먹어. 내성을 만드는 거지.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지만.”

난 찻잔을 내려다봤다.

찻잔에 들어가 있는 찻잎은 평소와 색도 향기도 비슷해 보였지만, 독 이야기를 하니 어쩐지 꺼림칙했다.

“나야 그다지 황족으로 취급당하며 크진 않았지만. 내 집사는 유능한 황실 관리인이어서, 나 역시 웬만한 독에는 끄떡없거든.”

“……그래서요? 이게 다 독이라는 건가요?”

“자격 시험을 치르던 날, 아스트릴라와 내가 신전에서 한 특별한 일이라곤 차를 마신 게 다였다. 그 후 신전에서 결혼한 다른 이들도 같은 차를 마셨다고 증언했고.”

“그럼 그냥 차를 거절하면 되잖아요.”

“그랬다간 그들의 의심을 사겠지. 차를 마시되, 그들이 원하는 효과는 주지 않는다. 그게 최선이야.”

난 주춤거리며 찻잔을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저보고 이걸 마시라고요?”

“강제로 수면을 취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지. 목숨이 위험한 건 아냐.”

데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어디선가 실수가 끼어들 수도 있지 않은가.

“오늘은 테스트. 왼쪽에 있는 것부터 한 모금씩 마시고 한 시간씩 경과를 지켜볼 거다.”

왼쪽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가장 왼쪽에 있는 찻잔에는 찻잎의 양이 현저히 적었고 가장 오른쪽은 반대로 가장 많았다.

농도가 옅은 것부터 먹일 생각인 듯했다.

“이상 반응이 생기면 거기서 중지. 적정선을 알아낸 후, 내일부터 차근히 증량할 거야.”

“……조금 일찍 시작하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차에 대해 조사를 해봤는데, 열흘 이상 마셨다간 부작용이 남을 수도 있다더군. 그렇다고 너무 늦게 시작해선 내성이 쌓이기 힘드니, 일주일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한 것뿐이다.”

“……일주일은 괜찮은 게 확실하고요?”

“걱정 마. 최대한…… 죽지 않게 노력할 테니까.”

그의 입꼬리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고, 난 그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살해 협박 같다고 생각했다.

“저만…… 마신다는 거죠? 당신은 아니고요.”

“난 이미 내성이 있으니까. 왜, 널 죽이기라도 할까 봐 무서운가?”

“……설마요.”

난 빳빳하게 미소 지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정중히 서 있던 노집사가 여러 개의 찻잔에 차례로 물을 부었다.

난 개중 가장 왼편에 있는 찻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입이 바짝 말라왔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뭔데요?”

차를 한 모금 마신 나는 묘한 맛에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데반이 정말 그렇게 말한 건지, 그도 아니면 내 신경이 온통 독에 쏠려 있어서인지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저번이요?”

“도면을 보여줬을 때 말이다.”

“으.”

난 두 번째 찻잔을 들어 한 입 마시곤, 곧바로 질색하며 내려놨다.

도면을 보여줬을 때? 그때 무슨 말을 했었더라.

“다만 이번 경우엔…….”

데반이 불현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죠?”

“……아니, 그저 식사가 식겠다고.”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그때, 데반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저번부터 찝찝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물어야겠다고도 생각했고.

“그 이야기죠? 이번 경우엔…….”

“그래. 신전은 보통 경비가 허술하다고 했었지. 저들의 정보가 빠져나가는 걸 원치 않으니 용병을 고용하는 일도 없고, 신관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번 경우엔 뭐가 다르다는 건가요? 왜죠?”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아 난 미간을 찌푸렸다.

집사가 내 앞으로 세 번째 찻잔을 건넸다.

“대공 저에서 제도로 올라올 때, 마물이 나타났었지. 그 마물은 너 때문에 생긴 예외였고.”

“……저 때문에, 또 예외가 생길 거란 소리인가요?”

“이 결혼식은 우리가 신전에 다가가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신전이 널 붙잡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거든.”

그가 마시라는 듯 세 번째 찻잔을 눈짓했다.

난 아까부터 조금씩 매스껍기 시작한 속을 겨우 달래며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역시나 쓰고 묘한 맛이 입맛을 가득 채웠다.

신전이 날 붙잡을 기회라.

“그…… 말은…….”

그에게 뭐라 답을 하고 싶은데, 제대로 생각을 하고 싶은데, 쉽지 않았다.

혀가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발음이 제대로 되질 않고, 몸이 축 늘어졌다.

툭― 테이블 위로 두 팔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그 탓에 저들끼리 부딪힌 찻잔이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노집사가 빠르고 노련하게 테이블 위의 찻잔들을 모두 치웠다.

테이블이 비워짐과 동시에 난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독이…… 들어와서인가?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노집사가 데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그의 권태로운 미소가 보였다.

*

흙먼지가 휘날리는 연무장 안에는 짚단에 검을 휘두르는 병사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훈련 담당자인 카렌 위보우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땡볕에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봐, 카렌!”

그때, 멀리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휘적휘적 손을 흔들고 있는 펠로스 키베온이었다.

“펠로스? ……이대로 삼백 번 더.”

잔인한 명령을 하달하곤, 카렌은 연무장을 나섰다.

“저 자식이 여긴 왜 온 거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다가가자, 펠로스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높이 쳐들었다.

“카렌!”

“여긴 대체 무슨 일이야?”

카렌은 새하얀 신관복과 와인을 차례로 바라봤다.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자네와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잖은가.”

카렌이 데반을 따라 제도로 올라온 이후, 그들은 이미 몇 번 마주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인사를 나누지 못하긴 무슨…….”

“우리 사이에 와인이 빠지면 그게 인사인가?”

품 안에서 커다란 천을 꺼낸 펠로스가 당연하다는 듯 바닥에 깔고 앉았다.

“그래서, 설마 여기서 와인을 마시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자네도 어차피 연무장 근처를 오래 떠날 수 없을 테니. 이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

카렌은 어느새 자리 잡고 코르크 마개를 열고 있는 펠로스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 미처 잔은 준비 못했으니 그냥 입을 대고 마셔야만 하네.”

“이러다 대공 전하께 들키기라도 하면…….”

“대공 전하!”

퐁― 코르크 마개가 청량한 소리를 내며 튀어 나갔다.

“대공 전하라니, 카렌. 이제는 데반이 앞에 없을 때도 그렇게 부른단 말인가.”

“이봐, 난 너와는 다르다고. 대공 전하의 옆에서 몇 년이나 있었는 줄 알아? 이제는 너처럼 편하게 부를 수 없단 말이다. 그리고 애초에 작위를 얻은 후에도 이름으로 부르는 네가 이상한 놈이지.”

“그래, 그래. 그 얘긴 됐으니 그만 앉지.”

펠로스가 와인을 병째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자네가 땡볕에서 고생하고 있을 게 훤해, 내 특별히 차갑게 보관해뒀다네.”

그리곤 여전히 우뚝 서 있는 카렌에게 와인을 건넸다. 카렌은 망설이는 표정으로 와인을 한 번, 여전히 훈련 중인 병사들을 한 번 바라봤다.

“어서, 카렌. 재미없게 굴 건가?”

펠로스의 눈이 뾰족해졌다. 카렌은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일상적인 훈련이라, 무거운 갑주를 착용하고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건데?”

와인을 벌컥 들이킨 카렌이 물었다. 펠로스의 말대로 뒷골이 찡할 정도로 차가웠다.

“자네, 데반과 레이디 에블린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뭘 하고 있느냐니? 글쎄……. 내가 아는 거라곤 레이디가 전하의 저주를 풀어줬고, 이젠 두 분이서 결혼을 한다는 것뿐일세. 그러니 결혼 준비를 하고 계시겠지. 달리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안 본 사이에 정말 재미없는 사내가 됐군, 카렌.”

“뭐야?”

자꾸만 속을 박박 긁는 펠로스의 태도에 카렌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데반 놈이 무려 예복을 고르고 있단 말이네.”

“뭐? 그 데반이?”

순식간에 존칭을 잊은 듯, 카렌이 고함쳤다.

“그래, 그것도 결혼식 예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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