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데반 란티모스는 하룻밤 사이에 눈이 멀었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 예상했던 결과라고 말했다.
아스트릴라가 후계자로 낙점된 것도, 데반의 눈이 먼 것도 당연하다고.
그들은 그에게 내려진 저주가 신의 섭리라고 여겼다.
어미가 부정을 저질러 낳아선 안 될 아이를 낳았으니, 신이 그 눈을 멀게 하였다고.
데반의 붉은 눈은 부정의 증거였고, 사라져야 할 흔적이었다.
데반은 황제에게서 작위를 받았다.
대공이라는 작위는 보기에만 그럴 듯했다. 그는 영지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변두리로 쫓겨났다.
그럼에도 그에게 불만은 없었다. 어쩌면 반가웠는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세계는 지옥 같고, 암담했지만 또 한편으로 따듯했다.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그건 곧 남들도 제 눈을 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데반은 제 붉은 눈을 가린 검은 천이 마음에 들었다.
저주를 풀 수 있다는 예언이 내려왔지만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숨만 쉬며 살아가는 것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열일곱이 되던 해, 제 주위에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나타날 때까지는 그랬다.
그에게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 희미하게나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본디 사람이란 제 손에 영영 닿지 않는 것보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걸 더 탐내는 법이었다.
그는 앞이 보고 싶었다. 당연하게 누려왔던 풍경들이 그리웠다.
내가 왜, 왜 나만. 그런 원망스러운 마음도 생겼다.
얼마 동안은 제 어미와 황제, 황후, 그리고 아스트릴라를 원망했고 얼마 동안은 신, 신전, 대신관을 원망했으며 또 얼마 동안은 자신이라는 존재와 빌어먹을 운명을 원망했다.
그는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색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앞을 볼 수만 있다면, 붉은 눈동자마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예언의 주인공을 찾기 시작했다.
[데이지 꽃향기를 품은 어린 태양의 여신이, 너의 저주를 풀어 주리라.]
그래서 에블린을 찾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예상대로 흘러가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데반은 쓰러졌고, 일 년이 지나 정신을 차렸으며, 에블린은 어디론가 도망친 후였다.
저주가 풀렸으나 오른쪽 눈은 희미했고, 혐오스러운 검은 존재가 꿈틀 거리고 있었다.
다시 찾은 운명의 여신은 제 눈의 검은 존재와 몇 년간 그를 괴롭힌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동일하다고 하지 않나, 신전에서는 마물을 조종하고 흑마법이라 불리는 정체모를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황태녀가 된 제 동생은 작금의 황제와 신전을 부수겠다고 한다.
데반은 이 모든 일이 단 하나의 행동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했다.
신전을 부숴야 한다. 그리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쟁취해야 한다.
데반이 원하는 건 별 게 아니었다.
그는 모두가 수군거리는 것처럼 황좌를 원하지도 않았고, 대단한 권력이나 막대한 부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가지지 못한 색이 아니었다. 황금빛 눈동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이었다.
스스로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
나는 데반 란티모스의 헝클어진, 눈썹을 덮는 어두운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당신이었어요.”
테라스의 난간을 세게 부여잡은 데반의 커다란 손에 핏줄이 불거졌고, 잔뜩 커진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다.
“그 아이가…….”
난 데반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봤다.
절로 아까의 아이가 떠올랐다.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조금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까지.
“당신의 어린 시절이었어요.”
“……확실한 건가?”
난 입술을 달싹였다.
확실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데반의 어린 시절을 몰랐으니까.
이건 그저 직감일 뿐이었다.
그도 그 사실을 눈치챈 건지 질문을 바꿨다.
“대체 왜? 왜 내 모습으로…… 그것도 어린 시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역시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데반이 한 손으로 제 눈가를 가렸다.
“나와 관련이 있는 건가? 그 존재가?”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아무 이유도 없을 지도요.”
“아무 이유도 없다니?”
“놀리기 위함일 수도 있죠. 우리가 그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요. 저번에도 재미 운운했었고. ……혹시 어릴 때 데이지 꽃과 관련된 적이 있어요?”
“……없다. 그 예언을 제외하곤 한 번도.”
난 불과 몇 시간 전, 그 아이를 봤을 때를 상기했다. 작은 거라도 단서가 될지 몰랐다.
“그 아이…… 옷에 흙이 묻어 있었어요. 고급스러운 옷 같았는데……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더듬거리는 내 말에도 데반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조금 낡아 보였던 것 같기도 해요. ……평민 아이일 거라고 지레짐작해서 그렇게 생각한 걸 수도 있고요.”
“그리고?”
“데이지 꽃을…… 뒷주머니에서 빼냈어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이미 짓밟힌 것 같기도 하고.”
“뒷주머니에서 빼낸 꽃이, 짓밟힌 것 같았다고?”
크게 의미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아무 소용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공연히 던져보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지점에서, 데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뭔가 짚이는 게 있어요?”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있어.”
“그런 경험이라는 건…….”
“꽃을 뒷주머니에 넣었었지. 그게 짓밟혔었고. 다만, 데이지 꽃은 아니었는데.”
“착각한 거 아닐까요? 아주 어린 시절이었잖아요.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였―”
“여덟 살이었다. 내가 든 꽃은 붉은색이었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기에 난 입을 꾹 다물었다.
고작 여덟 살 때 일을 이렇게까지 확신하고 있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설마 그때의 일을…… 알고 있는 건가?”
데반이 중얼거렸다.
“그때의 일이라뇨?”
“……아니, 됐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가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혼란스러워 보였다.
어린아이가 꽃을 들 일이 뭐가 있을까. 그게 선물이라면, 누굴 향한 거였을까.
데반이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그보다 그 존재가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 하난 확실해졌군.”
“이젠 힐다의 모습으론 나타나지 않을 생각일까요?”
“또 모르지. 이번에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난 건 그저 경고일 수도.”
“경고? 뭐에 대한 경고요?”
“더 이상 파헤치지 말라는 경고.”
난 번뜩 눈을 떴다. 아이가 내게 한 말이 이제야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말을 했었어요!”
“뭐?”
“잊고 있었어요. 내가 왜, 왜 잊고 있었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을 정도였다.
모든 게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어째서 딱 그 한 마디만 떠오르지 않았던 걸까.
“기억을 조작했을 수도.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보다 무슨 말을 했지?”
“조심하라고…….”
“뭐?”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조심하는 게 좋아.”>
“조심하라고 했어요. 분명해요!”
“조심하라고……?”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어요. 더 이상 파헤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건…… 우릴 도와주고 싶은 것처럼 들렸어요.”
데반의 생각은 나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도와준다? 굳이 안 좋은 기억을 헤집으면서 말이군.”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어딘가 이상해요.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정이라도 든 건가? 너야말로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것의 편을 드는군.”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신전에서 마물을 보내 우리가 죽을 뻔했을 때, 우릴 구해준 건 그것이었다.
이번에도 우릴 도와주려는 거라면?
대신관들은 말도 안 되는 빈약한 근거를 붙여가며 이를 악물고 그 존재를 흑마법으로 매도했다.
세간에 신전은 신성시되고 있었고, 흑마법은 해악으로 정의됐다.
지금껏 간과하고 있었던 사실이 폐부를 찔렀다.
신전은 제국민이 알고 있는 것처럼 신의 은총을 받은 선한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학대하고 신력을 강탈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그렇다면 흑마법은?
오히려 선한 쪽은……. 가슴팍이 위아래로 크게 오르내렸다.
데반을 바라보며,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그게 우릴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끈다고?”
“그 존재로 인해, 그 힘으로 인해 제가 대공 저를 도망쳐 나왔잖아요. 그 힘으로 인해 당신은 오른쪽 눈이 희미하게 보였고, 그래서 절 찾아온 거고요. 거기에 우리가 위험할 때 도와줬고, 이번엔 경고까지…….”
“우리가 그것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건가?”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씹었다. 그래, 그게 아니라…….
“따로 원하는 게 있는 거예요. 그걸 위해서 우릴 이끄는 거고요.”
“원하는 거라…….”
데반이 몸을 돌리더니 난간에 등을 기댔다.
고개를 쳐들어 시선을 위로 한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게 우릴 이끌고 있다면,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데.”
데반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가고,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눈을 맞추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원하는 건…….”
“신전을 부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