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내가, 그러니까 내가…….”
그러나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보지 않은 말이라 그런 건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년은 참을성 있게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데반은 그 말을 내뱉었다.
“내가…… 황제가 되면 되잖아.”
“뭐?”
데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오기로 내뱉은 말이 후회됐다. 차라리 아스트릴라를 만나는 걸 포기하고 돌아갈걸.
그는 슬쩍 소년의 눈치를 봤다. 소년은…….
“하, 하하하!”
땅에 주저앉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조용히 해!”
멍하니 지켜보던 데반이 깜짝 놀라 소리치기 전까지 계속해서.
“하하……. 황제가 된다고? 네가? 그 붉은 눈의 황자님이?”
비아냥대는 건가 싶어, 데반이 그를 노려봤다.
“재밌어. 재밌네. 정말 재밌어!”
“……재밌다고?”
소년이 성큼성큼 담으로 다가오더니, 데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봐야 닿지 않을 거리였다.
“에잇, 악수는 땅에 내려와서 하자.”
“그, 그래…….”
갑작스럽게 발랄해진 분위기에 데반이 적응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소년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펠로스 키베온이야. 붉은 눈의 황자님께선 이름이?”
“……데반 란티모스.”
“음. 데반, 데반이라. 황제가 되기 좋은 이름이네. 좋아, 결정했다.”
“날 도와줄 거야?”
점점 다리가 저려와, 데반은 좁은 담 위에 버티고 앉아 있기 힘들었다.
이젠 소년이 어떤 방법으로든 저를 도와주길 바랐다.
서둘러 담을 내려가 아스트릴라를 보고 싶었다. 붉은 꽃을 손에 쥐여 주면 좋아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볼이 상기됐다.
“도와줄 거냐고? 당연하지.”
소년이 데반을 바라보며 씩 눈웃음쳤다.
“난 정당성이라면 지긋지긋하거든. 네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이 펠로스가 도와주지.”
“……뭐?”
뭔가가 잘못된 기분이 들었다. 데반에게 필요한 건 그저 이 나무를 내려갈 도움뿐이었는데.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사실 난 천재거든.”
데반을 내려주겠다고는 했지만, 펠로스는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그는 풍채가 좋지도 않았고 ―애초에 좋아봐야 여덟 살짜리가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키도 크지 않았다.
그러니 데반이 뛰어내렸을 때 그를 받는 것도, 그가 밟을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도와준다며! 너, 네 입으로 천재라며!”
여덟 살의 데반은 성질이 급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뒷주머니의 붉은 꽃 한 송이에 가 있었다.
펠로스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깨물고 고심했다.
“……여기 기다리고 있어!”
그러더니 한 마디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데반이 붙잡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어쩐지 사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에, 데반은 입을 잔뜩 내밀었다.
이대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돌아오긴커녕 제가 황제가 되겠다 말했다고 이곳저곳에 떠벌릴지도 모른다.
그는 귀가 아플 정도로 따가운 집사의 교육 덕분에, 그런 말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위험이 될지 잘 알고 있었다.
역시 괜히 말했어.
후회가 물밀듯 몰려왔다.
쓸데없이 입을 놀렸다. 그냥 별궁에 처박혀 있었어야 했다.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자꾸만 가지를 쳐서, 데반을 깊은 구덩이로 몰고 갔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담벼락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을 때였다.
저 멀리에서 펠로스가 뛰어오고 있었다. 웬 커다란 소년 하나를 데리고서.
“허억, 헉―”
그다지 오래 뛴 것 같지도 않은데, 펠로스는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골랐다.
그 옆에서 같이 뛴 소년은 멀쩡한 표정으로 데반을 바라봤다. 흥미가 가득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데반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얜 뭐야?”
“얘는, 허억…… 근처 연무장에서, 훈련하고 있는 걸, 후우…….”
펠로스가 무릎에 손을 올리고 가쁘게 호흡하며 겨우 말을 이어갈 때, 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곤 해맑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황자님!”
황자님이라니. 노집사를 제외하곤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데반은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넌 누구지?”
“위보우가의 카렌이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황자님! 그 붉은 눈의 황자님이시라죠? 들리던 소문하고는 전혀 다르십니다! 아니, 정말로 붉은 눈이긴 하시지만요. 위엄 있고 무엇보다 잘생기셨네요. 제 취향은 아니지만요!”
주절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쩌렁쩌렁해서 데반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펠로스. 대체 얜 왜 데려온 거야.”
어느새 카렌의 옆으로 와 선 펠로스가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얹곤 말했다.
“못 들었어? 위보우가라잖아!”
위보우?
데반은 그제야 이 커다란 덩치의 소년이 제국 제일가는 기사 가문의 영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 기사야?”
“네, 황자님! ……정확히는 수습이지만요.”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가, 카렌이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뭐해, 뛰어내리지 않고.”
“뛰어내리라고?”
“제가 받을 수 있습니다, 황자님!”
말끝마다 황자님, 황자님.
데반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사실은 그런 카렌이 싫지 않았다.
“……정말로?”
“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이래봬도 몇 년 후에는 제국 제일가는 기사가 될 몸이니까요. 며칠 전, 어린 고블린을 잡은 경험도 있다고요! 그 녹색의 괴물이 어찌나 날렵한지―”
“조용히 좀 하지?”
펠로스의 타박에 카렌이 입을 꾹 다물더니, 대신 데반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황자님!”
데반은 망설였다.
펠로스고 카렌이고 모두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지금껏 집사를 제외하고 이토록 길게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처음이었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제아무리 의젓하게 자랐다고 한들 그래봐야 여덟 살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조금은 경솔한 기대감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담벼락 아래로 몸을 던졌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렌은 기대만큼 멋지게 그를 받아주진 못했다.
그는 데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결국 데반은 그를 깔아뭉갰고, 그 덕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카렌은 해냈다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다음은 펠로스의 차례였다.
그는 데반의 이야기를 듣고 아스트릴라가 있을 만한 장소와 밖에서 침입할 수 있는 창문을 귀띔해줬다.
제 아비 때문에 자주 황궁에 드나들었다는 그는 황궁 지리에 훤했다. 황족인 데반보다도.
“그럼, 다음에 봐.”
이젠 돌아가 봐야 한다며 펠로스가 가볍게 인사했다.
다음이라, 막연한 약속이었다.
데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렌 역시 훈련을 위해 연무장으로 돌아가 봐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펠로스의 팔을 붙잡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걸 멈추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자리를 뜬 건 데반이었다.
“후우.”
데반은 서둘러 펠로스가 말해준 창문 근처로 향했다.
낮은 창문 너머로 텅 빈 복도가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 그는 훌쩍 창문을 넘었다.
코너에서 오른쪽, 그 후엔 직진, 다음 코너에서 왼쪽, 좁은 복도를 쭉 지나가면 그 끝에…….
데반은 휙― 벽 뒤로 몸을 숨겼다.
펠로스가 말해준 휘장이 쳐진 방 앞에는 두 명의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스트릴라는 어린아이였고, 황녀였다.
그것도 곧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은.
어쩐다. 저 병사들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방 안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데반은 제 뒷주머니에 넣어놓은 꽃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잔뜩 눌려서, 꽃은 처음의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포기해야 하나. 바보 같았는지도 모른다.
동생은 무슨 동생. 저는 어디까지나 ‘붉은 눈의 황자님’이었고, 그녀는 번쩍거리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차기 황제였다.
아스트릴라가 제 손가락을 잡아줬던 그 일도, 당연히 그녀는 기억하지 못할 테다.
데반은 낮게 한숨 쉬었다. 어린아이가 두 명의 병사와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막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을 때였다.
“이봐.”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데반은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도 목소리의 주인이 부르는 자는 데반이 아닌,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그는 병사들과는 조금 다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위보우 단장님!”
병사들이 절도 있게 경례했다. 단장이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들 잠깐 나와 함께 어딜 좀 가야겠네.”
“예?”
“거 참, 요 앞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말이야.”
“마물이요? 황궁 안에 말입니까?”
“그래.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더군.”
“대체 누가……. 목격자가 있습니까? 거짓 제보는 아니고요?”
“그게 말이야.”
위보우 단장이 검지로 볼을 긁적거렸다.
“제보자가 그 키베온가의 막내아들이라는 모양일세.”
“키베온가의 막내아들이라면…….”
병사들의 몸이 경직됐다. 그건 데반도 마찬가지였다.
키베온가의 막내아들이란, 펠로스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래, 다른 아이라면 거짓말을 한다 여길 수도 있지만, 그 키베온가의 막내아들이 아닌가. 거짓말을 할 성격도 못 되고, 또 설령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단장님께서 몸소 확인을 하셔야 한단 소리군요.”
병사 하나가 납득한 듯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정원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황녀 전하를…….”
나머지 병사 하나는 여전히 굳건한 표정을 했다. 위보우 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이번엔 내 아들 녀석이 문제인데……. 그 녀석이 하필이면 정원 근처에서 일을 벌이는 바람에 병사들이 다 그쪽으로 갔다 하지 뭔가.”
“카렌 도련님이 또…….”
병사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닌 듯했다.
“하여튼 한시가 급하니 가면서 이야기하지. 제보에 따르면 마물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게 나와 자네들이니.”
“하지만 황녀 전하는…….”
“오는 길에 황후궁에 연락해뒀네. 아마 곧바로 올 거야.”
병사 하나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제 자리를 비우고 떠난다는 게 망설어지는 모양이었다.
제발, 제발 가라. 데반은 주먹을 쥔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