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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51화 (51/123)

51화

애초부터 몸이 약했던 데반의 어머니는, 그를 낳자마자 숨을 거뒀다.

고작 한 달 만에, 황제는 기다렸다는 황후를 갈아치웠다.

아비의 손길 한번 느껴보지 못한 어린아이가 별궁에서 살아갈 동안, 성대한 국혼이 치러진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데반이 모두의 관심에서 비껴난 것은.

오 년 뒤, 새로운 황후에게서 아스트릴라가 태어났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은 태어나자마자 그 존재감을 뽐내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대대로 황제들이 그러했듯.

옹알이도 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두가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입을 모아 떠들어 댔다.

별궁에 갇힌 아이. 아비에게서 버림받은 아이.

제 어미와 똑 닮은 붉은 눈의 황자를 기억하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

여덟 살, 어린 데반 란티모스는 별궁에 살았다.

어찌 됐든 황궁이기에 별궁 역시 커다랬고, 나름대로 화려했으나 관리되지 않아 척박했다.

그곳에서 데반은 단 한 명의 늙은 집사와 함께 생활했다.

지저분하다거나, 관리인이 없는 것, 거기에 부모의 부재 따위는 데반에게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그에겐 이런 것들이 일상이었고, 그 외의 것들이 비일상이었으니까.

그는 마음껏 뛰놀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커다란 별궁이 좋았고, 관리되지 않아 타고 놀 넝쿨이 가득한 정원이 좋았고, 집사가 요리해주는 덜 익은 고기가 좋았다.

다만 근래 들어 그에게 단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겼는데, 그건 바로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체인 제 동생, 아스트릴라를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가 아스트릴라를 본 것은 그녀가 태어났을 때 한 번, 대신관으로부터 전언이 왔을 때 한 번. 그렇게 두 번이 다였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데반은 황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별궁에서 불려와 그 옆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제 어머니가 죽고 새롭게 황후가 된 여자의 아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데반은 조금쯤 억울한 마음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황후와 황제를 향해 다가갔다.

두 쌍의 금빛 눈동자가 그를 바라봤다. 황제는 귀찮다는 기색이 가득했고, 황후는 꺼림칙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아스트릴라의 앞길에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

데반은 집사에게 배운 의례적인 인사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황후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생명체로 눈을 떨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빨간 머리카락은 머리통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데반의 손가락이 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황후가 미처 저지할 틈도 없이, 아스트릴라가 그의 손가락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곤 작은 눈을 가물가물 떠 보였다.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데반은 제 손가락을 붙잡았던 보드라운 감촉과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데반을 바라보는 황금빛 눈동자 중에,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으니까.

지금쯤 그녀는 세 살이 됐으리라.

다시 한번 그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그녀가 여전히 제 손가락을 잡아줄지, 저를 기억하기는 할지 궁금했다.

데반이 처음으로 별궁을 탈출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노집사가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에 박혀 있는 틈을 타 낮은 창문을 열고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넝쿨을 타고 나무를 올라, 담을 넘었다. 정원에서 논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그런지 꽤나 수월했다.

담 위에 서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성취감에 밝게 미소 지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소스라치게 놀란 데반은 그대로 휘청거리며 아래로 꼬꾸라질 뻔했다.

겨우 자세를 낮춰 중심을 잡은 그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에도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어딜 봐. 여기야.”

그제야 그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담의 반대편, 나무 그늘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척 봐도 재미없어 보이는 두꺼운 책을 한 손에 든 채.

“뭐, 뭐야.”

“내가 묻고 싶은데. 뭐야, 너. 도둑이야?”

도둑이라니.

데반은 눈을 크게 뜨고 손사래를 치려다가, 중심을 잃을 것 같아 소리치는 걸로 대신했다.

“그런 거 아냐!”

“쉿, 그러다 들키겠다. 뭔진 몰라도 들켜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은데.”

소년은 데반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는데, 말하는 게 퍽 어른스러웠다.

“……니가 알 바 아니잖아.”

“미안하지만 알 바거든? 너 때문에 소란스러워지면 귀찮아지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서.”

“너도 도망 나왔어?”

“그딴 것보단 거기서 내려올 방법이나 생각하지 그래?”

“이까짓 거 그냥 뛰어내리면―”

“올라탈 땐 나무를 이용한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이쪽 나무는 꽤 멀어.”

데반은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소년의 말이 맞았다. 이곳엔 타고 내려갈 나무가 없었다.

그대로 뛰어내렸다간, 최소한 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질 각오를 해야 했다.

“그냥 돌아가지 그래?”

그럴 순 없었다. 데반은 오늘 반드시 아스트릴라를 만나야 했다.

제 여동생의 머리칼과 똑같은 색의 꽃을 정원에서 발견해,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챙겨온 참이었으니까.

오늘이 아니라면 꽃은 시들고 말 테고, 똑같은 꽃을 정원에서 다시 찾으리란 확신은 없었다.

그 넓은 정원에서 처음 보는 붉은 꽃이었기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뛰면 돼.”

“안 될걸? 잘못해서 머리부터 떨어졌다간 즉사야.”

“……즉사가 뭔데.”

“꽥― 한 번에 죽는다는 거지. 멍청하긴.”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제 목을 손으로 스윽 그어 보였다.

그는 옷을 몇 번 팡팡 털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뜰 기세였다.

“잠깐만!”

“조용히 하래도?”

“어딜 가는 건데?”

“네가 그렇게 있다간 사람이 모일 것 같으니, 얼른 자리를 뜨려는 거지. 잘못해서 아빠, 아니 공작님께 걸렸다간 죽은 목숨이거든.”

“공작……? 네 아빠가 공작이야?”

소년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못 들은 걸로 해.”

“이미 들었는데?”

“멍청한 게 눈치도 없네.”

여덟 살에 즉사 따위의 단어를 쓰는 네가 훨씬 이상한 거라고, 난 멍청한 게 아니라고 데반은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아쉬운 건 그였으니까.

다시 발걸음을 떼는 소년을 데반은 급하게 붙잡았다.

“도, 도와줘.”

소년은 무감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햇빛이 비추자 평범한 갈색 머리가 밝게 빛났다.

“내가 왜?”

“그건…….”

데반은 작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소년은 동정심 따윈 없어 보였다.

구구절절한 제 사정을 말해봤자, 저 무감한 얼굴에 다른 표정이 떠오르는 일은 없으리라.

비록 방금 전 멍청하고 눈치 없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는 정말로 멍청하고 눈치가 없진 않았다.

따지자면 그 나이에 비해 두뇌 회전이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데반은, 대신 소년의 마음이 동할 만한 말을 꺼냈다.

어떻게든 소년을 붙잡아 둬야 했다.

“……내 아빠는 황제야.”

소년의 눈이 약간 커졌다.

“아하, 그 붉은 눈의 황자가 바로 너구나?”

그는 데반의 신분을 알고도 공대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네가 황자인 게 내가 너를 도와야 하는 이유가 되나? 더군다나 넌 그 붉은 눈의 황자잖아.”

‘그’에 유난히 힘을 주며, 소년은 어쩐지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재미없는 일에 시간을 버리는 걸 제일 싫어해. 지금 여기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고.”

그러니까 재미가 있어야 소년을 붙잡을 수 있다는 건데……. 그 재미가 정말로 놀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당연했다.

데반은 틈날 때마다 집사가 억지로 읽혔던 제왕학이나 군사학 따위를 곱씹었다. 소년이 흥미를 가지는 건 틀림없이 이런 부분일 거라 확신하면서.

“……넌 공작의 아들이지. 그런 애가 시종 하나 없이 이런 곳에 있다는 건 어딘가에서 도망쳤다는 거고.”

계속하라는 듯 소년이 턱짓했다.

“이 근처에서 너 정도 지위를 가진 애가 도망칠만한 곳은…… 황궁일 거야.”

소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정도로는 제 발을 붙잡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잘못해서 공작에게 걸릴까 봐 무서워한다는 건, 황궁에 지금 공작이 와 있다는 거고. 아마도 황제 폐하를 만나기 위해서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지금은 11월. 각 영지에서 걷은 세금이 적정한지 다시 책정하는 시기야.”

데반은 가물가물 책에서 본 내용을 말하다가, 소년의 표정이 흐려지는 걸 눈치채고 황급히 덧붙였다.

“하, 하지만! 그런 공적인 일에 어린 너를 데리고 오진 않았겠지. 그러니까 아마도 개인적인 일일 거야. 공작이 가족까지 대동하고 황제를 만날 일이라면…… 혼담인가?”

떠보듯 한 말에 소년의 표정이 처음으로 표정을 드러냈다.

그가 얼굴을 구겼고, 데반은 제가 정답을 맞췄다는 걸 깨달았다.

“……구구절절 시끄럽네.”

“넌 혼담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려. 거기에 주인공이 도망치는 걸 봐줄 리도 없고.”

“네가 그걸 맞춘다고 내가 도와준다고 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뭐가 신나서 떠드는 거지?”

“아하, 네 형이구나.”

데반은 방금 전, 소년이 했던 말투를 흉내 내며 씨익 미소 지었다.

소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짓이기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형은 무슨.”

작은 소리였지만 데반은 똑똑히 들었다.

아까 전, 제 아빠를 공작이라고 칭한 것도 그렇고 형을 싫어하는 듯한 이 말투까지.

그는 소년을 붙잡을 방법이 떠올랐다.

“날 도와주면 나도 널 도와줄게!”

“네까짓 게 무슨 수로?”

소년은 다시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아까처럼 자리를 뜨려고 하지는 않았다.

데반은 이것만으로도 가능성을 느꼈다.

“너, 가족이 싫은 거지?”

“…….”

“나도 그래.”

사실은 가족이 날 싫어하는 거지만. 데반은 뒷말을 삼켰다.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냐고 묻잖아. 네가 날 가족에게서 벗어나게 해줄 거야? 붉은 눈의 황자님께서 그럴 힘은 있고?”

쏘아붙이는 소년의 말투에 데반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이 소년을 설득해, 이 담에서 내려가기 위해 해야 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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