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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49화 (49/123)

49화

“제도가 궁금하다고 했잖아.”

‘제가…… 제도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요. 지금껏 한 번도 제도에 온 적이 없거든요.’

나는 처음 황궁에 왔을 때, 아스트릴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했던 그 되도 않는 변명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 말 때문에 일부러 밖을 돌아다닐 생각이라고?

“그건…….”

“알아, 그냥 한 말인 거.”

대수롭지 않은 데반의 태도에 나도 입을 다물었다.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이 유난히 커서 밖을 구경하기 편하다 했더니, 일부러 그런 모양이었다.

소박한 옷을 입은 사람들과 작은 마차가 바쁘게 거리를 지나다녔다.

누군가는 종이 뭉치를 곳곳에 뿌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 종이를 주웠다.

가판대는 여러 가지 과일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집어 계산했다.

뻔하디 뻔한 풍경이었지만 이 세계에 환생하고 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풍경이기도 했다.

“신기한가?”

“뭐, 조금. 제도에 오는 건 정말로 처음이거든요. 백작령을…… 아니, 백작가를 나와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요.”

“나도 많이 나와 본 건 아냐.”

“전하는 왜요?”

나야 디에고 백작의 감금 때문에 그렇다 쳐도, 데반은 대체 왜일까.

얼마 전 펠로스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로 그는 저주에 걸리기 전에도 차별받고 자란 걸지도 몰랐다.

“……글쎄.”

데반이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쉽게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를테면, 오래전 제도로 오던 마차 안에서 과거 이야기를 했을 때 지었던 표정과 비슷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혹은 끔찍해하는 듯한 표정.

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펠로스에게 말한 대로 어디까지나 그가 이야기하고 싶어질 때 들으면 됐다.

나도 그에게 말하지 못한,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잔뜩 있으니까.

이를 테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든가, 당신을 이용해 죽음을 피했다든가, 여주인공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고 있다든가…… 그런 것들.

“내가―”

침묵을 깨고 그가 막 말을 꺼냈을 때였다.

창문 밖으로 한 남자아이가 보였다.

열 살이나 됐을까. 어쩌면 다섯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기도 했다.

검은 머리칼에 붉은빛 눈동자를 가진 그 아이는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쥐었다.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처럼.

“……에블린?”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내가 이상한 건지 그가 다시 날 불렀다.

그럼에도 난 창밖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상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아이가 천천히 우리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게…… 데이지 꽃이었다. 데이지 꽃, 데이지 꽃이라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블린!”

“마차를 세워줘요!”

급하게 마차를 멈추고 벌컥 문을 열었다.

아이는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었고, 그를 향해 한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커다란 운송용 마차였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그 마차는, 아이가 보이지 않는 건지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흡― 날카롭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대로라면 아이가 마차에 치일 것이다.

그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려는데, 데반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아이가, 아이가…….”

다시 아이 쪽을 바라봤다.

아이가 미소 지었다. 입꼬리가 기괴할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미소였다.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설마…….

<“조심하는 게 좋아.”>

아이는 입을 벌리지 않았으나, 목소리는 나에게 전해졌다.

밖이 아니라 몸 안에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눈을 크게 떴다.

아이를 향해 달려오는 마차는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아이와 고작 몇 미터도 남지 않았다.

어째서 아무도 말리지 않지? 저 마부는 아이가 보이지 않나? 아이는 왜 나를 보고 웃지? 왜 저런 미소를 짓지?

저 아이는, 누구지?

쾅― 굉음이 들림과 동시에 질끈 눈을 감았다. 따듯한 품이 느껴졌다.

“에블린, 괜찮나?”

데반의 목소리였다.

가물가물 눈을 떴다. 어느새 그가 날 껴안고 있었다.

“아이가, 죽었나요?”

“뭐?”

“아이가…….”

떨리는 손으로 데반을 밀어냈다.

어느새 마차가 멈춰 서있었다.

마부는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사람을 죽였는데 짜증스러운 표정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몇 번이고 발이 꺾일 것 같은 걸 겨우 참은 채 천천히 걸었다.

“에블린,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데반이 내 뒤를 서둘러 쫓아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향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미친 것처럼 몸을 떨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아니, 눈앞에서 아이가 죽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에이, 장사 공쳤네. 이거 어떡할 거요?”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거 길가에 꽃바구니를 세워두면 어쩝니까?”

“길가라니. 엄연히 우리 가게 앞이지!”

뭐?

이상했다. 번뜩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어디에도 피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사체도.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거리에 흩뿌려지듯 떨어진 새하얀 꽃뿐이었다.

데이지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꽃.

“아이, 아이는…….”

데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떨리는 내 눈동자와 겨우 시선을 맞추며, 그가 말했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에블린, 아이 같은 건 없어.”

*

떨리는 몸을 하고서도, 연회장엔 가야 했다. 오늘은 데뷔탕트였고 난 주인공이었으니까.

마차에 다시 올라타 황궁으로 향하는 동안 데반은 쉴 새 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몸이 안 좋은 거냐, 무슨 일이냐 묻다가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고 하자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 그 기괴한 웃음, 데이지 꽃. 그런 것들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우리는 황궁 밖에서 데뷔탕트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반의 말대로 나는 주인공이었으니,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야 했다.

황궁 밖을 가득 메운 마차가 모두 사라지고 마침내 우리의 차례였다.

“……얼굴이 많이 창백한데. 원한다면 춤은 생략하고―”

“아니에요. 춰야죠.”

난 이미 밑지는 게 많았다.

데뷔탕트를 치러야 할 나이가 훌쩍 지났다는 것도 그랬고, 이 년 동안 실종됐다는 것도 그랬다.

거기에 굳이 하나를 더 추가할 생각은 없었다.

한 손은 데반의 손을 잡고, 한 손은 드레스 자락을 잡은 채 난 똑바로 걷기 위해 노력했다.

그 아이의 미소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자꾸만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하필 데이지야? 왜 하필 나에게만 모습을 보이는 거니? 도대체 누구기에? 왜, 도대체 왜 나야.

박수소리가 홀을 울리고 웅장한 음악이 귓가를 메웠다.

어느새 계단을 다 내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온통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과 예복을 차려 입은 남자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데반을 한 번 봤다가, 나를 한 번 봤다가, 다시 데반을 한 번 봤다. 전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그들의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아! 저 사람이 그 저주 받았다는 황족이구나! 저 옆의 여자는 실종됐다는 레이디 디에고가 아닌가! 이런! 황족의 저주를 푼 게 저 레이디군!’

얼마 전 펠로스가 말한 그대로일 테니까.

우리는 홀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연회장에 있자니 방금 전 겪은 일이 꿈만 같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얼마 안 가 노래가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데뷔탕트는 주인공이 먼저 춤을 춰야만 본격적인 막이 열렸다.

즉, 이제 우리가 춤을 출 시간이었다.

데반이 한 쪽 손으로 내 허리를 부드럽게 껴안았고, 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억지로라도 웃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겨우 그와 눈을 맞췄는데, 데반은 그저 무심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흘러나오는 선율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한 발짝,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가까워졌다.

휙― 내 허리를 바짝 껴안고는 데반이 속삭였다.

“굳이 미소 지을 필욘 없어.”

빙글, 한 바퀴 돌고 다시 그에게 다가와 허리를 꺾으며 말했다.

“굳이 밉보일 이유도 없죠.”

한 발짝, 한 발짝 다시 스텝을 밟았다.

노래가 점점 느려졌고, 우리는 어느새 완전히 붙어 있었다.

“웃는다고 미워하지 않는 자들이면 좋을 텐데, 그러질 않아서 말이야.”

“경험담인가요?”

데반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그 탓에 그의 발을 밟을 뻔한 내가 어정쩡하게 발을 딛자, 데반이 서둘러 내 허리를 단단하게 옭아맸다.

이번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아이요. 아니, 그…… 그거요.”

“그래.”

우리는 느릿하게 한 바퀴 돌았다.

경탄 어린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들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려나.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쏟아내듯 말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어요. 다섯 살은 넘어 보였고 열 살은 안 돼 보였고요.”

그는 말없이 내 허리에서 손을 떼 나를 빙글 돌렸다.

데반과 떨어져, 정 반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세였다.

다시 돌아볼 때 그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홱― 그가 날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꼭 입술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데반의 붉은 눈동자와 그 안에 일렁이는 검은 형태가 너무 또렷하게 보였다.

데반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가 무언가 더 물으려고 할 때―

짝, 짝짝.

박수소리가 홀을 울렸다.

어느새 노래는 멈춰있었다.

천천히 데반과 거리를 벌리고 빳빳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데반이 강하게 내 손을 잡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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