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누구 맘대로?”
“네?”
“너는 대공비다. 그런 게 허용될 것 같은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불과 몇 시간 전, 점심을 먹을 때만 해도 데뷔탕트에 갈지 안 갈지도 모른다고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아까는 분명…….”
“아까 뭐? 네 파트너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기억을 곱씹어봤다.
그는 분명, 데뷔탕트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보통 데뷔탕트의 파트너는 아버지라든가 남자 형제라고도 했고.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론, 적어도 그가 대놓고 파트너를 거절한 적은 없었다.
그래. 거절한 적은 없지만, 그렇지만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물어본 적…… 없었지 않나?”
접시에 시선을 꽂은 채, 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다.
설마……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펠로스를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꼭 나를 부추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데반.”
내 부름에도 데반은 접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로 내가 물어봐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저 싸늘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전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 역시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겠지. 우리는 어디까지나 계약관계로 이루어진 부부였으니까.
거기에 어차피 나에겐 데뷔탕트 파트너가 필요하고, 가장 최선의 선택은 데반이 아닌가.
모든 소문을 잠재우고 편히 사교계에 데뷔할 기회였다.
언젠가 킬리언에게 파트너를 청했던 그 소녀를 떠올리며, 나는 마침내 물었다.
“데반, 제……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어주실래요?”
데반의 시선이 비로소 나에게 와 닿았다. 핏빛 눈동자나 날카롭게 솟은 콧대는 여전히 깜짝 놀랄 만큼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그러나 그의 입꼬리는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애써서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내가 미친 건가? 그 모습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황당하게도.
저런 사내가 귀엽다고?
물론 그는 굉장히 잘생겼지만, 귀엽다고 느낄 구석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성격은 더했다.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모든 말이 명령조였다.
귀엽기는커녕 다정한 소리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귀엽다고?
나는 어느새 시선을 거두고 식사를 이어나가는 데반을 멍하니 바라봤다.
“푸, 푸하하하!”
그 순간. 펠로스가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거의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죠?”
“하하, 아니, 아닙니다.”
펠로스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할 말도 다 했고 할 일도 다 끝냈으니까요.”
“할 말을 하다뇨? 할 일은 또 뭐고요.”
눈매를 치켜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펠로스는 그저 빙그레 미소 지을 뿐이었다.
“할 말은 아까 데반에게 했고, 할 일은 방금 끝낸 것 같습니다.”
순간 얼굴이 약간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펠로스는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우리가 서로 망설이고 있었다는 것을.
“두 분의 결혼이 뭐랄까, 평범하지 않은 건 맞지만…….”
그가 정중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홀을 나서기 직전 빙글 돌더니 모두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꽤나 잘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군요.”
우아하게 인사하곤 펠로스는 빠르게 사라졌다.
*
“아, 아.”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하얀색의 우아한 드레스에는 가까이에서 봐야만 알 수 있는 디테일이 가득했다.
수백 가지나 되는 원단을 하나하나 확인해서 고른 보람이 있었다.
온통 하얀 드레스뿐인 연회장에서 이보다 고급스러운 원단은 없으리라.
“정말 잘 어울리세요, 아가씨.”
시녀가 환하게 웃으며 손뼉 쳤다.
그녀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고, 우리는 빈 말을 할 만큼 가깝지 않았으니 저 말은 진실일 것이다.
난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머리만 금방 매만져드릴게요.”
날 의자에 앉힌 시녀가 머리를 빗어주기 시작했다.
고불거리는 금발을 자연스럽게 늘어트리고, 중간 중간 꽃과 진주로 장식했다.
고급스러우면서 과하지 않아 좋았다.
귀걸이도 목걸이도 모두 최고급 진주였고, 다른 보석은 사용하지 않았다.
“조금 더 화려한 장신구를 고르시지.”
시녀가 못내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면 됐어.”
“하긴, 아가씨는 워낙 아름다우시니까요. 연회장에서도 가장 주목 받으실 거예요.”
반짝거리는 시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이 바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로 그 데뷔탕트였다.
아마 내가 아름답지 않아도 주목은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년 간의 실종과 갑작스러운 결혼.
이것만으로도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데 저주를 푼 대공과 함께라니.
대공 저에 세기의 사랑으로 부풀려져 버린 우리 이야기를 생각하자 더욱 한숨이 나왔다.
어쩌면 제도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는 편이 다른 의심에서 벗어나긴 좋겠지만.
가령 신전을 물리치러 왔다든가, 흑마법에 대해 조사하러 왔다든가. 그런 의심을 받으면 곤란했으니까.
“마차를 별궁 밖에 대기시켜뒀어요.”
“……그래.”
데뷔탕트는 대대로 황궁에서 이루어졌고, 별궁에서 황궁은 걸어서 고작 걸어서 몇 분이었다.
산책삼아 가기에도 충분했으나, 모든 영애들이 마차를 타고 입장하는 게 관례였으니 별 수 없었다.
“황궁의 인장이 커다랗게 박혀 있으니, 아마 연회장에 입장하기도 전부터 주목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드레스를 입느라 약간 들떴던 마음이 금세 무거워졌다. 목을 옥죄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부담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아, 그리고 대공 전하께서는 이미 준비를 마치셨다고 들었어요. 마차에 미리 타 계실 것 같아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별궁 바로 앞에 마차가 서 있었다. 대공 저에서 제도로 올 때 탔던 것보다도 더 커다란 마차였다.
하얀색 바탕에 황금빛 무늬가 여기 저기 들어가 있었고, 시녀의 말대로 황궁의 인장이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조금 과할 정도로 화려한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시녀의 말과는 달리 데반은 마차 안이 아닌, 앞에 서 있었다.
무심코 그쪽으로 걸어가려다, 주춤거렸다.
대공 저에서 그는 스스로를 꾸미고 다니지 않았었다. 그저 어두운 제복, 어두운 로브. 온통 어두운 것들이 전부였다.
그런 그가 제도에 오고부턴 종종 밝은 옷을 입었다.
조금은 화려한 망토를 두르기도 했고, 황금으로 번쩍이는 견장이 달린 예복에 가까운 제복을 입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안대가 사라졌기 때문인지, 전에는 가까이 다가가야 눈치챌 수 있었던 범상치 않은 외모가 요새는 먼발치에서도 돋보였다.
난 그의 미모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이 돼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의 데반은 조금 곤란할 정도였다.
그 이유가 뭘까, 난 멍하니 서서 그를 위아래로 살펴보다 아, 하고 작게 입을 벌렸다.
그의 이마를 가리고 있던 검은 머리칼이 반 정도 뒤로 넘겨져 있었다.
그 탓에 움푹 들어가 있는 눈매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콧대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오지 않고 뭐 하는 거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탓에 고정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옆으로 흘려 내려갔고 그게 너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그냥…… 구두가 불편해서 그런가 봐요.”
대충 변명하고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구두가? 미리 몇 번이고 확인하라 명 했을 텐데.”
그의 시선이 시녀에게 향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는 걸 들킨 것 같아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됐으니까 얼른 가요.”
시녀에게로 향했던 데반의 시선이 빠르게 마차 안에 자리 잡고 앉은 내 쪽으로 향했다.
“너…….”
그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것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구두가 불편하다고 툴툴대서 언짢은 걸까.
시선을 피하자, 낮게 한숨을 한 번 쉰 그가 훌쩍 마차에 올라탔다.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전에 탔던 것처럼 마법이 걸린 건지 거의 흔들리지 않고 편안했다. 고작 몇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가는데 이런 사치라니.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래봐야 다 아는 풍경…… 이 아니었다.
응?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거, 이거 어디로 가는 거예요?”
데반을 퍼뜩 바라보며 물어봤지만, 그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황궁에 가는 거 맞아요? 별궁에서 황궁으로 갈 뿐인데 왜 제가 모르는 곳이 보이죠?”
창밖은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으로 가득했다.
“여기 설마, 황성 밖인가요?”
“데뷔탕트가 언제부터 시작하는지 알고 있나?”
시녀가 뭐라고 했더라, 떠올려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나고 준비하라고 해서 준비했다. 생각해보니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시간이 남나요?”
데반이 픽, 웃었다.
“본래 지금쯤 출발하는 게 맞긴 하지. 다만……. 우리는 황궁 바로 옆에 살고, 더군다나 넌 연회의 주인공이니까.”
주인공이라니. 부끄러운 호칭이었지만 부정할 순 없었다.
데뷔탕트는 본래 그 해의 주인공을 뽑는다. 뽑힌 사람은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연회가 시작하기 전 모두의 앞에서 춤춰야 했다.
그리고 올해의 주인공은 나였는데, 말하자면 아스트릴라의 독단이었다.
“주인공이니까 더 일찍 가야 하는 것 아녜요?”
“재미없잖아.”
데반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뭘 하겠다는 건데요?”
“그저 밖을 조금 돌아보자는 거지.”
“밖이요?”
“제도가 궁금하다고 했잖아.”
제도가 궁금하다고? 누가?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다, 문득 처음 황궁에 왔던 날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