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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47화 (47/123)

47화

나는 멍하니 창가를 바라봤다.

작은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고, 먼지가 날리는 게 보였다.

황궁 도서관까지 와서 조사했는데 알아낸 게 고작 대신관들이 조직적으로 사기를 쳤다는 것뿐이라니.

이래서야 제도에 온 이유가 있으려나.

아니, 내겐 사교회가 있었다. 가끔은 입증되지 않은 이야기가 더 진실에 가까울 때도 있는 법이었다.

이처럼 권위자들이 개입돼있는 문제는 더 했고. 그러니 사교회에서……. 사교회?

“데뷔탕트!”

돌연 소리치자 펠로스가 놀란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펠로스!”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레이디?”

펠로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잡힌 손을 빼려 했다.

“저……. 저도 레이디가 싫은 건 아닙니다만, 저는 데반과 척을 지고 싶지 않은데요?”

“……네?”

그가 몸을 뒤로 물렸다.

“거기에 신관은 결혼을 못합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아무래도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여성과의 접촉도 극도로 자제해야 하니 이런 식의 스킨십은―”

“전에 시녀한테는 손등에 키스도 했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언제부터입니까, 역시 제 얼굴 때문입니까? 어쩐지 아까 칭찬이 심상치 않더니…….”

“그런 거 아니니까 그만해요.”

“그런 게 아니라면 뭡니까? 이 순진한 신관의 손을 잡을 이유가?”

눈을 빛내며 씩 웃었다.

이걸로 어려운 용기를 낼 필요도, 데반에게 굽히고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제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어주세요.”

*

어떤 방법인진 몰라도 펠로스는 나보다도 빨리 도서관에서 탈출했다.

본디 어딘가에 잠입하는 건 어려워도 다시 나오는 건 그보다 쉬운 법이라고, 그는 자랑하듯 떠벌렸다.

우린 도서관 밖에서 만나, 별궁까지 가기 위해 정원을 거닐었다.

전담 시녀가 뒤에 딱 붙어 따라오고 있어, 난 그를 위보우 경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때요?”

“뭐가 말입니까?”

“제 데뷔탕트 파트너요.”

그는 자꾸만 대답을 피하고 있었다.

“그게…….”

“펠…… 아니, 위보우 경이 마지막이에요. 더는 물을 사람이 없다고요.”

“하지만…….”

곤란한 표정으로 내 뒤의 시녀를 눈짓하던 그가 작게 속삭였다.

“신관이 어찌 사교회에 드나든답니까.”

“왜 못해요! 그런 법은 없잖아요.”

“법…… 은 없지만…….”

펠로스가 제 볼을 긁적였다.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른 분들이 레이디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적어도 저 혼자 가는 것보단 낫겠죠.”

“레이디, 데반 놈과 싸운 거라면 부디 빨리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뭐라구요?”

“그 녀석이 본래 말버릇이 험하고, 성격이 안 좋고, 인상도 사납지만 나쁜 녀석은 아닐 겁니다. 아마도요.”

“…칭찬하는 거 맞죠?”

“음. 아마도요?”

“데반과 싸운 건 아니에요.”

“예?”

“뭘 그렇게 놀라요?”

“대공비라는 걸 알리기 위한 사교계 데뷔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요?”

“그런데 데반과 싸운 게 아니라면 왜 함께 가지 않으시는 거죠?”

크흠, 난 헛기침하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신전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내 물음에 펠로스가 눈을 꿈뻑거렸다.

“대답을 피하시는군요?”

“……무슨 대답이 듣고 싶으신데요.”

“그저 굳이 쉬운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시는 이유가 궁금해서 말입니다. 설마 데뷔탕트에서 모든 사람에게 사정을 구구절절 밝히려는 겁니까?”

“그게 어때서요?”

“옆에 데반을 끼고 가기만 하면 모든 게 한 번에 해결될 텐데요. 아! 저 사람이 그 저주받았다는 황족이구나! 저 옆의 여자는 실종됐다는 레이디 디에고가 아닌가! 이런! 황족의 저주를 푼 게 저 레이디군! ……뭐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펠로스가 무감한 표정과는 달리 연극이라도 하는 듯한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난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지만, 실상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데반 없이 혼자 간다면, 혹은 펠로스를 데리고 간다면 모든 사람에게 하나하나 사정을 말해야 하리라.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게 될 가능성도 많았고. 어디든 뒷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었으니까.

“레이디라고 이런 사실을 모르시진 않으실 텐데요.”

“…….”

“데반이 싫으십니까? 두 분 결혼은…… 흠. 평범해 보이진 않았지만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면 다시 상의해보세요. 아마 그 녀석도 그걸 원하고 있을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를 흘겨봤다. 어느새 별궁 앞이었다.

자연스럽게 함께 궁 안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의아해 물었다.

“정말 신전으로 안 돌아가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내쫓으시려는 겁니까? 매정하기도 하셔라.”

펠로스가 앞장섰다. 별궁의 지리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는 발걸음이었다.

“많이 와보셨나 봐요?”

“어릴 때에도 데반이 여기 살았거든요. 그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지만요.”

“어릴 때도요?”

그건 그가 저주에 걸리기 전의 일일 테다.

저주에 걸린 후 곧바로 대공 저로 쫓겨나듯 떠났으니까.

저주에 걸리기 전이라면, 그가 황태자가 될 가능성도 충분했을 텐데 별궁에 살았다고?

“혹시 황태녀 전하도 이곳에 사셨나요?”

“대놓고 물으셔도 됩니다.”

“……데반이 차별받은 건가요? 왜요? 분명 자격 시험을 보기 전엔 동등한 위치가 아니었나요?”

“음. 거기엔 여러 이유가 있죠.”

그의 엄마.

문득 원작에서 봤던 그의 과거가 기억났다.

데반의 엄마는 그를 낳고 죽었다.

그 후 들어온 새로운 황후가 지금의 황후이자, 황태녀 아스트릴라의 엄마였다.

“핏줄 때문인가요?”

“으음…….”

펠로스는 답을 피한다기보단 정말로 고민되는 듯 망설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펠로스를 앞질러 걸었다.

“아니, 됐어요.”

“됐다뇨?”

“안 알려줘도 된다고요.”

“궁금하신 거 아닙니까?”

당연히 궁금했다. 그러니까 물어본 거였고. 하지만 어쩐지, 펠로스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본래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난 여전히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으니까. 내 존재와 탄생, 지독한 운명까지도.’

제도로 오는 마차 안에서 데반이 해줬던 그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데반이 나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속마음을 이런 식으로 배신하고 싶진 않았다.

“궁금하면 데반에게 직접 물어보죠, 뭐.”

“알려주지 않을 텐데요.”

“그러니까요. 당사자가 알려주기 싫은 이야기를 타인에게 듣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호오.”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오신 건진 모르겠지만, 차라도 한 잔 하고 계세요. 전 그 먼지 구덩이에서 묻은 걸 좀 닦아야겠네요.”

인상을 구기며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치맛자락에 더러운 것들이 가득 묻어 있었다.

펠로스가 물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데반이 내려올까요?”

시간을 확인해보니 곧 저녁이었다.

“식사하러 내려올 거예요. 온 김에 함께 식사도 하시든가요.”

“그것도 좋겠군요. 신전의 과도하게 신선한 음식들에 질려 있던 참이었습니다!”

펠로스가 홀로 향했다. 집사가 시중드는 걸 확인하고, 난 방으로 올라갔다.

*

데반과 나, 펠로스가 함께 앉은 식사 자리는 어딘가 어색했다.

식당엔 말 한마디 없이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가득했다.

분명 난 데반과도 어색하지 않고, 펠로스와도 어색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문제는 그 둘 사이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저, 두 분은 어쩌다 친해지게 되신 거예요?”

분위기를 해소해보려는 내 질문에 데반이 펠로스를 싸늘하게 바라봤다.

“별로.”

뭐가 별로라는 건지. 내가 한 질문은 별로라고 대답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데반에게 답을 듣길 포기하고 펠로스를 홱 바라봤다. 그는 그저 허허, 웃고 말았다.

“……카렌 경도 부를까요? 세 분이서 친구니까요.”

“지독하군.”

“네?”

데반이 물 잔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놨다.

“이 녀석만으로도 족한데 하나를 더 데려올 셈인가?”

허허, 하고 펠로스가 한 번 더 웃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뭐가.”

“제가 내려오기 전에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나요?”

데반이 시선을 내리깔더니 대답 없이 고기를 썰었다.

하하하, 조금 더 명랑하게 펠로스가 웃었다.

“펠로스.”

“예, 레이디.”

“데반이 뭐라고 했나요?”

“음……. 분명 아까 레이디께선, 당사자가 알려주지 않는 말을 타인에게 듣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거랑 이건 좀 다르죠!”

“전 파렴치한이 되고 싶지 않아서요. 이미 레이디의 머릿속에 제 이미지가 바닥까지 추락한 것 같으니.”

그를 노려보며 고기를 썰었다.

나이프가 접시에 닿으며 끼긱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자, 데반이 티 나게 인상을 구겼다.

그걸 알면서 난 부러 마찰음을 냈다.

차라리 뭐라고 해줬으면 했다. 그래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깰 수 있다면.

하지만 데반은 이내 내게서 시선을 떼고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레이디.”

펠로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난 약간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왜요.”

“데뷔탕트는―”

“쿨럭.”

기침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데반이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물을 마시지?”

펠로스가 슥― 잔을 건넸다.

데반은 그를 한 번 노려보더니, 성의를 무시한 채 제 몫의 물을 마셨다.

난 둘을 번갈아 바라봤다.

펠로스에게선 장난기가 엿보였고, 데반은 짜증스러워 보였다.

이건 그러니까 마치…… 펠로스가 그를 놀리는 것 같았다. 놀리다니 대체 뭘? 왜?

……데뷔탕트?

“데반, 혹시 데뷔탕트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가 다시 터지는 기침을 참으며 물잔을 들었다. 펠로스는 이번엔 킥킥대며 웃었다.

“……이야기라니, 무엇을?”

“음…….”

난 그를 한 번 떠보기로 했다.

“실은 펠로스랑 같이 가기로 했거든요, 데뷔탕트.”

“누구 맘대로?”

대꾸하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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