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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46화 (46/123)

46화

이 모든 책의 저자가 역대 대신관이라니.

내 황당한 표정엔 신경도 쓰지 않고 펠로스는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내가 읽는 것보단 그가 요약해주는 게 훨씬 경제적일 것 같아, 나는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다.

“어때요?”

내 물음에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신력의 근원은 위대한 신이시며, 흑마법의 근원은 천하고 악랄한 악마다. 그러니 절대로 흑마법을 사용해선 안 된다. 뭐 그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뿐이죠.”

“다음 것도 읽어봐요.”

『태초의 흑마법』

개중 가장 내용이 짐작 가지 않는 책이었다.

펠로스가 책을 집어 들자 난 재빨리 주위를 둘러봤다.

『그 도시에 수만 명이 사라진 이유』 이건 누가 봐도 흑마법이 위험하다는 내용 같았고, 『마법 개론』 이건 지루해 보였고, 『흑마법 실습』 이건…… 꽤 흥미로워 보였다.

그렇게 책 몇 권을 뽑아 펠로스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쿵 내려뒀다. 그가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 절 이용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이 정도는 이용해줘도 되죠. 불만이라면 당장 나가 근위대를 불러오고요. 하펠이라고 했던가요, 그 병사 이름이?”

그가 말없이 책에 코를 박았다.

잘된 일이었다. 내가 읽으려면 몇 시간씩은 걸렸을 테니.

난 무거워 보이는 그의 갑옷을 바라보며,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근데 설마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 황궁에 잠입한 거예요?”

“저도 나름대로 흑마법을 조사하고 있었으니까요. 말했잖습니까. 흑마법에도 관심이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펠로스가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변함없었다.

“하지만 그 정돈 다른 곳에 부탁하면 되잖아요. 아니, 애초에 키베온가라면 대충 들여보내 줄 수도 있고.”

“전 제가 키베온이라 생각하지 않아서요. 그리고 제가 원했던 건…… 이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곳이라니요?”

“이렇게 모두에게 개방된 곳이요.”

“……여긴 황족과 중앙 귀족만이―”

“그 정도면 모두죠.”

탁― 그가 책 하나를 덮더니 그 옆의 것을 집어 들었다.

“그럼 달리 더 비밀스러운 곳이 있단 건가요?”

“뻔하지 않습니까. 지금껏 흑마법에 의문을 가진 사람이 한 둘이었겠습니까? 여긴 그런 사람들의 호기심을 해소해줄 가짜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여기 들어오기도 꽤나 힘들었다고요. 사서도 탐탁지 않아 했고……. 정말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행동했는데.”

“본래 애써서 들어온 곳일수록 진위를 의심하기 힘든 법이죠. 길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보석보단, 겹겹이 숨겨둔 보석이 더욱 귀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서는 그저 황궁에 고용된 몸인데 뭘 알겠습니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서 더욱 짜증 났다.

아스트릴라의 직인을 가져오길 잘했다고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가짜일 뿐이라니.

“그럼 진짜는 어디에 있는데요? 흑마법에 대한 진짜 자료가 묻혀 있는 곳이요. 갑옷까지 입고 황궁에 잠입했으니, 이 안에 있다는 거잖아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는 것 같더군요. 제 생각보다 더 신전과 대신관이 황궁을 믿지 않는 걸지도 모르지요.”

“확신도 없으면서 잠입을 했다고요?”

“겸사겸사 입니다.”

“친구 사칭까지 해가면서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댁이 손등에 키스한 시녀가 제 전담이 됐거든요.”

“유감이네요.”

“어떻게 하신 거죠?”

“뭘 말입니까?”

이미 알고 있으면서, 펠로스는 뻔뻔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위보우가의 사칭 말이에요. 황궁의 문지기는 제 시녀처럼 댁의 화려한 외모와 언변에 속지 않았을 텐데요.”

“레이디에게 칭찬을 듣다니, 묘한 기분이군요.”

쉽게 대답해줄 마음이 없는 듯, 펠로스는 말을 돌렸다.

“말해 봐요. 그 갑옷 하나로 위보우가를 어떻게 사칭한 거죠?”

“갑옷 하나로 믿진 않겠죠.”

어느새 내 신경은 흑마법에서 그의 사칭 건으로 넘어가 있었다.

펠로스를 빤히 바라봤다. 방법을 알려 주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마침내 그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품속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꽤 정성스럽게 세공된 고급품으로 보였다.

“이게 뭔데요?”

“위보우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같은 거라고 할까요?”

“네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화들짝 놀라 떼어냈다.

“그런 걸 왜 당신이 가지고 있죠?”

“정확히는 가품이지만요.”

그 말에 다시 홱― 단도를 가져가 살폈다. 가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했다.

“이게 가품이라고요?”

“음……. 그러니까 원래 가보라는 게 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 아닙니까. 금전적 가치는 제쳐두고서라도 가문의 명예와 역사가 담긴 것이니까요.”

“그런 가보로 사칭 중인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보통의 가문들은 가보를 두 개, 심하면 그 이상으로 준비합니다.”

“일부러 가품을 만들어서 도난을 방지한다?”

“아까 말한 것과 같은 이치죠. 사람들은 호기심이 그럴듯하게 충족되면 그 이상을 살피지 않거든요.”

이 장소처럼, 가보도 부러 가짜를 준비해둔다는 거구나.

펠로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질도 진품과 거의 흡사할 정도로 좋고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가져왔는데요? 어쨌든 위보우가의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에는 변함없잖아요.”

“뭐…….”

그가 탁― 책 한 권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피했다.

“정말 훔쳤어요?”

“설마요! 레이디는 제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좀 그렇긴 하죠.”

“오해십니다. 이건 카렌 녀석에게 직접 받은 겁니다.”

“……무엇을 대가로요?”

카렌이 아무리 멍청하다 한들 선물이랍시고 제 가문 가보를 줄 사람은 아니었고, 펠로스는…… 준다면 덥석 받을 사람이긴 했다.

“제가 내기에서 이겼거든요.”

“무슨 내기요?”

검술 시합이나 하다못해 체스 내기라도 되길 바라며 그를 빤히 바라봤다.

펠로스가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살짝 내밀었다.

“와인 대작입니다.”

와인으로 가보를 넘기다니. 아까의 말을 취소해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카렌은 멍청했다.

“무려 엘리운에서 만든 와인이었죠. 그 지방엔 사계절 내내 눈이 내리는데, 한 번 얼었다가 녹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그 맛이―”

“저기요.”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신관 주제에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모양인지, 펠로스의 표정이 약간 상기돼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이 단도로 위보우가를 사칭하셨다는 거군요.”

“사칭이랄까. 잠깐 빌린 거죠. 그렇게 제가 범죄자라도 되는 것처럼 보시면 섭섭한데요.”

범죄자가 맞았기에, 난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펠로스가 마지막 책을 탁― 덮었다.

“다 읽었습니다.”

“어때요?”

“범죄자 취급당하는 기분이요?”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장난입니다. 뭐……. 뻔한 이야기군요. 세간에 알려진 것과 그다지 다른 건 없습니다.”

“태초의 흑마법은요? 그건 좀 궁금하던데.”

“딱히 다른 건 없었습니다.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던데요. 태초에 업보를 쌓은 인간이 악마와 계약해 큰 힘을 가지게 됐고, 끝내 파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교훈적인 내용이네요. 식상하게도요.”

“다만 두 가지, 궁금한 점이 있긴 합니다.”

“뭔데요?”

서둘러 몸을 낮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펠로스는 머리가 좋았고, 저런 황당한 책들 사이에서도 뭔가 단서를 찾았을지도 몰랐다.

“왜 흑마법을 악마와의 계약으로 규정했을까요. 그리고 왜 마법이라고 이름 붙였죠?”

“……그냥 안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악마라고 하면 어감부터 별로잖아요.”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면, 신과 대적할만한 어떤 존재가 있다고 인정하는 꼴이 아닙니까.”

하긴, 신의 권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선 그 존재가 유일무이하다고 믿게 만드는 편이 좋을 테다.

“왜 그랬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흑마법이, 그러니까 그 힘이 신력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 강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신력보다 강하다고요?”

“그렇지 않다면 그저 하등하고 열등한 힘으로 설명했겠죠. 굳이 악마라는 무시무시한 존재를 만들어 공포감을 조성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차마 하등하다고 서술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렇습니다. 신과 대조되는 악마가 존재한다. 그 소린 신력과 흑마법이 최소한 대등하다는 반증이죠. 비록, 이 책들에선 모두 신이 이기지만요.”

“그럼 마법은요? 궁금한 점은 두 가지였잖아요. 왜 마법이라고 이름 붙인 거죠?”

“그건…….”

그에게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요?”

“짐작이 가질 않는군요. 마력을 감지하는 사람이 직접 흑마법을 마주한다면 그게 마법이 아니라는 걸 금세 눈치챌 겁니다.”

“그렇게 금방 들킬 거짓말을…….”

“제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그 부분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흑마법을 직접 마주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 걸까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답지 않게 허술한 건 확실합니다. 다른 것들은 굉장히 잘 짜 맞춰져 있거든요. 악마와 계약, 발동 조건과 그 대가까지.”

“사람들이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요.”

마주 보고 앉은 우린 서로 테이블에 턱을 괴고 고민했다.

“굳이 마법이라 이름 붙인 이유……. 거기에 단서가 있을까요?”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단언할 수 있는 건 없군요.”

도대체 뭘까.

신전은 왜 흑마법을 사용하고, 이토록 강하게 흑마법이 악마와 계약한 부정한 힘이라는 걸 강조했을까.

그것도 대신관들이 연달아 책을 쓰면서까지.

이 서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서의 저자는 모두 역대 대신관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유명세를 날린 신관이거나, 마법사였고. 어렵지 않게 그들이 서로 긴밀한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이건 대대적인 조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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