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의자에서 풀썩거리며 먼지가 날렸다. 서둘러 작은 창문을 열었다.
이 먼지 구덩이에서 책을 몇 권이나 봐야 할까, 본다고 뭘 알아낼 순 있을까?
가져가서 찬찬히 읽고 싶지만, 눈을 부라리던 사서를 떠올리면 빌려 가는 게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많은 책을 읽어야 했다.
“후…….”
기합을 넣듯 심호흡하고 자리에 앉아 첫 번째 책을 넘겼다.
『흑마법의 이론과 실재』
이 저서는 아직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흑마법에 대해 정의내리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필자는 오랜 세월 흑마법을 연구하는 데 매진했으며, 그 결과 이에 대해 그럴 듯한 이론을 얻을 수 있었다.
……흑마법은 악마와 계약한 산물이다. 영혼을 판 대가이며 신실한 자라면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할 금기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라 불리는 서쪽의 마탑주 역시 필자와 의견을 같이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게 무슨.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자세히 읽지 않았음에도 대단히 편파적이며…… 멍청한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마지막 문장은 거의 유명세를 이용해 먹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딴 게 책이라고?
대체 어떤 인간이 이딴 책을 썼는지 보기 위해 휙― 첫 장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쿵― 돌연 굉음이 들렸다.
“뭐, 뭐야.”
화들짝 놀라 몸을 떨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방구석에 자리해있었다. 그 앞엔 커다란 책장이 있었는데, 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인 듯했다.
철컥거리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급하게.
누구지? 분명 이곳은 허락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다고 했는데.
설마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도록 조심하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어떤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죄송하지만 저 좀…… 레이디?”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찾아도 보이지 않던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탓이다.
숨을 몰아쉬며 문가에 서 있는 건, 갑옷을 입은 펠로스였다.
“……펠로스?”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펠로스라니. 그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이거 참,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봅니다.”
그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무슨, 대체……. 대체 뭘 하는 거예요!”
갑자기 쳐들어온 것도 모자라 테이블 아래에 숨다니.
“여긴 어떻게 들어왔죠? 황족이나 중앙 귀족만이 들어올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니, 키베온가면 분명 중앙귀족이긴 하지만…….”
집안과 사이가 안 좋다는 그가 굳이 그 이름을 이용했을 것 같진 않았다.
“거기다 그 차림은 뭔데요! 펠로스!”
갑옷을 입은 채 끙끙거리며 테이블에 들어가 몸을 웅크린 펠로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게 다 아가씨를 살리기 위해서니까요.”
“뭐라고요?”
쾅쾅―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설마, 당신을 찾으러 온 거예요?”
“하하하…….”
“펠로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레이디. 제가 저번에 복도에서 도와드렸던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전 사실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말을 하지 못하는 병이 있답니다.”
쾅쾅―
그가 주절거리는 사이 한 번 더 굉음이 들렸다.
“그런 제가 레이디를 위해 그 많은 수의 시녀를 상대했지 않습니까. 레이디!”
펠로스가 두 손을 모으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래봐야 그 좁은 곳에서 제대로 빌 수도 없었지만, 처량해 보이긴 했다.
쾅―
눈을 감고 느리게 숨을 쉬었다.
확실히 저번에 펠로스에게 신세를 지긴 했었다. 고맙기도 했었고.
그렇다고 내가 왜 이딴…….
터무니없는 상황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쩔 수 없지. 디에고 백작가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보여줄 때였다. 나는 문고리를 힘주어 잡았다.
벌컥― 거세게 문을 열자, 복도에 옹기종기 서 있던 병사들이 당황하여 물러났다.
난 짐짓 화가 난 척 팔짱을 끼며 눈을 치켜올렸다.
“무슨 일인데 이토록 소란스러운 거지?”
“그게…….”
병사들이 저들끼리 눈을 맞췄다. 그중 하나가 나와 척― 창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말했다.
“근위대 제 3 보병사단 하펠 크―”
“소개는 됐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네.”
“황궁에 멋대로 침입한 도망자를 쫒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서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스윽― 문가를 가로막았다.
“그건 불가하네. 서고에 아무도 없다는 건 내가 증명하지.”
“……어느 가문의 레이디인 줄은 모르겠지만 그럴 권한은 없으십니다.”
“레이디?”
눈썹을 꿈틀 들어 올렸다.
싸늘한 어조에 병사가 약간 주춤거리는 게 느껴졌다.
“당장 사서에게 가서 내가 누구의 증명을 받고 왔는지 알아보게. 그 후에도, 그토록 불경한 언사를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지.”
사교회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이럴 때는 무조건 세게 나가는 게 답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근거 없는 허세도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나섰던 이가 뒤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말단으로 보이는 병사가 후다닥 복도를 달려 나갔다.
그동안 난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를 죽여 놓기 위함이었다.
순식간에 돌아온 병사가 하펠…… 어쩌고에게 척 경례하더니 속삭였다.
하펠 어쩌고의 눈이 커지더니 그 병사와 날 번갈아 바라봤다.
아스트릴라의 직인을 확인하고 온 게 틀림없었다.
난 보이지 않게 미소 지었다.
황궁 안에서 최고의 권위가 누구냐 한다면 단연코 황제겠지만, 근위대 내에서 최고의 권위가 누구냐 한다면 그건 황태녀였다.
극단적으로 그들은 황태녀가 명한다면 황제의 목까지도 벨 수 있었다. 이들의 직속이 바로 그녀였으니.
“도망자를 찾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아직도 서고를 들어갈 마음이 드는가? 어느 가문의 레이디인 줄 모르는 내가 있는 서고에 말일세.”
하펠 어쩌고가 망설이더니 척― 내게 경례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단순히 절차로 묻는 것입니다만, 서고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게 확실합니까?”
이 정도면 물러날 줄 알았더니 꽤나 강단이 있었다.
“확실하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이젠 채찍 대신 당근을 줄 차례였다.
“수고가 많군. 이 일은 특별히 황태녀 전하께 고하지 않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이 이상 선을 넘었다간 언제든 황태녀에게 일러바칠 수 있단 경고이기도 했다.
하펠은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뒤에 서 있던 병사들도 함께했다.
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봐.”
“……예.”
한 번 더 경례를 하고 나서야, 그들은 우르르 사라졌다.
서둘러 문을 쾅 닫고 잠금쇠를 걸었다.
“후우, 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런 짓을 해본 게 얼마 만인지.
그대로 문에 기대 숨을 고르다가 퍼뜩 고개를 쳐들고 성큼성큼 안쪽으로 향했다.
“펠로스!”
작게 소리치자, 태연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던 그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대체 어느 틈에 테이블 아래에서 기어 나와 앉은 건지.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우린 참 극적인 순간에만 마주치는군요. 이걸로 저번의 빚은 없던 셈 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죠? 그리고 빚은 당신이 졌겠죠. 난 황태녀 전하의 이름까지 팔았다고요!”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레이디를 이곳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요.”
“제가 할 말이에요. 나갈 땐 어떻게 할 거예요!”
“대신관에 대해 조사를 하고 계셨던 겁니까?”
“뭐요?”
미간을 팩 찌푸리자 그가 쌓여 있는 책들을 가리켰다.
누가 봐도 흑마법에 관한 책인데, 대신관이라니?
의아함에 추궁하는 것도 잊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을 돌리기 위해 꺼낸 화제라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낚일 수밖에 없었다.
“대신관이라뇨? 왜 그렇게 생각했죠?”
펠로스가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 적힌 책들, 저자가 모두 역대 대신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뭐라고? 난 입을 떡 벌렸다.
한결같이 가벼운 사내였다.
충격적인 내용을 능청스럽게 전하는 데에는, 아마도 제국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으리라.
*
펠로스는 빙그레 웃으며 테이블에 쌓여 있는 책을 하나씩 훑어봤다.
“흑마법이라. 꽤나 죽기 싫으셨나 봅니다, 레이디?”
“그럼요. 전 누구와 달리 머리를 단두대 아래에 밀어 넣고 살진 않거든요. 갑옷을 입고 황궁에 잠입하는 대신 당당하게 황태녀 전하의 직인을 가지고 왔죠.”
“정당성이라! 부럽습니다. 어디에서든 정당성은 환영받는 법이죠. 저와는 인연이 없는 단어이기도 하고요.”
펠로스가 빠르게 책을 넘겼다.
나는 방금 전, 그가 내뱉은 충격적인 발언을 다시 곱씹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아까 한 이야기요. 이 책의 저자, 그러니까 그윈델라니오 유사브 볼테리아 폰 마르시오텔리오스 17세……가 대신관이라는 소리인가요?”
“예. 설마하니 이름을 모르셨습니까?”
“마르시오텔리오스라는 건 알았어요. 다만 이렇게 작은 글씨로 촘촘히 적힌 길고 긴 저자의 이름을 읽을 생각을 못 한 것뿐이죠.”
제대로 읽기도 전에 펠로스가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 정도면 전대 대신관보단 양호한 편입니다. 그자의 이름은 거의 서른 자에 육박했거든요.”
그가 첫 번째 책 『흑마법의 이론과 실재』를 덮었다.
“흐음……. 꽤나 다급했나 보군요. 평소의 그와 달리 유명세와 빈약한 근거를 내세웠네요.”
“……설마 벌써 다 읽었어요?”
“훑어본 것뿐입니다. 신전에서는 책을 빠르게 읽어야 할 일이 많아서요.”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펠로스는 이번엔 두 번째 책을 펼쳤다. 『흑마법의 근원』
“여기 있네요. 전대 대신관의 이름.”
거기엔 더 길고 긴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지막 이름이 마르시오텔리오스 16세만 아니었더라도 대신관인지 몰랐을 것이다.
정말로 이 모든 책의 저자가 역대 대신관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