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레이디,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카렌이 물었다.
“아까 그 이야기요. 무르고 싶어서요.”
“무슨 이야기를 말씀하시는지요?”
“데뷔탕트 파트너요. 좋다고요! 카렌 경이 해요.”
“예?”
그가 약간 주춤거렸다.
“경의 그 넓은 아량과, 관대함? 뭐, 그런 걸 제가 받아들이겠다고요. 어때요?”
“어……. 그게 말입니다.”
카렌이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난 그만큼 그에게 바짝 다가섰고.
“죄송하지만 레이디. 시간이 초과됐습니다.”
“뭐요?”
황당한 마음에 말이 험하게 나갔다.
“무척이나 유감스럽게도 제가 갑자기 일이 바빠져서요. 아까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근위대 편성이요?”
“예. 그것 외에도 할 일이 태산 같더군요. 꼭 레이디랑 놀고 있던 걸 꾸짖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난 그제야 카렌의 눈에 어렴풋한 원망이 깔려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때의 눈과 같았다. 내가 대공 저를 탈출해서, 혼자 모든 일을 덤터기 썼던 그때의 그 원망 어린 눈.
이번에 주춤거리며 물러난 건 나였다.
“레이디께서 전하께 잘 말해 주신다면야,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아까도 절 무시하던 걸로 봐선 아무래도 레이디의 아량은 저와 달리 그다지 넓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빛이 흉흉했다.
그제야 그가 처음부터 비아냥거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하, 난 어색하게 웃었다.
“그…… 수고하세요.”
툭툭, 두꺼운 갑옷을 입은 그의 어깨를 괜스레 두드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카렌은 실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복도에서 만났을 때 냉큼 좋다고 할 것을.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카렌이 안 된다면 그다음은 펠로스였다. 솔직히 내가 이 제도에 아는 남자라곤 그들이 다였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다가 우뚝 멈췄다.
홱, 뒤를 돌아보자 그때까지 조용히 내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던 전담 시녀가 보였다.
“너…….”
“예, 대공비 전하.”
처음 시녀를 봤을 때부터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만.
펠로스가 되도 않는 갑옷을 입고 황궁에 잠입했을 때, 그리고 되도 않는 느끼한 말로 시녀들을 꼬셨을 때.
그에게 손을 붙잡혔던 게 바로 그녀였다.
“며칠 전에 화려하게 생긴 미남이 말을 건 적 있었지?”
“……예?”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꿈뻑거렸다.
“그 왜, 황궁 안에서 말이야. 황태녀 전하의 궁 안에서. 분명 밝은 갈색 머리인데 꼭 금발 같은.”
“기사님이요?”
기사님?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오려 하는 걸 겨우 참았다.
“……그래, 그 기사.”
“그분은 왜요?”
“혹시 어디 소속인지 알고 있니?”
시녀가 날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잠깐 맡길 일이 있어서 그래. 실은 나와 아는 사이거든.”
“음……. 저도 모르겠는데요. 다만, 위보우가라고 하셨어요. 위보우가는 대대로 걸출한 기사님들을 배출하기로 유명하잖아요?”
“위보우……?”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고개를 돌려 다시 연무장 쪽을 바라봤다. 꽤나 기사답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카렌이 보였다.
카렌 위보우. 위보우는 그의 성이었다.
펠로스가 그를 사칭한 것이다.
하긴 애초에 갑옷을 입고 잠입했는데 진실을 말하는 게 더 이상했지.
위보우를 사칭했었다면 더 볼 것도 없다. 펠로스는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리라.
난 생기를 잃고 축 늘어진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마님?”
의아한 표정으로 부르는 시녀에게 훠이훠이 손을 저었다.
그의 정체도 모르는 시녀가, 나도 모르는 그의 행방을 알 리 없었다.
이젠 어떻게 해서든 내가 직접 찾는 수밖엔 없었다.
데뷔탕트 파트너를.
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게 뭐라고, 강한 승부욕이 들었다.
*
황궁 도서관은 화려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커다란 홀 이곳저곳에 있었고, 벽면 전체가 책으로 빼곡했다.
멍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압도당할 것 같은 풍경이었다.
살면서 본 중 가장 많은 책이 이곳에 있었다.
황궁 안에 이런 게 있다니.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데뷔탕트 파트너를 찾기 위해 황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마침내 당도한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제도에 온 목적이 흑마법에 대해 조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대공령에는 없는 커다란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서.
새삼스러운 사실을 상기했다.
나선형 계단 아래에는 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사서가 한 명씩 앉아 있었다.
계단마다 구역이 다르고, 그 구역 안에 들어가기 위해 신분 증명이 필요한 듯했다.
신분 증명이라.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황궁 도서관은 최적의 장소였다.
흑마법에 대한 조사와 동시에 대공비의 데뷔탕트 파트너로 적당한 신분의 남자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난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가장 중앙에 있는 사서에게로 걸어갔다.
한쪽 눈에 모노클을 끼고 있는 그녀는 딱딱한 표정으로 종이 뭉치를 넘기고 있었다.
“저어…….”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그녀가 눈을 맞춰 왔다.
회색빛의 짧은 머리칼이 눈썹 위에서 찰랑였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책을…… 보려고 왔는데요.”
어쩐지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사무적인 태도에 난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처음 뵙는 분이시네요.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있으십니까?”
슬쩍 뒤를 돌아 시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품에서 능숙하게 종이 뭉치 하나를 꺼냈다. 그걸 살펴본 사서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황태녀 전하의 손님이시군요.”
시녀가 꺼낸 건 아스트릴라의 직인이 찍힌 서류였다.
아직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나를 위해, 그녀가 준비해 준 것이었다.
“원하시는 책의 종류가 어떻게 되시나요?”
“마법류예요.”
“마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답니다. 마력에 관한 것, 마석에 관한 것, 어린아이들도 배울 수 있는 기초 마법부터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공격 마법까지. 그게 아니라면 일상생활을 할 때 유용한 생활 마법과 신력에 맞먹을 정도의 회복 마법도 있지요.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
사서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줄줄이 말했음에도 끝내 흑마법은 나오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흑마법에 대한 책이 보고 싶어요.”
말을 꺼내자, 일순 커다란 황궁 도서관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주 찰나였다. 정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예민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흑마법은 악마와의 계약을 뜻했다.
신의 권능이 널리 뻗친 세계에 악마라는 건 말 그대로의 악이었고.
그게 실제로는 마법이 아닌 아예 다른 능력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악마를 믿지 않는 데반 같은 자에게도 흑마법의 인상은 좋지 않았으니, 신실한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할지 안 봐도 훤했다.
“저, ……레이디.”
사서는 날 어떻게 부를지 잠깐 망설이다 결국 레이디로 마음을 정한 듯했다.
“흑마법에 대해 정확히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알지 못하니 책을 보고 싶다는 게 아니겠어요?”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안내해줘요. 판단은 제 몫이니까.”
사서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했지만, 아무래도 황태녀의 직인을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낮게 한숨을 쉬더니 앞장섰다.
나선형의 계단 층마다 책이 나뉘는 줄 알았더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사서가 날 데려간 곳은 계단 뒤에 숨어져 있는 문이었다.
문을 열자 긴 복도가 보였고, 그곳에 또 다른 문이 양옆으로 나 있었다.
“여긴 어디죠?”
“황족과 일부 중앙귀족만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다른 제국에 넘어가선 안 되는 군사 기밀, 지리, 경제……. 그리고 제국 내에서도 퍼져선 안 된다고 생각되는 여러 서적들을 보관하고 있죠.”
그녀는 못마땅하다는 듯 날 바라봤다. 내 신분을 증명한 게 황태녀가 아니었다면 금방이라도 쫓아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럴수록 난 약간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이토록 망설이고 못마땅해 할수록 이 안에 든 것들이 귀한 정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마침내 사서가 복도 끝 가장 안쪽의 문을 열었다.
덜컹거리며 열리는 문은 확실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오래돼 보였다.
“콜록.”
피어오르는 먼지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기침하자, 사서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쪽에서 살펴보시면 됩니다. ……다 보신 후에는 꼭 문밖의 종을 울리시고요.”
단단히 다짐을 받고 나서야 사서가 방을 나섰다.
마침내 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드디어 흑마법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방은 안으로 깊게 파여 있어, 밖에서 예상한 것보다 훨씬 컸다.
꽤 많은 수의 책이 있었지만 빼곡한 정도는 아니었다. 책 한 권 한 권이 각자의 유리 장식장에 들어가 있었다.
귀해 보이는데 함부로 만져도 되는 건가?
머뭇거리며 유리장을 열자 끼익 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먼지가 사방으로 날렸다.
관리 상태를 보아하니 귀한 게 아니라, 그저 처박아둔 것 같기도 했다.
손사래를 쳐 먼지를 날리고 겨우 그 안의 책을 집었다.
『흑마법의 이론과 실재』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제목이었다.
인생이 아무리 지루해도 이런 제목의 책을 보고 재미를 느끼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대충 훑어보자 역시 생각대로였다.
삽화는 하나도 없이 개미 같은 글자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대충 책등의 먼지를 털고, 다른 유리장도 열어 비슷한 책을 몇 권 꺼냈다.
『흑마법의 근원』이나 『태초의 흑마법』 따위의 제목이었다.
유리장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가장 안쪽으로 가자, 거기엔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둘 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 딱딱해 보였는데, 이런 경우엔 오히려 다행이었다.
천이라도 덧대 있었다면 필히 곰팡이가 슬 것 같은 관리 상태였으니까.
이 정도면 비밀도 기밀도 아니고, 그저 방치 아닌가?
한 손으로 입가를 막고 불만스럽게 의자의 먼지를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