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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41화 (41/123)

41화

“카렌을 데려와야겠군.”

갑자기?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데반이 다시 변덕을 부릴까 무서워 재빨리 덧붙였다.

“역시 그렇죠? 기사가 있어야 든든하니까요.”

“기사는 필요 없고. 카렌은 더욱 필요 없고.”

“네?”

“주방장을 제도까지 안전하게 호위할 사람이 필요하겠어.”

데반이 신경질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도저히 못 먹어 줄 정도군.”

아……. 그는 음식에 내 생각보다 더 예민한 게 틀림없었다.

“안 드실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테이블 위의 종을 딸랑 흔들었다.

시종장이 와서 고개를 숙였다. 아스트릴라가 임시로 부리라며 붙여준 자였다.

“편지를 하나 써야겠는데.”

“예, 대공 전하.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허리를 굽히고 홀에서 나가자, 데반은 낮게 중얼거렸다.

“아예 집사도 데려오는 편이 좋겠군.”

난 하얗게 센 머리의 노집사를 떠올렸다.

“마차에 며칠이나 있는 건 힘드시지 않을까요? 혹시 마물이 나타날 수도 있고.”

“마물이 나타난 건 오로지 너 때문이야. 그 거리에 마물이 나타난단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었다.”

“그거야…… 그렇긴 하죠.”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비난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는지 데반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카렌과 집사, 그리고 주방장이 도착해야 그때부터 제대로 뭘 시작할 수 있겠어.”

그가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정말로 식사를 그만둘 생각인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신전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그 흑마법이라 불리는 게 대체 뭔지 알아내야 해요.”

그래야 그의 저주도 풀 수 있고, 죽어 간다는 내 몸에 대한 단서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코델리아를 보고 싶어요. 방법이 없을까요?”

“코델리아?”

그가 뭔가를 가늠했다가, 미간을 짙게 찌푸렸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죄책감 때문이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 이기적인 마음이죠. 그 애를 구하고 제 마음이 편해지고 싶다는.”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방법을 찾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기대는 하지 마. 신전에서 아끼는 아이라고 했으니.”

“알겠어요.”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시종장이 들어왔다. 그는 허리를 깊게 숙이더니, 데반의 앞에 종이와 펜을 내려놨다.

수려한 필체로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그를 훔쳐보며, 난 내내 궁금했던 건 물었다.

“그 연락은 왜 마도구로 하지 않아요? 아까는 마도구를 쓰면 빠르다면서요.”

“급한 일이 아니면 굳이 쓸 필요가 없지.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도 만만치 않으니.”

시장 경제에 대한 이해가 하나도 없는 그가 이 정도로 말하는 걸 보면, 어마어마하게 비싼 게 틀림없었다.

그 비싼 걸 카렌과 연락하는 데 쓰겠다고 하다니. 어지간히 같이 있기 싫은 건가.

난 피식 웃으며 포크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퍼뜩 물었다.

“근데……. 저는 이제 뭘 하죠?”

이 넓은 황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본래 제도에 온 이유가 퇴색된 기분이었다.

오는 길에 어마어마한 마물을 만나고, 펠로스를 만나고, 거기에 아스트릴라까지.

한바탕 휘몰아치고 이제야 겨우 원점이었다.

내 물음에 펜을 멈추고, 데반이 날 빤히 바라봤다.

그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가 속눈썹에 깜빡깜빡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람을 홀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일단은…… 데뷔탕트부터 시작할까.”

*

카렌과 집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반이 그리워 마지않았던 주방장이 황궁에 도착했다.

중앙 귀족 출신답게 카렌은 황궁에 빠르게 적응했고, 어릴 때부터 데반을 모셔 왔던 집사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 황금으로 점철된 황궁에서 어미 잃은 새끼처럼 황량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은 나와 주방장뿐이었는데.

그녀는 일을 하느라 바빴으니 결국 나 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나도 한가하지만은 않았다.

“……다음. 다음. 아니, 아까가 낫겠다.”

데뷔탕트 때 입을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불과 얼마 전, 대공 저에서 결혼식을 위한 예복을 골랐을 때와 같았다.

그 예복도 사실 아직 다 결정하지 못했는데 또다시 결정의 늪에 빠져 버리다니.

재단사가 내 표정을 오해한 듯 눈을 찡긋거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공비 전하. 이것의 몇 배나 되는 드레스가 저희 샵에 준비돼 있답니다.”

더군다나 그 결정의 늪은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컸다.

데반은 황족이었고 나는 그 아내였고, 무엇보다 이곳은 황궁이었으니.

재단사의 수준과 그가 가져온 예복의 규모가 남달랐다.

사실 이런 건 본디 함께해 줄 귀부인과 함께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모친도 가깝게 지내는 귀부인도 없었으니 결정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앉은 채로 그게 그것 같은 원단들에 대해 줄줄이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내 옆에 서서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한 노집사가 말했다.

“마님, 저는 아무래도 왼쪽에서 세 번째 원단이 광택이 돌아 고급스러우면서 빛을 너무 반사시키진 않는 것 같아 좋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마님의 아름다운 청금빛 눈동자에 걸맞는 건 그것뿐인 것 같군요.”

……그렇군요. 여전히 미사여구엔 도가 튼 사람이었다. 도와줄 귀부인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다.

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하지.”

아무리 귀찮고 번거로워도 데반에게 맡기는 것보단 나으리라.

난 아직 그 무지개 색 깃털이 장식된 드레스를 잊지 않고 있었다.

“하아…….”

대책 없이 제안하는 건 데반인데, 뒤처리는 왜 항상 내 몫인지 알 수 없었다.

난 낮게 한숨 쉬며 며칠 전을 떠올렸다.

*

“저는 이제 뭘 하죠?”

“일단은…… 데뷔탕트부터 시작할까.”

“데뷔탕트라뇨?”

황당한 내 표정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넌 이 제국에서 2년 넘게 실종 중인 백작 영애다. 그것도 데뷔탕트를 치러야 하는 해에 실종됐지. 알아보니 디에고 백작은 보여 주기 식으로 너를 조금 찾아다니다, 이제는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더군.”

아예 장례를 치렀을 줄 알았더니, 그러지 않은 건 의외였다.

“그래서요? 데뷔탕트랑 그게 무슨 상관이죠?”

“얼마 후에 신전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를 테니 그 전에 정식으로 사교계 데뷔를 해 두는 게 좋지 않겠나? 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여자랑 결혼하고 싶진 않거든.”

웬만한 귀족가의 영애들이 데뷔탕트를 치를 시기인 열여덟.

난 데반에게 납치당했고, 도망쳤고, 이제야 돌아와 스무 살이었다.

그 말은 이미 데뷔탕트를 치를 나이가 한참 지났다는 소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어디나 예외는 있지. 사정상 치르지 못한 귀족 영애들이 1, 2년 정도 늦추는 건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냐.”

적어도 내가 들어 본 바로 그런 일은 없었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거기에 넌 이제 대공비다. 이 일은 황태녀가 승인한 일이고.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나?”

황태녀의 승인이라니. 나만 모르는 새에 그는 이미 아스트릴라와도 이야기를 끝내 놓은 듯했다.

“도대체 어쩔 작정이세요?”

“뭐가?”

“신전에서 절 찾고 있어요. 그런 장소에 나갔다간 제가 돌아왔다는 걸 모두에게 광고하는 꼴이고 그럼…….”

“이제야 요점을 잡는군.”

데반이 어느새 다 적은 편지를 정갈하게 접었다.

딸랑― 그가 종을 울렸고 집사가 다가와 허리를 깊게 숙이며 편지를 받아갔다.

“내가 널 납치했을 때도 신전에서 널 찾고 있다고 말했었지.”

“그랬죠.”

“그 소문이 변두리에 있는 대공 저에까지 들렸어. 이게 뭘 뜻하는 것 같지?”

“그들이 일부러 소문을 널리 퍼트렸다는 거겠죠. 저에 대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그래. 그럼 그들이 소문을 퍼트리면서, 널 죽이겠다고 했을 것 같나?”

“당연히 그렇진 않겠죠. 그토록 철저하게 지킨 이미지가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죠?”

데반의 눈썹이 휘익― 올라갔다.

“신전이 퍼트린 소문은 단순했다. 저희들이 공들여, 애써서, 정성으로 키운 아이가 디에고 백작의 실책으로 사라졌다. 그 아이가 어디서 어떤 고생을 하고 있을지 모르니 우리가 되찾아 오겠다.”

그 이중성에 치가 떨렸다.

입맛이 떨어진 내가 포크를 내려놓자 데반이 말을 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네가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한다면? 그것도 대공비라는 지위를 가지고.”

그는 명분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중요시하는 명분.

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신전은 날 찾을 명분을 잃게 된다.

“적어도 공식적으론 절 찾지 못하겠군요.”

“그래.”

“그만큼 비공식적으로 날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하하, 드물게 그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난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약간 벌렸다.

“설마…… 그걸 노리는 건가요?”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능청스러운 표정의 데반을 노려봤다.

이제 겨우 눈치챌 수 있었다.

데반은 나를 미끼로 신전을 꾀어낼 생각이었다.

내가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면, 좋으나 싫으나 대공비인 게 밝혀질 테다.

대공비는 당연히 예식이 끝날 동안 대공과 함께 별궁에 머물 테고.

뻔히 다 아는 장소에 침입하는 것 정도야, 신전에게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게 황궁이라 할지라도.

한 마디로 데반은 신전에서 직접 우리를 찾아오게 만들 생각인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네 데뷔탕트는 필요해. 너도 원하던 게 아니었나? 대공비라는 지위를 이용해 디에고 백작과 네 오라비에게 맞서는 것.”

들을수록 내가 거절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난 다시 포크를 들어 신경질적으로 고기를 찔렀다.

“그렇다고 절 미끼로 쓰고 싶다니. 참, 상냥하기도 하시네요. 다른 방법을 더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은 못 하셨나 보죠?”

내 비아냥에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이건 네가 먼저 제안한 일일 텐데.”

“제가요?”

“네가 그러지 않았나.”

그가 손에 턱을 괴고 날 내려 봤다.

아래로 내리깐 기다란 속눈썹이 그의 붉은 눈동자를 가렸다.

여전히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로, 데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섭다고 도망치기만 해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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