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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40화 (40/123)

40화

“이 모든 게 다 자격 시험에서 비롯된 거라면?”

“……신전이 무언가 꾸몄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다지 놀라운 소리는 아니었다.

데반도 알고 있었으니까. 열 살, 자격 시험이 예고됐을 때부터.

“그래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넌 후계자가 됐고, 난 저주에 걸렸다. 문제가 있다 해도 그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나는 구태여 걸고넘어질 생각이 없고. 이미 다 끝난 일이야.”

“끝난 게 아니지. 내가 이제부터 시작할 거니까.”

“하고 싶은 말을 해. 빙빙 돌리지 말고.”

아스트릴라가 입술을 축였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와인 잔의 표면을 느긋하게 쓸며 말했다.

“난 황제가 될 거다.”

데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색다를 것도 없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와인 잔을 세게 쥐었다. 파삭― 잔이 부서졌다.

이걸로 두 개째군. 황궁에 남아나는 게 없겠어.

데반은 무감하게 생각했다.

“황제를 죽일 거야. 대신관과 함께.”

파삭― 데반의 손에 든 와인 잔도 그의 손에서 허망하게 부서졌다.

손바닥에 송글송글 피가 맺히고 있었지만, 데반은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스트릴라를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는 눈에 핏발이 섰다.

황제를 죽인다, 대신관과 함께.

그가 평생을 바라왔던 일이자, 아스트릴라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한치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

황궁 여기저기를 헤맨 끝에, 나는 마침내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한 번 봤다고 그래도 익숙한, 천장까지 닿아 있는 커다란 문이 보였다.

저 안에 데반과 아스트릴라가 있을 것이다.

잠시 호위병들이 자리를 비웠는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건 시종뿐이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그대로 문으로 돌진했다.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날 바라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미처 날 붙잡기 전에, 그대로 벌컥― 문을 열었다.

“허억, 헉.”

“아가씨!”

뒤따라온 시종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리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방 안에는, 데반과 황태녀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생각만큼 급박한 상황으로 보이진 않았다.

이만한 소란을 피우면서 등장했음에도 둘 중 누구의 시선도 내게 닿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에?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둘은 그저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며 내 주위에서 서성였다.

“아아, 됐네.”

마침내 아스트릴라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녀는 손바닥을 툭툭 털었는데, 그곳에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피? 그제야 카펫 위로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보였다.

서둘러 데반을 바라봤다. 위험한 상황 같진 않았다.

그녀는 제 손바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내 차림새를 훑어보곤 말했다.

“음. 마음에 드는군. 아주 잘 어울려.”

이게 잘 어울린다니, 진심인가.

“데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데반이 마침내 고개를 들고 날 바라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 차림이 그게 뭐지?”

“그게 중요해요, 지금?”

그의 손바닥에도 핏방울이 보였다.

난 휙, 커다란 손을 가져가 가볍게 신력을 발산했다.

순식간에 그의 상처가 아물면서, 박혀 있던 유리 조각이 튕겨 나왔다.

“오호.”

아스트릴라가 과장되게 흥미로운 표정을 했다.

그녀도 황궁에서 몇 번이나 신력으로 치료하는 모습을 봤을 텐데.

티 나게 추임새를 넣는 의도가 투명했다.

“황태녀 전하도…… 괜찮으시다면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좋지.”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더 투박했고,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는 손이었다.

조심스럽게 신력을 내보내자 상처는 순식간에 치료됐다.

“그 힘으로 저주를 고쳤다지?”

“어……. 예.”

곤란하거나, 기분이 나쁠까 봐 데반의 눈치를 봤지만 그는 이쪽엔 관심도 두지 않고 무언가를 곱씹고 있었다.

“그나저나 의외군. 이렇게 들어오라고 명한 적은 없는데. 붙여놨던 시녀들은 어디에 갔지?”

“그게…….”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하하! 호쾌하게 웃었다.

“알 것 같군. 답답했을 테지. 자아…….”

짝― 크게 박수를 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얘기도 끝났겠다. 이제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이 드레스는요?”

“말했지 않나. 선물이라고. 아니면 뇌물이라고 해도 좋고.”

아스트릴라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응접실을 나섰다.

난 황당함에 눈을 꿈뻑거렸다.

예상했던 대로 날 내보낸 이유가 데반을 혼자 두기 위한 건 맞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했기에 데반의 상태가 이 모양인 거지?

“데반. 전하께서 무슨 얘기를 하신 거죠?”

그는 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한 번 더 내가 입은 옷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까딱했다.

“별궁으로 가지.”

“황궁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래요?”

“그래.”

“그럼 왜 여기로 부른 거죠? 우리가 제도에 도착하자마자, 계산했다는 듯이.”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출구로 성큼성큼 향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겠지.”

“누구에게?”

둘의 사이를 방해할 수 있는, 그리고 방해할 이유가 있는 자들을 떠올려 봤다.

황제, 황후, 대신들?

“신전.”

“아, 신전……. 신전?”

의외의 말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지만, 데반은 함께 멈추는 일 없이 여전히 성큼성큼 걸었다.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무슨 얘기를 한 거죠, 대체?”

“나도 몰라.”

“네?”

“젠장.”

데반이 한 손으로 거칠게 제 얼굴을 쓸었다. 그는 정말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빠른 속도로 걷자, 병사들이 황궁의 문을 활짝 열어 줬다.

데반은 발을 떼려다 멈칫하곤, 뒤를 돌았다.

“……왜요?”

그가 날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등을 돌렸다.

그러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남아나는 게 없겠어.”

“네?”

“황궁에…….”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자, 그곳엔 황가의 문양이 커다랗게 새겨진 마차가 준비돼 있었다.

아스트릴라가 미리 대기시킨 게 틀림없었다. 처음부터 황궁에 머물게 할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데반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자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황궁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 거란 소리다.”

그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제 손바닥을 바라보면서, 꾹 주먹 쥐었다.

*

“펠로스 그 자식이 황궁에?”

데반이 황당한 표정을 했다.

별궁에 도착해 지긋지긋한 드레스를 벗어 던진 후였다.

그 역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우린 식사를 위해 홀에 모였다.

“네, 저도 깜짝 놀랐잖아요. 무슨 갑옷을 입고 기사 행세를 하는데.”

“신전에 데려다준 지 얼마나 됐다고? 도대체 왜지?”

난 수프를 거의 입에 들이붓다시피 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쓸데없이 소란을 피우느라 배가 고팠던 참이었다.

데반이 예의나 겉치레에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편해진 탓도 있었다.

“저를 만나러 온 것도, 데반을 만나러 온 것도 아니라고 했어요.”

“원체 예상할 수 없는 놈이니.”

어느새 난 데반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졌다.

남들 앞에서 평범한 연인으로 보이기 위해 시작한 게 입에 붙은 탓이었다.

그도 어색해하지 않는 것 같았고.

연인이라니. 우리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아, 그보다 기사들과 유니스요. 마물들에게 당하고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는…….”

“안 그래도 별궁에 오자마자 명령해 뒀는데 아직 찾지 못한 모양이더군.”

난 입술을 까드득 물었다. 어쩐지 자꾸 예감이 안 좋았다.

신전에서 이미 무슨 짓을 했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마물의 다리에 하얀 마석이 있었잖아요. 그걸 확보하면 증거로 삼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쓰러졌던 틈에 신전이 회수해 가지 않았다면 말이지.”

회수라.

확실히 엘리운에서 만났던 그 마물의 마석은 신전이 곧바로 회수했었지.

흑마법 같았다던 그 검은 연기는 사체에 남은 증거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리라.

“어쩌면…… 마물이 죽으면 신전으로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가는 걸지도요.”

“그렇다면 이미 늦었다고 봐야겠군. 기사들도 말이야.”

데반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유니스……. 괜히 제도로 데려와 이상한 일에 휘말리게 만든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어떻게든 빨리 행방을 알았으면 좋겠는데.

결혼식도 전에 제도에 올라온 것은 애초에 신전에 대한 조사가 목적이었다.

그런데 일행이 사라져 버렸으니, 우리에겐 당장 함께할 수족도 없는 셈이었다.

정보도 부족한데, 갑작스러운 공격까지 받은 상황이라니.

이러다 신전에서 또 공격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때 문득,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카렌 경은요?”

“카렌이 왜.”

“엘리운에서 돌아왔다가, 대공 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 놀라지 않겠어요?”

“퍽도.”

“엘리운에서 무슨 정보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거구요. 중요한 정보일 수도 있잖아요.”

“연락을 취하라고 하면 된다.”

“그러다 늦으면요. 빨리 알아야 손을 쓰죠.”

“마도구의 존재를 잊은 건가?”

그는 카렌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펠로스와 마차를 함께 타고 올 때 듣기로는, 데반과 펠로스, 그리고 카렌. 이렇게 셋이 어릴 적 친구라고 했다.

카렌이 그를 대하는 것에 은근히 뻔뻔하게 굴던 이유가 있었다.

난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마물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카렌이 힘이 돼줄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직접 만나는 게 좋잖아요.”

그가 고기를 몇 번 씹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돌연 말을 바꿨다.

“……그래, 카렌을 데려와야겠군.”

갑작스러운 변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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