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데반은 기사들 앞에서 취했던 존대 같은 건 집어치우고 물었다.
아스트릴라가 준비돼 있던 와인 잔에 와인을 한 잔 더 따르더니, 스윽― 밀었다.
그는 못 이기는 척 맞은편에 앉았으나, 와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술 안 해?”
“즐거울 때만 하지.”
“하하하! 그렇다면 더욱 해야지.”
그녀가 와인을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에블린을 보낸 이유가 뭐지? 둘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거라면 그저 기별했어도 될 텐데. 이런 갑작스러운 방식 말고, 정식으로 절차를 갖춰서 말이야.”
“걱정되나 봐?”
“그저 궁금할 뿐이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할 리도 없고.”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녀가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모르진 않지.”
“피가 이어졌다고 오만하게 구는 건가?”
“피?”
데반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피라. 우스운 일이었다. 그들 사이에 혈연을 운운하는 건.
아스트릴라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눈…… 정말로 보이나 보군.”
“……그래. 아직 희미하지만.”
“희미하다고? 저주는 다 풀린 게 아니었나?”
“저주는 풀렸지만 문제가 좀 있어.”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한 얘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데반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저주에 관한 거라면 잘못 판단했군. 그다지 해 줄 말이 없어서 말이다. 다시 한 번 묻지. 에블린을 어디로 보냈나.”
데반이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와인 잔을 들어 탈탈 털어 마셨다.
“듣고 싶은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거야.”
그러더니 돌연, 데반을 향해 잔을 던졌다. 그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벽에 부딪힌 잔이 듣기 싫은 파열음을 내며 깨졌다.
데반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에블린을 어디로 보냈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 애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아? 우선 내 이야기를 들어. 손해 볼 일은 없을 테니까.”
“손해일지 이득일지 정하는 건 나지. 네가 아니라.”
데반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파삭― 그의 발아래에 유리 조각이 밟혔다.
“그 저주가 정당하다고 생각해?”
그는 유리 조각을 밟은 채로 멈춰 섰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오른쪽 눈은 희미하게 보였다.
“이 저주로 누구보다 정당성을 얻은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나밖에 할 수 없는 말이지.”
데반이 뒤를 돌았다.
“앉아. 진작 했어야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
따듯한 물에 그대로 담가졌다. 씻겨졌고, 그 후엔 머리가 빗겨졌다.
대공 저에서 입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한 드레스가 입혀졌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내 정신은 반쯤 빠져 있었다.
시녀의 수가 너무 많았다.
한 명이 향유를 뿌리면 한 명은 물을 뿌리고, 한 명은 내 팔을 붙잡고, 한 명은 몸을 문질렀으니.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기, 이게 다 뭐죠?”
게다가 내가 어떤 질문을 하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금빛으로 번쩍이는 보석이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은 채로 난 화장대 앞에 앉혀졌다.
드레스는 너무 화려해서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데반이 사 온 것보단 나았지만……. 둘 다 시선을 지나치게 끈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았다.
“황태녀 전하께서 시키신 일인가요?”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자마자, 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이 사이에서 입술을 빼 부드러운 연고를 발라 줬다.
너무 부담스러워서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오른쪽과 왼쪽 머리카락을 나눠서 맡던 시녀 둘이 마침내 중앙에서 만나,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렸다.
거기에 또 번쩍거리는 핀을 잔뜩 꽂았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
시녀 하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난 그녀의 입꼬리가 약간 씰룩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역시, 내 눈에만 이상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미적 감각도 유전인지 모르지.
“대공 전하께서는 그 방에 계시나요? 혹시 다음 일정이 있나요? 누굴 만나야 한다든가.”
나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 황제와 황후를 만나는 것.
시녀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
“이 정돈 알려 줄 수 있잖아요.”
입꼬리를 씰룩거렸던 시녀가 눈치를 보더니 속삭였다.
“……두 시간입니다.”
고작 씻고 꾸미는 데 두 시간이라고? 입이 떡 벌어졌다.
머리를 매만지던 시녀 둘이 막 손을 뗐을 때였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
그리고 무작정 방을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아스트릴라가 생전 처음 보는 나를 이토록 정성스럽게 치장시킬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선물 운운했지만, 그 말을 믿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와 데반을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
두 시간, 두 시간이라면 아스트릴라가 데반에게 무슨 짓을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데반에게 가야했다. 나는 쉬지 않고 달렸다.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복도를 막 돌았을 때였다.
쿵― 무언가와 거세게 부딪힌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가 바닥에 쓰러졌다.
콧잔등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대체 어디에 부딪힌 거지?
“레이디!”
“……펠로스?”
내가 부딪힌 건 다름 아닌, 갑옷을 입고 있는 펠로스 키베온이었다.
“그 차림새는 뭡니까?”
그가 날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씰룩댔다.
“레이디…… 취향이 참……. 음……. 화려하시군요?”
“제 취향이 아니라 훌륭하신 란티모스가의 취향인 것 같네요.”
난 그가 내민 손을 사양하지 않고 붙잡았다.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콧잔등을 부여잡은 채 난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차림새를 물어야 할 건 저인 것 같은데요? 그 갑옷은 다 뭐죠? 대체 여긴 어떻게 오신 거고요?”
제도 신전에 빈자리가 났다며 먼저 마차에서 내렸던 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신관이 갑옷이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황궁에 잠입하려면 이편이 편해서요.”
“……잠입이라니.”
나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유는 묻지 않을게요. 당신이라면 왠지 그럴듯한 이유를 순식간에 열댓 개는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호오, 그새 저에 대해 좀 알게 되셨군요.”
“근데 목숨이 아깝진 않으세요? ……아, 죽고 싶으시댔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건 아플 텐데요.”
“순식간이라 괜찮을 겁니다. 그보다, 데반은요?”
“안 그래도 찾고 있는 중이에요.”
“헤어진 겁니까? 그 사이에?”
“신전에 들어가셨던 분이 그사이에 이 꼴로 황궁에 있는 게 더 이상한데요.”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데반을 만나러 온 거예요? 그럼 이런 거추장스러운 갑옷은 필요 없을 텐데요. 키베온 공작가의 차남이시면서.”
“데반 녀석을 만나서 뭐 합니까.”
그럼 대체 왜? 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절 만나러 오셨어요?”
“예? 그럴 리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그 순간, 펠로스가 갑자기 내 팔뚝을 붙잡고 코너 뒤로 끌었다.
“무슨 짓―”
“쉿.”
“아가씨!”
나를 찾는 시녀들의 목소리였다.
흡― 난 숨을 죽이고 마침 코너 뒤에 있는 동상 뒤로 몸을 숨겼다.
펠로스의 갑옷과 동상이 합해지니 날 시야에서 숨길 정도는 됐다.
“아가씨! 도대체 어디―”
“누굴 찾으십니까, 레이디들?”
그새 투구를 벗고 화려한 미소를 지은 펠로스가 시녀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난 동상 뒤에서 들리지 않게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는 정말로 기사라도 된 것처럼 정중하게 인사했고, 시녀들은 싫지 않은 눈치였다.
“아……. 그게, 이쪽으로 혹시 한 아가씨가 오지 않으셨나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아가씨인데요.”
“왔었죠.”
“네?”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아가씨께서.”
능청스럽게도, 펠로스는 시녀 하나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 맞췄다.
어머, 시녀들 사이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펠로스는 생긴 거 하난 화려한 미남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녀들은 어느새 펠로스에게 정신이 홀딱 팔려 있었다.
어느 가문의 기사님이세요, 어디에 소속돼 있으세요, 왜 그동안 제가 못 봤을까요……. 질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난 그 모습을 황당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그가 뒤로 내젓는 손을 발견했다.
도망가라는 건가? 손짓이 더 빨라졌다.
하긴, 저 성격에 조금 있으면 지칠 게 뻔했다. 시녀 중 한 명이라도 이상함을 느낀다면 들통나는 것도 시간문제였고.
몸을 한껏 낮춘 채 재빨리 발뒤꿈치를 들고 복도를 뛰었다.
목적지는 처음 들어갔던 응접실이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여전히 그들이 대화하고 있을 그 방.
*
데반은 마침내 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었다.
제정신으로 듣는 것보단 나으리라.
아스트릴라 역시 어느새 집사가 새로 가져온 와인 잔에 와인을 따랐다.
모두를 내보내고 단둘만 남은 응접실이 정적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와인이 가득 담긴 잔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돌렸다.
“궁금하지 않은가? 저주와 신전, 네가 무엇보다 흥미로워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서론은 치우지. 이제 와서 저주의 정당성을 운운하는 이유가 뭐지? 이 눈깔이 안 보이나?”
“보여. 오른쪽이 새까만 게, 아주 잘 보이지. 저주는 풀렸지만 희미한 건 그것 때문인가?”
데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 저주에 관심 있는 게 아냐. 너에게 관심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관심 있는 건 신전과 저주 그 자체다.”
“그 자격 시험을 말하는 건가?”
“그래. 도대체 왜 이 나라는 신전에 휘둘릴까? 그런 의문을 품어 본 적 없나?”
이번에도 데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트릴라는 그런 그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이 모든 게 다 자격 시험에서 비롯된 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