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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38화 (38/123)

38화

황태녀, 아스트릴라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데반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녀는 제 오라비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로 풍채가 좋았다.

데반은 낮게 한숨 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처음으로 그가 난처해 보였다.

물론 난처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오던 자세 그대로 입을 떡 벌리고 굳어 있다가, 무례를 깨닫고 후다닥 허리를 숙였다.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하!”

아스트릴라는 나를 보고도 마찬가지로 호쾌하게 웃더니,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짧게 혀를 찬 데반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맞잡고서야 간신히 마차에서 마저 내려올 수 있었다.

“도대체 네가, 하……. 전하가 여기 왜 계십니까?”

데반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 말은 편하게 하지?”

그렇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마차에 있을 땐 보이지 않았는데, 그녀의 뒤로 수십 명의 기사들이 대열을 맞춰 서 있었다.

“자, 그래서 자네의 이름이 뭔가.”

그녀의 시선이 날 향했다.

반짝거리는 황금빛 눈동자에 난 움찔 몸을 떨었다.

누군가가 생각난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에블린입니다.”

짧게 대답하며 난 주위를 둘러봤다.

킬리언은 아스트릴라의 직속 근위대장이었다.

이 기사들 사이에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근위대장이라면 선두에 섰을 테고, 그라면 풍채나 외모만으로 꽤나 눈에 띄었을 테지만.

“에블린 뭐?”

“예?”

아스트릴라가 내 턱을 붙잡고 시선을 맞췄다.

“에블린, 그리고 뭐냔 말이다.”

난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대답을 하지 않지?”

“……저는 부모가 없어…….”

거짓은 아니었다.

내 친부모는 생사조차 알 수 없었고, 디에고 백작을 부모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까. 거기에 이제는 사실상 연을 끊은 셈이 아니던가.

굳이 성을 붙인다면 이젠 란티모스라 하는 게 맞겠지만…….

데반과의 혼인이 정식으로 선포된 것도 아닌 마당에 ‘진짜’ 란티모스 가의 사람인 황태녀 앞에서 섣불리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니지, 아니야.”

아스트릴라가 고개를 내저었고 그 탓에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꼭 깃발처럼 펄럭였다.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모습이 조금쯤 데반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디에고. 에블린 디에고가 아닌가.”

“전하.”

데반이 내 앞을 슥 막아섰다.

“꽤 힘든 여정을 했습니다. 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스트릴라의 시선이 내 전신을 훑었다.

부속 신전에서 찬물로나마 씻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여전히 옷은 데반이 사다 준 그 의미 모를 공작새 같은 드레스였지만.

유난히 그녀의 시선이 드레스에 길게 머무는 것 같아, 난 슥― 데반의 뒤로 몸을 숨겼다.

“하하! 꼭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것 같군. 그저 오랜만에 내 가족이 온다는 소식에 마중 나온 것뿐인데 말이야. 정확히는 가족과, 곧 가족이 될 자지만.”

그녀가 날 보며 눈웃음쳤다.

혼인 서약서를 작성한 걸 이미 알고 있구나.

데반이 전한 건가 싶어 바라보자, 그는 나보다도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인가?”

“……그걸 또 어떻게―”

“모르는가? 이 제국에서 날 거치지 않는 말은 없지.”

데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혼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신전과 시간도 조율해야 하고요.”

“그렇지.”

제가 물어놓고,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는 말투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결혼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는데 제도는 왜 벌써 오셨을까.”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제야 그녀가 황태녀라는 게 실감 났다.

개인적 감정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녀는 데반을 의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을 제외하면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고, 1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 전체에 그가 황좌를 노린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으니까.

“제가―”

급하게 입을 열자, 그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난 눈동자를 굴리며 그럴듯한 변명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제가…… 제도를 구경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지금껏 한 번도 제도에 온 적이 없거든요.”

아스트릴라는 의아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다가,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고 백작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난 보이지 않게 주먹을 꾹 쥐었다.

그녀가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는데도, 꼭 어린아이를 보듯 날 바라봤다.

“이걸 어쩌나. 함께 만나면 좋았을 텐데. 네 오라비가 하필 지금 제도에 없어서 말이야.”

“……제도에 없다고요?”

킬리언이 대공령을 떠난 건 확실했다. 당연히 곧바로 제도로 돌아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없다니?

당연히 킬리언은 전혀 만나고 싶지 않은, 오히려 피하고 싶은 존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존재일수록 거취를 알아 둬야 마음이 편한 법이었다.

“그럼 어디에 있죠?”

“글쎄. 난 부관의 휴가 장소까지 일일이 캐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야.”

휴가를 갔다고?

나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제 동생의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뭔가 근사한 선물이라도 사러 갔나 보지.”

데반과 혼인 서약을 했을 때, 킬리언이 보였던 태도를 곱씹어 봤다.

축복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나도 모르게 나온 냉정한 말투에 아스트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굉장히 단언하는군. 그래, 남매간의 사이도 좋다고 했지. 조금은…… 과할 정도로 말이야.”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고, 난 다시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슬쩍 시선을 피하며 데반의 뒤에 가 섰다.

“자자, 따라오지.”

아스트릴라가 박수를 세게 짝― 쳤다.

기사들이 길을 만들어 주듯 양옆으로 흩어졌다.

당황한 난 데반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가 한 발자국 앞으로 가더니, 이미 황궁 안으로 발을 떼고 있는 황태녀의 뒤에다 대고 말했다.

“안내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제 집이기도 한 것을요.”

“안내한다고 한 적 없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말만 남긴 채, 황궁으로 들어갔다.

마차와 수많은 기사들, 그리고 우리 둘만 남은 곳에서 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거절할 명분도, 힘도 없으니 일단은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지.”

“분명 황궁에서 떨어진 별궁에서 지낼 거라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아스트릴라는 예정도 없이 제도로 올라온 데반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황궁에 우리 둘을 가두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우리에겐 없는 명분이 그녀에겐 있었다.

모름지기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잃을 것도 많았고, 그런 사람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황궁과 완전히 거리를 두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깊게 관여할 생각도 없었는데.

나는 불만스럽게 땅을 내려다보며 앞장 선 데반을 따라 황궁으로 들어갔다.

*

나는 구경이라도 온 듯 쉴 새 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황궁은 황궁이구나. 온통 번쩍거리는 벽은, 자세히 보니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져있었다.

우리는 아스트릴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로, 보좌관의 안내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앞장 선 데반의 뒤에 바짝 붙은 채 작게 속삭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요? 정말로 황궁에서 지내라고?”

“어차피 너에게 할 말은 아닐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 문제라는 건가.

그렇다면 역시 그는 제도에 온 게 황위 다툼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하리라.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이유가 뭐죠?”

대답 대신, 데반이 제 눈가를 툭툭 건드렸다.

아, 저주가 풀려서구나.

“설마 신전에서 또 다른 저주를 건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데반의 낯빛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목소리를 더욱 낮춰 속삭였다.

“황태녀 전하가 황위에 욕심이 많은 편이신가 봐요?”

“욕심이라.”

의외로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

“그렇다기보다는, 확실한 걸 좋아하는 편이지.”

“확실한 거요?”

“도착했습니다.”

보좌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천장까지 닿는, 내 키의 몇 배나 될 것 같은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천천히 열렸다.

난 꼴깍 침을 삼키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래 봐야 이상한 꼴을 하고 있다는 건 달라지지 않았지만.

데반이 앞장섰고, 난 그의 등에 시선을 고정한 채 뒤따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건 장대한 양의 옷이었다.

“드레스……?”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잊고 중얼거렸다.

“이게 다 뭐지?”

당황한 건 데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오직 아스트릴라만이, 응접실의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한 손에는 와인을 들고.

“내가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지.”

“선물?”

“새로운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나 할까.”

“아직 정식으로 식을 치르지도 않았다.”

“그럼 내 오라비의 저주를 풀어 준 대가라고 할까. 아니, 내 부하의 누이에 대한 선물이라고 해도 되겠군.”

인상을 잔뜩 구긴 데반이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가, 와인 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소리 나게 놓았다.

아스트릴라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무슨 짓이지?”

“내가 묻고 싶군. 무슨 짓이지?”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열등감 때문인가?”

“너…….”

“이봐.”

아스트릴라가 손뼉을 치자, 양옆으로 준비 중이던 시녀들이 줄줄이 걸어 나와 고개를 숙였다.

“준비하지.”

“예, 황태녀 전하.”

그들이 전투적으로 눈을 빛냈다.

나를 바라보면서.

*

데반 란티모스는 본디 제 동생에게 아무런 악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릴 땐 조금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감정은 털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이런 태도가 의문스러웠다.

에블린은 열 명에 가까운 시녀 군단에게 어디론가 끌려간 뒤였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좀 앉지?”

“무슨 속셈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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