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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37화 (37/123)

37화

“문제는 찻잎이, 이 안에 든 모든 물을 다 먹어버릴 정도라는 겁니다.”

찻잔 위로 쌓인 찻잎을 바라보이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레이디의 안에서도 이런 광경이 착실히 진행 중이고요.”

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쩐지 찻잎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럼 그 힘이 제 신력을 모두 먹으면…….”

“그만큼의 공간을 쓸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러면…….”

“죽을 겁니다, 아마.”

펠로스가 쩌억, 하품을 한 번 더 하면서 데반을 턱짓했다.

“저 녀석이야 워낙 신력이 흐르지 않는 몸이니, 흑마법이 오른쪽 눈에서 끝난 거죠. 그래서 저쪽 눈이 희미하게 보이는 거고요.”

“난 아니라는 거군요.”

“생각해 보세요. 머리카락 한 올 잘린 쪽이랑 사지가 절단 난 쪽 중에 누가 더 위험하겠어요?”

확실히 신력은 내 온몸에 가득 차 있었다. 혈액처럼, 장기처럼.

그건 달리 말해 얼마 안 가 그 자리를 흑마법이 차지할 거란 말과도 같았다.

죽는다고?

난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나에게 죽음은 그다지 낯선 단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해질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 어떻게…… 살 수 있죠?”

“살고 싶으세요?”

펠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다지 고통스럽진 않을 텐데요. 흑마법이 들어온 상태에서 신력을 사용하셨을 때, 아프셨나요?”

난 마물들을 모두 쓰러트렸을 때를 떠올렸다. 데반의 등에 난 상처를 치료하려고 신력을 썼던 그때를.

“거북한 느낌이 들었어요. 뭔가 역겹고.”

“그건 레이디께서 흑마법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신력을 끌어당기려고 하셔서 그렇습니다. 받아들이면 편해지실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처음 내 안에 들어왔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나른한 마음이 들었던 게 기억났다.

“아마 받아들이시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을 겁니다. 최고 아닌가요?”

조용히 듣고 있던 데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일갈했다.

“이 녀석 말은 더 들을 것 없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니까.”

“벌써 가게?”

펠로스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더 아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있어야 하나? 돈이나 좀 내놔.”

“돈? 나처럼 청렴한 신관에게 지금 돈을 갈취해 가는 거야?”

데반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돈이 대체 왜 필요한데?”

“말했잖나. 제도에 가야 한다고.”

“아, 그러니까 고작 제도에 갈 마차 삯이 없으시다?”

저러다 한 대 맞을 것 같은 깐족거림이었다.

“그럼 일단 여기에 좀 머무는 게 어때?”

“내가 왜.”

“넌 제도에 가고 싶고, 난 돈 주기 싫고.”

“제도에 가면 몇십, 몇백 배로 갚아주지.”

데반의 말에 펠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필요는 없고, 실은 내가 며칠 후에 제도로 갈 거거든.”

“그래서?”

“친구 좋다는 게 뭐야. 특별히 내 마차에 탈 영광을 주지.”

*

기막힌 우연이라고, 펠로스는 말했다.

마침 제도의 신전에 빈자리가 났고, 마침 저도 이 마을에 질린 참이었다고.

그런데 마침 데반이 와서 함께 마차를 타고 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우연이냐고.

제도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펠로스는 감탄하듯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녀석은 인생의 목표가 재미인 자다.”

데반은 한마디로 그를 정의 내렸고, 펠로스는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왜 신관이 되신 거죠?”

“제가 하필이면 신력을 감지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요.”

“그 말이 아니라―”

“제 가문에 복수할 방법이 이것뿐이라 생각한 거지.”

데반이 끼어들었다.

“복수요?”

“그런 험한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복수? 이건 그저 철없는 일탈일 뿐이야.”

“일탈이요?”

내 고개가 데반과 펠로스 사이를 바쁘게 휙휙 돌아갔다.

“신관은 결혼을 할 수 없으니까. 이게 자칭 천재라는 녀석의 머릿속에서 나온 최선의 방법이다.”

모르긴 몰라도 가문과 좋지 않은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펠로스는 꼭 제 얘기가 아닌 것처럼 그런가, 중얼거리며 씩 웃을 뿐이었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 신력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타고난 능력을 가진 자가 고작 부속 신전의 신관으로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데반이 그의 행동을 철없는 일탈이라 명명한 이유도.

가문의 위상과 스스로의 명석함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직업을 선택한 건 그의 부모에 대한 ‘복수’였고.

굳이 부속 신전으로 온 건, 제도의 가족들과 떨어지고 싶어 저지른 ‘일탈’이었다.

말은 가볍게 하지만 어쩌면 그도 내가 디에고 백작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처럼 고통스러웠는지도.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시 제도로 가셔도 되는 거예요?”

“말씀드렸잖습니까, 레이디. 제도에 빈자리가 났다고! 모름지기 신관이란 신이 필요로 하는 곳에 가야 하는 법이죠.”

신 따윈 없다고 해놓고.

그는 아무래도 진심을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고작 며칠 전에 만난 사람에게 속을 보여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신은 무슨. 재밌을 거라 생각한 거지. 네가 흑마법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군.”

“물론 흑마법에도 관심이 있지.”

“흑마법에도?”

‘도’에 힘을 주며 데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펠로스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난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제도에 도착할 때까지 그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흑마법과 죽음의 관련성에 대해 생각했지만 별 수확은 없었다.

한없이 오래도록 곱씹어 봐도 정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거기에 사실 안일한 마음도 들었다.

펠로스가 제도까지 와서 흑마법에 대해 조사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고작 며칠이지만 부속 신전에서 함께 지내면서 난 그에 대해 조금쯤 알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천재였다.

죽고 싶어 한다는 말관 달리 지적 호기심이 넘쳤고, 한 번 보거나 들은 건 잊지 않았다.

그라면 곧 이 풀리지 않는 문제에 정답을 내려 주진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살 방법을 알려 주지 않을까?

난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다.

당장 내가 고민한다 한들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제도까진 반나절이 조금 넘게 걸렸다.

처음 대공 저에서 출발했을 때 탔던 것과 달리 신전이 제공하는 마차엔 마법 따위 걸려 있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약간의 멀미를 느껴야 했다.

신전에서 불렀다는 게 거짓은 아닌 듯, 제도에 도착하자 펠로스는 정말로 신전 앞에서 마차를 멈췄다.

“자, 그럼. 곧 뵙죠.”

성의 없는 한마디를 남기고 펠로스는 마차를 떠났다.

제도에 오자마자 집 대신 신전을 찾아가다니. 어지간히 집이 싫은 모양이었다.

슬쩍 창밖을 바라봤다.

신전은 어느새 저 멀리에서, 상앗빛 첨탑만 보이고 있었다.

제도의 어디에서든 보일 정도로 높은 시계탑, 그걸 보니 제도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난 데반을 홱 바라보고 말했다.

“제도에 왔으니, 얼른 기사들을 찾아봐요. 유니스도요.”

마물과의 전투 이후, 마을로 옮겨진 건 나와 데반뿐이었다.

펠로스의 마차를 얻어 타기로 결정한 뒤, 우리는 마을 근방, 그러니까 정신을 잃었던 숲 근처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그 커다란 드래곤과 거인들에 대한 단서까지도.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직감적으로 이 실종에 신전이 관련되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서둘러 찾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내 말에 데반이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설마 잊고 있었던 거예요?”

“잊었다기보단, 잠시 미뤄 둔 거지. 곧 황궁에 도착하면 사람을 시켜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다.”

“황궁이요? 우리 지금 황궁으로 가는 거예요?”

의아한 내 표정에 데반이 더욱 의아한 표정을 했다.

“달리 갈 곳이 있나?”

“그게 아니라…… 제도에 머무는 동안은 황궁에서 계속 지내는 건가요?”

“그래. 정확히는 약간 떨어진 별궁이겠지만.”

그는 황족이었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우리가 혼인 서약을 했으니, 만날 사람도 많겠지. 그딴 건 질색이지만.”

“대외적인 이미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셨잖아요.”

“제 가족에게 결혼할 상대를 소개하는 게 대외적인 이미지와 관련 있나?”

가족…….

그의 부모는 이 나라의 황제와 황후였다. 그러니까, 황제와 황후를 만난다고?

긴장되는 마음에 드레스 자락에 손바닥을 쓱쓱 문질렀다. 싸구려 천에 닿는 기분이 생경했다.

“……인사하기 전에 꼭, 옷은 새로 주셨으면 좋겠네요.”

데반이 눈을 꿈뻑꿈뻑 떴다.

그는 여전히 내 옷의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

얼마 안 가 덜컹거리며 마차가 멈췄다. 벌써 황궁에 도착한 건가. 난 초조하게 입술을 축였다.

“내리지.”

내가 알기론 데반도 제도나 황궁에 오는 것은 꽤 오랜만일 텐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마차의 문을 벌컥 열고는 먼저 내렸다.

순식간에 빛이 쏟아졌다. 난 부신 눈을 가물가물 떴다.

“하하!”

마차 바로 앞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

데반의 나직한 한숨 소리도 함께였다.

“이게 누구야!”

붉은 포니테일이 크게 흔들렸다.

그 아래엔 은빛 갑옷으로 감싼 커다란 흉통이 보였다.

설마.

난 입을 떡 벌리곤, 마차에서 내려오려던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스트릴라.”

데반이 짓이기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호명하는 게 아닌, 혼자서 곱씹는 이름이었다.

아스트릴라.

마차 앞에서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호탕하게 웃고 있는 그녀는, 아스트릴라 란티모스.

제국 최고의 또라이로 악명 높은 이 제국의 황태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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