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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36화 (36/123)

36화

그 순간, 사내의 눈썹이 휘익 올라갔다.

뭐지? 내가 억지로 웃는 걸 눈치챈 건가?

마차를 타고 오며 상상했던 궁중 암투가 떠올랐다. 어쩌면 제도 사람들은 훨씬 눈치가 빠른지도 몰랐다.

아……. 여긴 제도도 아니었지. 참.

“그럼 대공비 전하…….”

대공비 전하라니. 그의 얼굴에서 나오니 더욱 어색한 호칭이었다.

“그냥…… 에블린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아직 식을 올린 것도 아니니까요.”

“좋습니다, 레이디 에블린.”

그렇다고 레이디라니. 신관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혹시 레이디께서 이 녀석의 저주를 푸신 겁니까?”

뭐? 순간 몸이 움찔 떨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난 도움을 청하듯 데반을 바라봤다. 그는 태평한 표정으로 신관실을 한 바퀴 둘러볼 뿐이었다.

“어떻게 아셨죠?”

“그 말은 정말이란 거군요. 예언의 주인공이시라니!”

그가 내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아, 제가 그렇게 안 보여도 신력을 감지하는 데에 꽤 재능이 있어서요. 사실상 이 재능 덕에 신관이 될 수 있었죠.”

내가 태어났을 때도 분명, 신력을 감지할 수 있는 신관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는 신전 내에서도 흔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 신력을 파악했다고?

사내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로 보이진 않아서 난 눈을 가늘게 떴다.

“흠……. 그런데 레이디 에블린.”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력만 있는 게 아니군요? 이게 뭐죠?”

대답을 바란 게 아니었는지, 그는 내 손을 더듬더듬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저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마법도 아니고, 이건…….”

그가 돌연 내 손을 내던지듯 놓더니, 데반에게로 달려갔다.

“이봐!”

그러더니 데반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데반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지?”

“잠깐만 참아 봐. 나라고 좋아서 하는 짓이겠어?”

꼭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는 데반의 손을 주물럭댔다.

그러더니 이번엔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내가 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데반의 눈을, 특히 오른쪽 눈을 이곳저곳에서 관찰했다.

의외로 데반은 말리지 않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허어…….”

사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뭘 알고 있나?”

난 그제야 데반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경제적 도움을 넘어서서, 이자에게 초월적 존재에 대한 단서를 얻으려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자인가?

“이 오른쪽 눈, 레이디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데?”

데반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래서?”

“그래서 뭐?”

“그게 뭐냐고.”

그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번엔 나에게로 다가왔다.

“제가 인사를 깜빡했지 뭡니까!”

그러더니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난 눈을 깜빡이다가, 별수 없이 손을 다시 맞잡았다.

남자가 씩 웃었다. 티끌 하나 없어 보이는 화려한 미소였다.

“반갑습니다, 레이디. 펠로스 키베온입니다.”

키베온?

난 약간 눈을 크게 떴다.

키베온이라면 나도 들어 본 적 있었다.

백작가에 갇혀 일주일에 한 번씩 사교회를 열었을 때, 아주 작고 어린 키베온 공작가의 막내딸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딱 한 번이었지만.

키베온 공작가는 제국 제일가는 귀족가문이었다.

황족을 제외하면 가장 지위가 높은 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자가 신관이라고? 더욱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 신관은 꽤 대우받는 직업이었다.

신관이 될 수 있는 자는 운 좋게 신력을 가지고 태어난 평민이거나, 돈 많은 집안의 하급 귀족이었다.

달리 말해 그런 자들에게만 대우받는 직업이란 소리였다.

제아무리 대신관이 황제보다 권력이 세다 한들, 그 아래에서 일하는 신관은 그저 신전의 사용인일 뿐이었다.

공작가의 자제가 갈 곳은 아닐 텐데.

도대체 왜 신관이 된 거지?

난 관찰하듯 펠로스를 바라봤다.

그다지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관대한 편인 것 같았다.

내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헤실헤실 웃으며 차를 우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그거에 대해 말이야.”

펠로스가 데반에게 찻잔을 건네며 물었다. 우리는 펠로스에게 휩쓸려 의도치 않은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다.

“그다지. 신력도, 마력도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초월적 존재라는 것만 안다.”

“그리고 잘은 몰라도 강력해요.”

내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펠로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강력하겠죠.”

“뭘 알고 계신 거예요?”

“흑마법 아닙니까?”

흑마법이라니, 그도 고작 그것까지밖에 모르는 건가.

맥이 탁 풀려서, 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론 사실 그건 마법이 아니지만 말이죠.”

다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말해. ‘흑마법’이 마법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건가?”

데반이 끼어들었다.

“그야 악마 따윈 없으니까. 정확히는 신도 없고.”

난 충격적인 발언에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봤다.

악마는 그렇다 치고 신관의 입에서 신을 부정하는 말이 나오다니.

“신이 없다뇨? 신력은 존재하고 있잖아요.”

“그야 신력은 존재하죠. 마력도 존재하니까요! 신력이 신이 부여한 힘이라면, 마력을 부여한 존재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마력은 자연이…….”

“음, 맞아요. 신력도 비슷한 거예요. 자연처럼 어떤 관념이 부여한 힘이죠. 그저 사람들이 신이라는 구체적 존재를 만들었을 뿐이고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놨다. 궤변같이 들리기도 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 ‘흑마법’이라는 건 마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요?”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펠로스는 유난히 확신에 차 보였다.

“제가 신력만큼이나 마력 감지도 잘 하거든요. 세간에선 절 천재라고 하더군요.”

그가 이를 보이며 웃었다. 이가 반짝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흑마법에서 마력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바로 그거예요!”

그가 날 손가락질했다.

꼭 학생을 가르치는 열성적인 선생이라도 된 듯이.

“거기까진 우리도 생각했던 바다. 그 이상 아는 것 없나?”

데반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소란에 익숙한 듯했다.

“그 이상? 그 이상이라면 무슨?”

“……신전에서 흑마법을, 아니 그러니까 이 미지의 힘을 쓰는 것 같다.”

펠로스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신전에서? 정말로?”

그는 놀랐다기보단 신나 보였다.

“아하! 그걸 조사하려고 제도로 가는 거구나! 네 눈에 있는 걸 없애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더 급한 건 이쪽인데?”

펠로스가 날 빤히 바라봤다.

“급하다뇨?”

“그야, 레이디의 속에 그게 들어가 있잖아요. 이 녀석이야 오른쪽 눈에 갇혀 있으니 차라리 괜찮지만, 레이디는……. 흠…….”

제 턱에 손을 대고 펠로스가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곤 꼭 저녁 메뉴라도 묻는 듯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레이디는 얼른 해결하지 않으면 곧 죽겠는데요?”

“뭐?”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되물은 것은 데반이었다. 그는 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펠로스가 한없이 가벼워 보여도, 없는 말을 지어낼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오히려 사건의 당사자인 나보다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거겠지.

펠로스는 계속해서 가벼운 태도를 고수했다.

“그 흑마법, 편의상 흑마법이라고 합시다. 그게 몸 안에 많아지면 죽지요. 더군다나 레이디는 원래 안에 든 게 많지 않습니까.”

“안에 든 거라뇨?”

“신력 말이에요.”

그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러더니 의자를 등받이 있는 쪽이 앞으로 오도록 돌린 채 털썩 앉아 턱을 괬다.

아까까지만 해도 열성적으로 보이더니 순식간에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늘어진 모양새였다.

“어제 하루 종일 잠을 못 자서 말입니다.”

묻지 않은 변명을 덧붙인 그를 노려봤다.

“말해 줘요. 신력이 많은데 제가 왜 죽죠?”

“음…….”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말하자면, 레이디의 안에는 들어갈 공간이 많은 겁니다. 예를 들어보죠.”

어느새 다시 선생님 투가 된 그가 찻잔과 찻잔받침을 제 앞에 가져왔다.

그러곤 맑은 물을 각각 가득 따랐다.

“이쪽엔 깊은 찻잔이 있어요. 그리고 이쪽엔 아주 얕은 받침이 있지요.”

받침 위에 얕은 물이 찰랑였다.

“만약 이 두 개에 각자…….”

그가 찻잎 한 꼬집 들어 그것들 위로 떨어트렸다.

“찻잎이 들어갔다고 합시다. 어떻게 될까요?”

“……그야, 잎이 우러나겠죠.”

“그래요. 우러나겠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더 많이 우러나겠죠.”

그러니까 그는, 날 찻잔에 비유하고 있었다.

들어갈 곳이 많으니 흑마법도 더욱 많이 퍼진다는 소리였다.

“신력의 양이라는 건 단순해요. 결국 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 가진 신력도 달라지는 겁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나는 데반의 눈을 치료할 때 그의 몸에 먼저 신력을 흘려 보낸 일을 떠올렸다.

먼저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만 신력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

물론 치료를 위해 만든 공간은 선천적으로 지닌 공간과는 달리 영구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막대한 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저 내 몸에 신력을 받아들일 공간이 크다는 걸 뜻했다.

“레이디는 가진 공간이 크니까, 흑마법이 퍼질 공간도 크겠죠?”

난 점차 갈색으로 변해 가는 찻잔과 받침을 바라봤다.

찻잔에 담긴 물은 거의 맹물이라도 해도 다름없을 정도로 연했고, 받침대는 짙은 갈색이었다.

“하지만…… 공간이 크면 그만큼 농도가 옅어지잖아요. 그럼 결국 같은 거 아닌가요? 오히려 공간이 적은 게 더 위험할 수도―”

“물론 찻잎을 이 정도만 넣는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떨어진 찻잎이…….”

펠로스가 돌연 찻잎이 가득 든 통을 열더니 찻잔 위로 쏟아 부었다.

물을 가득 먹은 찻잎이 산처럼 쌓이더니, 잔 바깥까지 후두둑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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