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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35화 (35/123)

35화

난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단추 없는 옷을 입은 데반이라니. 그 누구도 상상해본 적 없는 모습이리라.

데반은 그런 날 바라보고 한숨 쉬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급하게 몸을 더듬어 봤다.

제도에 온다고 꽤 괜찮은 드레스를 입었으니, 이걸 팔면 어떨까.

그렇게 내려다본 옷은 여기저기 찢어진 채 피와 오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보석들도 대부분 떨어져 나가 있었다.

“……혹시 침대에 눕히기 전에 옷을 갈아입혀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런 차림으로 침대에 눕히다니.

“나보고 네 옷을 벗겼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 아무리 우리가 피의 서약을 한 사이라고 해도―”

“아니!”

난 급하게 그의 말을 막으며 소리쳤다.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옷에 단 단추까지 팔아야 하는 마당에 내 옷을 갈아 입혀 줄 하녀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그 소린, 데반이 밤새 의자에서 잠을 청했다는 소리기도 했고. 그래서 아까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었구나.

뭔가를 불평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랬다간 방을 나설 때 침대보 값까지 물라고 하겠어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나.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침대임에도 오물이 묻은 티가 확 났다.

데반은 문제가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침대보 값을 왜 물지?”

“네? 그야 이 정도면 빨아도 안 지워질 테니까요.”

“……침대보를 빤다고?”

그가 하도 황당하단 표정으로 물어서, 나는 순간 이 세계에선 침대보를 빨지 않던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럴 리가 없었다.

신전에서 지낼 때는 다섯 살 생일이 지난 시점부터 스스로 침대보를 빨았고, 백작가에서 지냈을 때는 하녀들이 대신했으니까.

“그럼 침대보를 빨지, 안 빨아요?”

“새로 사면 되는 것이 아닌가?”

아…….

난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세탁하는 편이 훨씬 수고로울 것 같은데.”

이자가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 황족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난 말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 그러는 거지?”

“아니, 됐어요.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내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데반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말을 해. 뭐가 문젠지.”

“됐다고요.”

그가 다시 말을 걸기 전에, 난 서둘러 드레스에 겨우 매달려 있는 단 두 개의 보석을 잡아 뜯었다.

“이거나 가져다 팔아 줘요.”

“……나에게 명령하는 건가?”

“제가 이 꼴로 나갈 순 없잖아요.”

“이미 그 꼴로 여기까지 왔다만.”

한마디도 질 생각을 안 하는 그를 밉지 않게 노려봤다.

“망신은 한 번으로 족해요. 그 돈으로 제 옷도 좀 사다 주고요.”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서도, 데반은 군말 없이 방을 나섰다.

난 막 방문을 닫으려는 그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제일 싼 걸로요!”

*

난 며칠 전, 킬리언과 삼자대면했던 그 연회를 떠올렸다.

어떻게 데반이 그 아름다운 드레스를 골랐을까. 힐다는 데반이 직접 골라 보냈다고 했지만, 그건 분명 집사의 선택이 틀림없었다.

거기에 결혼식 예복을 내가 골랐던 게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아무렴.

한 가지 더. 대공 저가 그토록 황량했던 것은 그가 눈이 안 보여서라든가 깔끔한 걸 좋아해서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소리냐면……데반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미적 감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제일 싼 게, 이거였단 거죠?”

싸구려에 대해 내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디에고 백작가에 살 때도 그다지 질이 좋은 옷들을 입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사 온 옷은 굉장히 화려했다……. 너무 화려해서 탈이었다.

무슨 공작새라도 된 것처럼 가슴팍에는 무지개 빛깔의 깃털이 달려 있었다.

그것들은 심지어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로 빠졌다.

괴한에게 납치당할 일이 있다면 퍽 쓸모 있는 옷일 테다. 지나다니는 길마다 흔적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가장 싼 걸 사 오라고 한 건 나였다. 그러니 불만을 말하기도 애매했지만……. 그래도 이건…….

“제일 싼 건 아니고.”

“네?”

“……추천받은 거다만.”

추천?

그 말에 난 더욱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차라리 가장 싼 거면 꾸역꾸역 이해해 보려고 했는데, 추천이라니?

“추천이라니. 대체…… 뭐라고 했기에 이런, 이런 옷을 추천해 주는 거죠?”

무슨 말을 하나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팔짱을 척 꼈다.

평생의 원수에게 입힐 옷이라고 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잔뜩 망신 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했을 수도 있지.

데반은 눈을 꿈뻑거렸다.

그는 아무래도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 어울리는데, 왜 그러지?”

아무래도 이 남자는 미적 감각에 정말로, 대단히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저주가 시력을 빼앗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보는 눈’을 빼앗은 건가?

“……뭐라고 하셨냐고요.”

데반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했다.

“주인이 누가 입을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내 옷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데반은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운명의 상대가 입을 거라고 했지.”

*

가슴팍에 달린 무지개 색 깃털을 다 떼어 내고 나서야, 난 겨우 여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예상대로 여관 주인은 더러워진 침대보를 보며 씨근댔다.

주인에게 동화 한 개를 더 건네며 데반을 바라봤다.

“일단 기사들과 유니스를 찾아야겠어요.”

“그보단 제도로 가는 게 우선이야.”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쯤이죠?”

“중간에 하룻밤 묵으려던 마을.”

마물에게 공격받기 직전, 그가 마을까지 한 시간이 남았다고 했던 말을 상기했다. 그 마을이구나.

전생에 했던 게임도 아니고, 죽으면 가까운 마을로 부활시켜주는 거야 뭐야. 기왕이면 바로 제도로 보내 주지.

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여기서 제도까진 얼마나 걸리는데요?”

“반나절은 넘게 걸리겠지.”

“걸어서는 아니겠죠?”

그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역시나 마차를 타고겠지. 마차를 빌리는 데는 돈이 얼마나 들까.

1년 동안 엘리운에서 지내면서 그곳의 화폐 단위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 제국의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우린 여관에서 나와 멍하니 길가에 서 있었다.

“……마차는 어떻게 빌리죠?”

데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문제는 이거였다. 나도 그도 그다지 시장 경제에 밝지 않다는 점.

엘리운은 마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었고, 데반은 아랫사람에게 명령이나 하지 직접 마차를 빌려 본 적은 없었다.

빌리는 방법을 알아낸다고 해도, 애초에 이 정도 돈으로 제도까지 갈 수 있을까?

난 짤랑이는 은화와 동화 몇 개를 손바닥에서 굴렸다.

“……무슨 방법이 있긴 한가요?”

언제까지고 이렇게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데반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신전으로.”

“네?”

내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신전이라뇨? 제가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아니, 전하도 싫어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우리가 왜 이 꼴이 됐는데!”

“그 신전 말고.”

데반이 저 멀리를 손가락질했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혼자만 우뚝 솟아 있는 상앗빛 첨탑이 보였다.

내가 알던 신전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훨씬 작았다.

“제도를 중심으로 그 주변 네 개의 마을에는 부속 신전이 있지.”

“부속 신전이요?”

“이 커다란 나라에, 그것도 대신관이 황제의 권력을 넘어선 나라에 설마 신전이 단 하나일 것 같나?”

그런 생각은 미처 해 보질 못했다.

그러고 보니 신전에서 살 때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제도에 있는 신전 말고 이 근처 마을에도 작은 신전들이 있단 건가요?”

“그래. 모두 합해서 다섯 개지.”

“그래서 거긴 왜 가는데요?”

“돈이 필요하니까.”

신전과 돈이라.

나에게 연상되는 건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뿐이었다.

“혹시…… 제 신력을 팔 생각이세요?”

“뭐?”

데반이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날 돌아봤다.

세상에서 그런 황당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그 작은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거지?”

“……그럼 신전에서 돈을 어떻게 얻는데요? 도둑질이라도 할 생각이세요?”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곤 다시 앞장서기 시작했다.

“가 보면 알아.”

*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아니, 이런 거라면 미리 말을 해 주든가.

“정말로 결혼을 했다고? 네가? 그 데반 란티모스가?”

신관복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곳이 신관에게만 허락된 개인실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신관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 같은 외양의 사내가 방정맞은 동작으로 날 훑어봤다.

데반과 편하게 얘기하는 걸 보면 꽤나 지위가 높은 자 같았다.

하지만 그에 비해 하는 행동은 무뢰한이 따로 없었다.

그의 화려한 생김새가 더욱 그런 이미지를 주는지도 몰랐다.

밝은 갈색의 머리칼마저도 그의 태도 덕에 빛나는 금발로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데반은 신전에 들어오자마자 이자를 찾았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라고 했다. 아무래도 그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내 신력을 이용하려는 건가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데반에게 친구가 있을 것 같진 않았는데.

남자는 드디어 관찰을 멈췄는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이쿠, 이거 실례했습니다. 이놈이 결혼을 했다는 게 영 믿기질 않아서.”

실례라는 걸 아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그의 눈썹이 휘익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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