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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34화 (34/123)

34화

차마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마, 마님! 꺄아악!”

데반의 뒤로 쓰러진 유니스가 보였다.

어느새 그녀의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가득했다. 몇 번이고 이쪽으로 다가오려다가 쓰러진 탓이었다.

지켜야 한다. 데반뿐 아니라 모두를.

이대로 데반이 무너지면 모두가 끝장이라는 게 명백했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주먹을 꼭 쥐었을 때였다.

툭― 데반이 나에게 이마를 맞댔다. 정확히는 힘을 잃고 나에게 기댔다고 하는 게 옳으리라.

그 와중에도 그는 나를 감싸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이마에 닿는 따끈한 감각에 차갑게 식었던 손끝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데반의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데반…….”

가물가물 눈을 뜨더니, 그가 날 바라봤다.

반쯤 감긴 눈으로 그가, 정확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검은 형체가 일렁거리는 오른쪽 눈으로.

검붉은 선혈이 그의 눈 위로 흘러내렸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날 살려.’

들리지 않지만,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왜일까.

그 순간 떠돌이 개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끝까지 날 원망하지 않던, 그 개의 맑은 눈동자가.

지켜야 한다. 살려야 한다. 지금은 할 수 있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을 수 있었다.

살릴 수 있었다. 살리고, 싶었다.

몸 깊은 곳에서 울렁거리는 신력이 느껴졌다.

아니, 이건 신력이 아니라…….

눈을 약간 크게 떴다.

그 힘이었다. 대공 저에서 도망칠 때 사용했던, 그 힘.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모든 걸 다 내 뜻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힘.

할 수 있을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힘이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닌 힘이기도 했고.

아니, 해야만 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힘은 내 안에서 요동쳤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고,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온몸을 조각낼 것처럼 날카로웠고, 한편 모든 걸 포용할 수 있을 것처럼 부드러웠다.

소란하고, 또 고요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순간, 파앗― 나를 중심으로 커다란 파동이 일었다.

새하얀 섬광과 함께 돌풍이 불었다.

그 탓에 흙먼지가 여기저기 날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날아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풍이 사라지고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마침내 보이는 광경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데반도, 그에게 발톱을 꽂았던 드래곤도, 마석이 뽑혀 멈춰 있던 거인 두 마리도, 기사들과 유니스까지.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꼭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그것도 아니면 죽은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도대체 이 힘은 뭘까. 이토록 강력한 힘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경외심까지 들 정도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데반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뒤엎었다. 살점이 너덜거리는 게 보일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

생리적인 거북함을 애써 참으며, 천천히 손에서 신력을 발산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다행히 데반의 상처는 제대로 치료됐다.

순식간에 그의 등이 아물고, 호흡이 안정됐다.

“데반, 데반! 정신 차려 봐요!”

데반을 이리저리 흔들고, 뺨을 때리고 소리쳐도 그는 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걸 어쩌지. 쓰러질 거면 드래곤만 쓰러지든가,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대로 이곳에 있을 순 없었다.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었다.

쓰러진 사람이 모두 합쳐 수십 명이었다. 그들을 나 혼자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이러다 마물이 먼저 깨어나면? 신전에서 상태를 확인하러 오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일어나 봐요!”

데반의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읏.”

돌연 몸 안쪽이 미친 듯이 아파 왔다. 난 가슴께를 붙잡고 억지로 숨을 들이마셨다.

거북하고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힘을 쓴 대가인가. 모르긴 몰라도 이 힘은 그 초월적 존재와 관련된 힘이었다.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게 오만이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안 돼.”

눈이 저절로 감겼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축 처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나른했고, 모든 걸 포기하고만 싶었다.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익숙하면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쯧, 안 되겠네.>

이 목소리는…….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것은 어린아이 같기도 노인 같기도 여성 같기도 남성 같기도 했다.

모든 걸 삼킬 듯 거대했고, 금방이라도 소멸할 듯 작았다.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 그게 나를 굽어봤다.

“……너…….”

혀끝에선 와해된 언어가 나왔다.

<이번 한 번뿐이야. 재미없는 건 싫으니까.>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날 죽일 거야, 아니면 살릴 거야?

넌 도대체…… 누구야?

말들이 입 안에서만 맴돌다 사라졌다.

탁― 그게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어디선가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날 반긴 건 화살이 잔뜩 박힌 사자가 아닌 데반의 머리통이었다.

데반의 머리통이라고?

난 내 침대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 새까만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긴 어디지?

눈을 찬찬히 깜빡였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꼭 지난밤 꿈을 떠올리는 것처럼 머리가 몽롱했다.

<쯧, 안 되겠네.>

<이번 한 번뿐이야. 재미없는 건 싫으니까.>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피 칠갑을 한 데반의 얼굴도.

그래, 그 마물들.

신전에서 조종하는 게 분명한 마물들이 날 찾아왔었고, 데반은 그들과 싸웠다.

그러다 드래곤이 나타나서 데반의 등허리에 날카로운 발톱을 꽂아 넣었고, 피 웅덩이가 가득…….

피? 순식간에 몸이 경직됐다.

“……데반!”

여전히 내 침대에 머리를 박고 있는 그의 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평소보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날 보곤 낮게 한숨 쉬었다.

“……드디어 일어났군.”

데반이 한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내 양 팔목을 두 손으로 붙들고, 데반이 눈을 맞춰 왔다.

“너,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어딘가 불안감이 엄습했다.

분명히 그 존재가, 힐다가 왔었다. 그 후에 어떻게 됐지?

“무슨 일인데요? 설마 힐다가―”

“힐다? 힐다라니? 그자, 아니 그 존재를 봤나?”

데반이 내 팔목을 부여잡았다.

“……아파요.”

움찔, 그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손을 풀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데요? 여긴 어디죠?”

“하.”

그는 지친 표정으로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마을 여관이다.”

“마을, 여관이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제야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방의 대부분은 낡은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벽도, 바닥도, 내가 누워 있는 침대도, 그가 앉아 있는 의자도 그랬다.

데반과 지나치게 안 어울리는 소박하고도 낯선 풍경이었다.

“……왜 여기인데요?”

그 말에 검붉은 눈동자가 날 빤히 노려봤다.

난 움찔 몸을 떨었다. 꼭 모든 게 다 내 탓인 것 같았다.

“내가 묻고 싶군.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네?”

“정신을 차려 보니 마을 광장 한복판이었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건지, 주위에 동전까지 굴러다니더군. 동냥하는 거지 새끼라도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지?”

“……네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아니, 그 마물은요? 기사들이랑 유니스는요?”

“그러니까 말했잖아. 내가 묻고 싶다고. 내가 기억하는 건 빌어먹을 드래곤이 내 등에 발톱을 꽂아 넣은 것 까지다. 넌 어떻지?”

난 기억을 곱씹어 봤다.

“그 후에…… 제가, 음.”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미지의 힘을 썼다는 걸 알면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 힘을 쓴 건가? 도망칠 때 썼던?”

아무튼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다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엔?”

“……모두가 쓰러졌어요. 저를 제외하고 모두가. 드래곤도요.”

계속하라는 듯 그가 턱짓했다. 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후에, 전하를 살렸죠. 신력을 써서 등에 난 상처를 모두 치료했어요. 그러곤, 갑자기 거북함을 느꼈어요. 아마도 그 힘 때문이겠죠. 처음부터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힐다가 왔나?”

그걸 힐다라고 할 수 있을까?

난 말을 골랐다.

“힐다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존재는 맞아요. 킬킬거리며 웃었거든요. 알 수 없는 장난기 섞인 말도 했고.”

“뭐라고 했지?”

“그러니까 분명……. 이번 한 번뿐이라고. 재미없는 건 싫다고…… 했어요.”

“재미없는 건 싫다고?”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생사를 오가는 일을 가지고 재미 운운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아무래도 힐다가 우릴 도와줬나 봐요.”

“도와준 게 광장의 구경거리로 만드는 건가? 내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 존재에 대한 분노가 한층 커진 것 같았다.

그래도 거기에 계속 쓰러져 있는 것보단 낫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저…… 그럼 우린 이제 어떡하죠?”

그보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었으니까.

*

우리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닌 돈이었다.

“돈이 없다구요?”

“……그래.”

“왜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는데 데반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불과 어제만 해도 광산이 어쩌니, 떵떵거리며 자랑하지 않았던가.

“그게 정말로 몸뚱어리만 보냈으니까.”

“그럼…….”

“아무것도 없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도. 심지어 검 한 자루도 없지.”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럼 어떻게 해요? 이 여관은 어떻게 들어왔는데요?”

그가 제 겉옷을 들어 보였다.

단추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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