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코델리아를 기억하세요?”
“누굴 말하는 거지?”
데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난 쓴웃음을 지었다.
코델리아에게 남몰래 했던 맹세가 떠오른 탓이었다.
다른 건 다 가져도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데반만큼은 그녀에게 주겠다는 맹세.
그런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니.
“……기억나지 않으면 됐어요.”
데반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겨우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그 아이를 말하는 거군. 신전에 있다던 아픈 여자아이.”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아이는 왜. 설마 동정심이라도 생겼나?”
“동정심이라기보단, 죄책감에 가깝겠죠.”
“네가 왜?”
“그 아이가 아픈 게, 제 탓일지도 모르거든요. 아니, 제 탓이 맞아요.”
내가 원작을 비틀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쯤 신전을 탈출해 데반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테니까.
대공 저에서 도망쳤을 때만 해도, 어떻게든 데반과 코델리아가 만날 거란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예언이 점지해 준 운명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이어질 수밖에 없는 원작의 주인공들이기도 했고.
하지만 결국 둘은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그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죄책감이라.”
데반이 작게 웃었다.
난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누군가 그러더군. 자신을 원망하는 건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이라고. 하등 도움 되지 않으니 그딴 감정은 버려 버리고, 그 대신 해결책을 찾으라고.”
“……누가요?”
그는 대답을 하는 대신 나에게 몸을 붙여 왔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얼굴에, 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눈 말이다.”
그의 오른쪽 눈에 검은 형체가 스멀거리고 있었지만, 그가 가리키고 있는 건 그쪽이 아니었다.
“난 고작 열 살 때, 저주에 걸렸지.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눈이 멀었다. 후계자를 뽑기 위해 치러진 그 빌어먹을 자격시험 때문에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목소리나 표정만 보면 그는 그 사실에 분노를 하지도, 울적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처음엔 동생을 원망했지. 그녀에게 표식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녀가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황위 계승자가 나 하나뿐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쉽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후엔 이 나라와 제도를 원망했지. 왜 이따위 자격시험이 존재하는 걸까. 그 후엔 신전이었고, 대신관이었고, 신이었다. ……가장 마지막엔 누구를 원망했을 것 같지?”
“……자기 자신?”
“……그래.”
데반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비쳤다.
휘몰아치는 감정들도.
“후회하시나요?”
“후회하지…… 못한다.”
“……못한다고요?”
“난 여전히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으니까. 내 존재와 탄생, 지독한 운명까지도.”
입술을 꾹― 안으로 말았다.
목구멍에 턱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매일 밤 했던 생각과 같았으니까.
어째서 막대한 신력을 가지고 태어난 건지, 어째서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어째서 코델리아를 희생시키고 데반을 속여 살아남아야만 하는 건지.
내 존재와 탄생, 지독한 운명…….
끊임없이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창가에서 시선을 뗀 그가 이번엔 날 바라봤다.
“스스로를 원망하는 거, 그게 어떤 건지 나도 알고 있으니…….”
데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웃었다.
“하지 말라곤 못하겠고, 그냥 적당히 하라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제 무릎 위의 서류로 시선을 떨궜다.
이번에야말로 말을 걸지 말라는 신호 같아서,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답지 않다고, 너무 많은 말을 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걸까.
그 역시 내가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적당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곱씹어 볼수록 심장이 울렁거렸다.
분노? 슬픔? 아니, 이건 억울함이었다.
탄생, 존재, 지독한 운명……. 모두 원해서 얻은 게 아니었다. 우리의 탓이 아니었다.
데반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원망하며 갉아먹을 필요가 없었다. 자책감 같은 감정은 버리고, 그 대신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우리의 원망은, 안이 아닌 밖을 향해야 했다.
*
마차 여행은 지루했다. 풍경을 구경하는 재미는 한순간이었다.
난 창가에 기대 졸았다가 마법사들이 준 쓸모없는 책을 읽었다가, 데반의 서류를 힐끗 살폈다.
“가만히 좀 있지.”
참다못한 그가 한마디 했다.
마차 안에서만 거의 열 시간째였다.
데반은 그동안 고개 한번 안 들고 서류만 끝없이 검토했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쑤신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잠은 마을에서 잔다고 했죠?”
“그래. 곧 도착하겠군.”
그가 창가를 눈짓했다.
서둘러 창밖을 바라봤지만 여전히 보이는 건 나무와 하늘뿐이었다.
“혹시 곧이라는 게…….”
“글쎄, 한 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된다.”
한 시간이라니. 데반의 시간 관념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난 들리지 않게 한숨 쉬곤, 다시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제도에 가자고 한 건 나였으니 불평할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제도에 도착하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사교 행사였다.
디에고 백작이 일주일에 한 번씩 사교회를 연 이유는, 제도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백작령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제도에 가면 다시 또 그 지긋지긋한 짓거리를 해야 하려나. 몸이 축 가라앉았다.
허리를 조이는 드레스를 입고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며, 귀족적 체면을 차리는 일은 나와 절대로 맞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비가 된 이상 가만히 성에만 있기도 힘들 것이다.
어쨌거나 데반은 황족이었으니까, 황궁에도 발걸음 해야 할지 몰랐다.
황궁이라.
이름만 들어도 불편함이 배가 됐다. 언젠가 본 듯한 궁중 암투 따위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슬쩍 데반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황궁의 사교계는 뭔가 다를까요? 다르겠죠?”
데반의 눈썹이 휘익 올라갔다.
그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신전과 흑마법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제도로 가는 게 아니었나?”
“물론 그건 그렇지만, 대외적인 이미지를 간과할 순 없잖아요.”
그가 조소를 터트렸다.
“나에게 대외적인 이미지가 있을 것 같나? 저주받아 제국 끝에 처박힌 나에게?”
그 말을 들으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데반이 사교회에 나가 누군가와 웃으며 대화를 하는 장면은 전혀 상상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원래 진정한 정보는 사교회에서 오간다고들 하잖아요. 신전과 흑마법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그래, 마땅히 참석해야 했다. 난 혼자 결론을 내렸다.
고개를 주억거리자, 데반은 황당한 눈빛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교회에서 대체 뭘 어떻게 했더라.
창가를 바라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봤다. 뻣뻣한 마음과는 달리, 꽤 자연스러운 미소가 나타났다.
백작가에서 하루 이틀 사교회를 연 게 아니었으니 좋든 싫든 이미 몸에 체득돼 있겠지.
“후…….”
낮은 한숨을 쉬며 멍하니 스쳐 지나가는 나무들을 볼 때였다.
응?
그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
너무 빨라 보지 못했지만 분명 뭔가가 움직였다.
저게 뭐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데반!”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맞은편의 데반을 끌어안고 몸을 낮췄다.
쾅―
그와 동시에 마차 위쪽이 나무판자처럼 가볍게 우그러졌다.
난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무슨 일이지?”
데반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에서 뭔가를 봤어요. 그게 우리를 공격했어요. 그러니까, 얼른 나가야 해요.”
횡설수설 말하자 데반은 허리를 숙인 채 문을 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멋대로 찌그러진 문이 쉽게 열릴 리 없었다.
그 순간, 쿵―
한 번 더 굉음이 들리고, 마차 천장이 더욱 아래로 꺼졌다. 이젠 고개를 들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젠장.”
낮게 욕설을 내뱉은 그가 문을 발로 쾅― 내리쳤다.
단단한 합금으로 만들어진 문이 약간씩 찌그러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그런 데반의 옆에서 어떻게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천장이 부서진 탓에 찌그러져 떨어진 커튼 봉을 찾을 수 있었다.
저걸 문틈 사이에 밀어 넣으면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막 엉금엉금 그쪽으로 기어갔을 때였다.
“으악!”
호기심이 죄였다.
바닥만 바라보고 갔으면 될 것을,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내 얼굴만 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것은 꼭 관찰하기라도 하듯 창문으로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
데반이 뒤에서 날 훅 끌어당겼다.
그 와중에도 겨우 커튼 봉을 챙겨 온 난, 그걸 그에게 건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 마물이에요.”
“그래, 마물이겠지. 이런 짓을 달리 누가 하겠어.”
데반이 퍽― 문틈 사이로 커튼 봉을 욱여넣었다.
그러곤 발로 몇 번 내리치자 마침내 문짝이 그대로 튕겨져 나가듯 떨어졌다.
“서둘러.”
먼저 나가라는 듯 그가 고갯짓했다.
난 달달 떨리는 몸으로 겨우 마차를 나섰다.
바닥에 닿자마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앞에 있는 나무를 겨우 더듬어 중심을 붙잡았다. 그러곤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자마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선 데반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허리춤의 칼을 빼 들었다.
난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건 집채만 한 크기의 거인이었다. 오돌토돌한 것들이 잔뜩 튀어나온 녹색 피부를 가진.
팔은 무릎까지 늘어져 있었고,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눈이 몸 이곳저곳에 총 다섯 개나 있었다.
내가 아까 마주쳤던 그 눈동자가 다리에 달려 있던 거라고 생각하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데반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금방 끝날 것 같진 않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어딜 바라봐도 거인이 가득했다.
우리를 둥글게 에워싼 거인은 총…… 여덟 마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