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고서를 뒤지겠다고 말했지만, 대공 저에 있는 책으론 턱도 없이 부족했다.
데반은 책에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있는 거라고 해 봐야 검술이나 병법에 관한 것, 그도 아니면 정치에 관한 게 다였다.
다행히 데반에게 고용된 마법사들이 흑마법과 관련된 몇 권의 고서를 빌려줬지만, 그것들 역시 떠돌아다니는 전설이나, 되도 않는 가설 따위를 늘어놓은 것이라 큰 도움이 되진 않을 성싶었다.
훑어본 책들을 창가에 대충 쌓아 두고,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전과 흑마법, 이름조차 모르는 그 초월적 존재.
정말로 신전이 흑마법을 사용했고, 그것의 근원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무언가라면.
결국 신전과 그 존재가 관련이 있다는 거였다.
문제는 내가 신전에서 지내는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흑마법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검은 형체와 비슷한 느낌도 든 적 없었고.
그러니 신전에서 흑마법을 쓰고 있는 거라면, 그리고 그게 신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살던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거라면…….
정말 그런 거라면, 신전에서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다는 소리겠지.
“어머, 마님?”
문이 덜컹 열리더니, 하녀가 놀란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녀는 청소를 하기 위해 방에 들어왔다가, 내가 있는 걸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니?”
“식사를 벌써 마치셨어요? 독서를 하실 건가요? 그럼 차와 다과를 준비할까요?”
그녀는 동그란 눈으로 조잘댔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얼굴이었지만, 부담스럽고 귀찮았다. 손을 내젓다가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그런 건 됐고, 혹시 영지 내에…… 도서관이나 서점 같은 곳이 있니?”
그녀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으음. 서점은 있지만…… 마님께서 찾으시는 건 없을 거예요. 풍속 소설이 대부분이거든요.”
어깨너머로 내가 쌓아 둔 책을 힐끗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너…… 글을 읽을 줄 아니?”
“조금요…….”
그녀는 어깨를 약간 움츠렸다.
평민이 글을 읽을 줄 알다니. 집에 돈이 많거나 어지간히 똑똑하다는 소리인데, 여기서 일하는 걸 보니 전자는 아닌 것 같았다.
똑똑한 하녀는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잘됐네. 그럼 혹시 제도에 가 본 적은 있어?”
“제도요? 아뇨…….”
“갈 생각은?”
더 커질 수 없을 줄 알았던 눈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이 세계에서 평민이란, 대부분 태어난 곳에서 여생을 끝내는 존재였다.
제도에서 사는 것은 언감생심, 한번 구경조차 가지 못하는 사람도 흔했다.
“이, 있어요. 마님!”
이름 모를 하녀가 손을 꼭 쥐고 말했다. 그 눈동자에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유니스예요, 마님!”
그래, 신전이 모든 일을 비밀로 하고 있다면, 그 비밀을 파헤치면 되는 일이었다.
그들이 정말로 악마와 손을 잡은 거든, 애초에 흑마법따윈 존재하지 않든.
확실한 건 신전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모든 의문을 해결할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유니스.”
“예, 마님!”
“제도로 가야겠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내 쪽에서 다가가는 것.
*
유니스에게 짐을 싸라고 명하곤, 난 방 안을 초조하게 배회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으니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신전이 흑마법을 쓴다니.
전생에 읽은 책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그저 코델리아가 데반의 저주를 풀고 함께 행복해지는 게 다였으니까.
신전의 추악한 면모가 나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코델리아를 학대한 이야기가 주였다.
코델리아.
입술을 잘근 씹었다.
제도에 가는 건 단순히 흑마법에 대해 조사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신전이 그 마물을 조종해서 날 노렸다는 게 거의 확실시된 지금, 코델리아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는 것 역시 확실했다.
신력을 잃었다고 알려진 나를 신전에서 찾을 이유는 그녀 말곤 없었으니까.
그녀를 구해 줘야 했다. 아니, 구해 주고 싶었다.
단순히 그녀가 원작의 여주인공이라서는 아니었다.
그저, 그 고통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그 상처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었으니까.
며칠 전 킬리언을 보낸 뒤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은 처지를 겪고 있는 코델리아를 사지로 몰고, 혼자 살겠다고 데반과 만나 심지어 결혼까지 했으니.
나에겐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자기 연민에 빠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이 자리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을 건 그녀였다. 모두 내 탓이었다.
그러니 내가 구해야 했다.
제도에 가서 신전을 직접 마주해야 했다. 그들이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 알아내야 했다.
본디 신전이란 신을 경배하고 신력을 사용해 제국을 이롭게 해야 하는 곳이었다.
만약 그들이 신력이 아닌 흑마법으로 마물을 조종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거기에 코델리아와 내가 증언해 그들이 고아원에서 행한 수많은 만행이 밝혀진다면…….
어쩌면 모든 걸 바꿀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어딘가로 떠나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코델리아와 데반은 순리대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리라.
코델리아를 구하는 것, 그게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
데반에게 제도로 먼저 출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차피 결혼식을 위해 가야 하니, 미리 도착해 흑마법을 조사하고 싶다고 말이다.
말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수락한 것뿐만 아니라, 함께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그 역시 대공령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황은 빠르게 진행돼, 우린 제도로 향하는 마차에 타 있었다.
제도와 대공령은 꽤 거리가 있어서, 마차로 가려면 꼬박 이틀이 걸렸다.
다행인 점은 마차가 엄청나게 컸고, 중간중간 쉴 수 있으며 잠은 근처 마을에서 잔다는 점이었다.
데반은 마차 안에서까지 웬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 마법을 건 마차라 덜컹거리지 않는다곤 해도 대단한 집중력이긴 했다.
“제도에는 큰 도서관이 있겠죠?”
“황실 도서관이 있다. 결혼식은 안 했어도 서약을 했으니, 너도 이용할 수 있겠지.”
그는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답했다.
“아까부터 뭘 하는 거예요?”
“급하게 왔으니,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야.”
아무래도 데반이 영지를 관리하느라 바쁘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난 입을 삐죽 내밀고 서류를 훑어보다 종이를 가득 채운 숫자의 향연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신전에 보냈던 자가 마도구로 연락을 취해 왔더군. 결혼식은 다음 달에 올리게 될 것 같다.”
다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말 걸지 말라는 뜻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
“그래요? 신전에서 허가했대요?”
“허가는 무슨. 영광이라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데반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하지만 황족들도 거절당하는 경우가 있다면서요. 특히…… 저주에 걸린 쪽은 더더욱.”
“그렇지. 그러니 어마어마한 돈을 함께 보낸 것 아니겠나.”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황족이니 어느 정도 돈이 있는 거야 당연히 이상하지 않았지만, 신전에서 혹할 정도의 돈이라면 보통 액수가 아닐 터였다.
“대공령은 척박한 영토라고 들었는데, 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났어요?”
“운이 좋았지.”
설명해 달라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자, 데반이 마침내 서류를 옆에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
“정말 운이 좋은 게 다야. 광산을 발견했거든. 황실에서 나에게 제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영지를 준 게 오히려 득이 됐지. 광산의 위치 또한 어중간하게 국경에 걸쳐 있어, 제도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기 곤란하게 됐다.”
“국경이면, 엘리운이요?”
“그래.”
“그럼 엘리운 쪽에서 권리를 주장하진 않던가요?”
“어쨌거나 광산 입구는 내 토지니까. 그들은 여전히 존재도 모르고 있을 거다.”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찌 보면 야비한 방법이기도 했지만,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라에서 그를 버렸는데 그라고 나라를 위해 애쓸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거기에 그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건 나였으니, 더욱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의외군.”
데반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붉은 눈은 한편으론 아름다웠고, 한편으론 조금 섬뜩했다.
“뭐가요?”
“제도에 가자고 먼저 제안한 게 말이야. 신전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었나?”
“……무섭죠. 여전히 무서워요. 하지만…….”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제도가 있는 남쪽으로 내려가느라, 점점 파릇파릇해지는 숲이 보였다.
신전을 떠올리면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두려운 건지, 화가 나는 건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돌아왔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인지도 몰랐다.
도망치는 건 이제 끝났다고, 그쪽에서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맞서 싸우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데반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날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형체가 일렁이는 적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난 입을 열었다.
“마음을 바꿨거든요.”
“바꿨다? 어떻게?”
“무섭다고 도망치기만 해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데반은 대꾸 없이 그저 날 바라봤다.
난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햇빛이 나뭇잎으로 내려와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보였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새파란 하늘을 응시하며, 난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이름을 꺼냈다.
“저, 데반.”
데반이 대답 대신 나를 바라봤다.
“……그 아이, 코델리아를 기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