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오셨습니까, 마님.”
그레이트 홀에 도착하자, 노집사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마님 소리에 난 움찔 몸을 떨었다. 다른 사용인들보다도 집사의 입에서 나오는 호칭에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대공 전하는 어디 계시죠?”
“곧 내려오실 겁니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먼저 테이블에 앉았다. 그가 차를 한 잔 가져다주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마님.”
노집사는 말끝마다 구두점처럼 마님 소리를 붙였다.
마님이라. 그는 데반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다고 했다.
제 아들이 결혼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그래 봐야 진짜 결혼도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지만.
집사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는지, 그 연회 이후로 자꾸만 그레이트 홀이 화려해져 갔다.
다른 성과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자꾸만 화병이 하나씩 올라간다든가 못 보던 장식이 생각이 생긴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전하께서 오시면 곧바로 음식을 내오겠습니다, 마님.”
깍듯하게 인사하곤 노집사가 사라졌다.
“일찍 왔군.”
홱, 고개를 돌렸다.
데반이 느릿하게 홀로 걸어오고 있었다.
“제가 일찍 온 게 아니라 전하께서 늦으신 것 같은데요.”
“오늘따라 유난히 조급한 것 같은데.”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무엇이.”
“마석이요!”
부러 모른 척하는 데반을 흘겨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직접 듣지?”
“직접이라니 누구에게요?”
덜컹―
성문이 열리고, 달그락거리는 갑옷 소리가 들렸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렌 경!”
그는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레이디. 절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어떻게 됐어요?”
카렌은 눈을 느리게 꿈뻑꿈뻑 뜨더니, 나와 데반을 번갈아 바라봤다.
데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레이디와 관련돼 있는 거였습니까? 그랬으면 좀 살살할걸.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그가 여전히 절그럭거리며, 테이블 맞은편으로 가 섰다.
“같이해도 되겠습니까?”
데반이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털썩― 의자에 앉아 투구를 벗은 그가 드디어 살겠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카렌 경!”
“재촉하지 마십시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드르륵거리며 트레이를 끌고 온 노집사가 데반과 나, 카렌의 앞에 음식을 날랐다.
그는 마지막에 유난히 크게 접시를 내려놓곤, 카렌을 노려봤다.
“대공비 마님께 언행을 조심히 하십시오.”
“예? ……예에? 대공비?”
카렌이 들고 있던 투구를 바닥에 던지듯 내팽개쳤다.
쿵― 듣기 싫은 소리에 데반이 얼굴을 구겼다.
*
카렌이 엘리운으로 떠난 건 나와 데반이 혼인 서약을 한 다음 날이었다.
그런데도 도대체 왜 결혼 사실을 모르나 했더니, 그는 엘리운에 가기 전부터 앉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제야 카렌이 언젠가부터 나만 보면 기사도 따윈 어딘가에 버려 두고 자꾸만 시비를 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도망친 책임이 모두 그에게 간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날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나로선, 그다지 미안하지 않았다.
실제로 경비가 허술했던 것도 맞았고 언젠가 한 번은 내 뒷덜미를 내려친 복수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으니까.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혼인을 하십니까? 식은요?”
“곧 치를 거다.”
“어디에서요? 혹시 제도로 가십니까?”
카렌의 질문을 곧이곧대로 들어 주던 데반이 마침내 폭발했는지 식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놨다.
“그딴 게 대체 왜 궁금하지? 마석에 대해서나 말해.”
카렌은 입을 꾹 다물고 그제야 품에서 주섬주섬 종이 뭉치를 꺼냈다.
“이게 다아― 제가 알아본 상단들입니다. 마석을 취급하는 곳이라면 하나도 빼지 않았지요. 심지어는 엘리운 바깥으로 유통하는 상단까지 찾아갔습니다. 아마 이젠 그곳에서 1년을 산 레이디, 아니 마님보다 제가 지리를 더 잘 알 겁니다.”
그는 매번 주절주절 말이 많았다.
“그래서 결론이 뭐죠? 찾았다는 거예요, 못 찾았다는 거예요?”
“못 찾았습니다.”
못 찾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엘리운의 모든 상단을 뒤졌음에도 마석을 찾지 못했다는 건, 한 가지를 뜻했다.
누군가가 일부러 마석을 숨기고 있다는 것.
데반을 바라보자, 그는 미간을 깊게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렌이 손에 든 나이프를 높게 들어 올렸다.
그는 마석을 찾지 못해, 내가 실망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건 아닙니다. 엘리운이 굉장히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동네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 엘리운을 대표하는 눈 표범 상단을 제가 설득하고, 닦달하고, 또 협박한 끝에 단서를 하나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게 뭐죠?”
“그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운명 같기도 했죠. 제가 막, 모든 상단을 돌고 나서 한숨 돌리기 위해 에일이라도 마시러 한 가게에 들렀을 때였습니다. 눈이 쌓인 새하얀 거리에 달빛이 내려앉는데―”
카렌이 눈까지 감고 제 영웅담을 펼치려 했다.
“이봐, 카렌 위보우.”
데반이 제 몫의 접시를 앞으로 슥― 밀더니 테이블 위로 턱을 괬다.
“정말 죽고 싶은 건가? 엘리운에 며칠 다녀왔다고 뇌까지 눈처럼 흐물흐물해졌나 보지?”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데반의 눈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카렌이 의기소침하게 몸을 웅크리며 입술을 꾹 물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다시 해 보지. 요점만.”
“그러니까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죽인 그 마물에 누군가 들러붙어서 뭔가를 하는 모습을 봤다고 합니다.”
“뭔가를 했다? 누가?”
“확실하게는 보지 못했지만, 희고 긴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희고 긴…… 신관복.”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둘의 시선이 쏠렸다.
“그들이 뭘 했다고 하죠?”
“뭔가를 회수해 가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 후, 마물을 해체했을 때 마석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니 아무래도 마석을 가져갔다고 보는 게 맞겠죠.”
“이상한 점은 없었다고 하던가요?”
카렌이 씨익― 미소 지었다.
마치 이 질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상한 점은 총 두 가지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보통 마석을 캐기 위해선 마물을 완전히 해체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 경우엔 마물의 사체가 거의 깨끗했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낸 창흔만 제외하면요.”
“두 번짼 뭐지?”
“두 번짼……. 그들이 떠나기 전에 마물에 뭔가를 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멀리서도 보일 만큼 확연히, 새까만 연기가 올라왔다고 하더군요.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그게 꼭…….”
카렌이 몸을 낮추고 속삭였다.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몸을 수그렸고, 데반은 한심한 표정으로 우릴 바라봤다.
주위를 둘러보던 카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꼭…… 흑마법을 쓰는 것 같았답니다.”
테이블 위에 침묵이 흘렀다.
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흑마법? 그게 뭐지?
“흑마법이라니. 웃기는군.”
침묵을 깬 건 데반이었다.
그는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식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전하! 절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너도 못 믿고, 술 마시다 만났다는 그 목격자도 못 믿는다. 흑마법이 사라진 지가 언젠데.”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카렌 역시 반신반의하고 있던 듯, 데반을 따라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서 흑마법이 뭔데요?”
난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흑마법.
그야 물론, 어감으로도 좋지 않은 마법인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의아한 건 전생에 읽었던 원작 속에는 그런 설정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신전이 흑마법을 쓰는 게 정말이라면, 책에 나올 법도 한데…….
“구시대의 유물이지.”
데반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카렌은 갑자기 허기가 돌았는지 수프를 거의 마시는 것처럼 해치우더니, 고기를 우악스럽게 잘랐다.
“그러니까 레이디, 아니 마님. 흑마법이란 한마디로 악마와 계약한 마법을 말합니다.”
피식, 데반이 비웃었다.
“악마 따윈 존재하지 않아.”
“그럼 도대체 흑마법은 뭐랍니까? 마탑의 마법사들이 모두 인정했잖습니까. 그건 보통의 마력과 마법식으로는 시전할 수 없는 마법이라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마법이라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마법이 아니면 신력입니까?”
“마법도 신력도 아닌 또 다른 무엇이지.”
나는 식기를 내려놓고 끼어들었다.
“또 다른 무엇이라뇨?”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마법도 신력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힘.
“근원이 다르단 소리다.”
“근원이요?”
이번엔 카렌이 질문했다.
데반은 제 앞의 고기를 우아하게 썰며 대답했다.
“신력의 근원은 신, 마력의 근원은 자연. 흑마법에 사용된 건 마력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뭐라고?
데반이 말을 뚝 멈추고 날 바라봤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하지 않아도 우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근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초월적 존재. 그건 어쩌면…….
“뭐요? 그래서 흑마법의 근원이 대체 뭐랍니까?”
멍청한 표정으로 나와 데반을 번갈아 보는 카렌을 무시한 채,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법사들을 불러 흑마법에 대해 조사하라 명하지.”
“저는 고서에서 찾아볼게요. 카렌 경은 다시 엘리운에 가서 다른 단서가 없는지 알아봐 주세요.”
“……예? 다시요?”
카렌은 멍청하게 눈을 꿈뻑거렸다.
“저…… 지금 왔는데요?”
그가 억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