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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29화 (29/123)

29화

“싸워야 하는 걸까요?”

내 물음에 데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그럼 내 눈에서 이걸 어떻게 몰아낼 생각이지? 설득이라도 해 볼 생각인가?”

데반이 제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빈정댔다.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전하께서도 그게 옆에 있고부터 앞을 대충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서요. 저도 그것 덕에 이 성을 탈출할 수 있었고.”

“지금 내 오른쪽 눈이 안 보이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이야기해 봐야 둘 다 아는 게 없으니, 진전이 있을 리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방 안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때,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종이 뭉치가 보였다.

“이건 뭐죠?”

데반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다, 슥― 내 쪽으로 밀었다.

펼쳐 보니 웬 지도였다.

대충 훑어보자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대공령이었다.

그 뒷장에는 성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는데, 전문가의 솜씨로 보이진 않았다.

“직접 그리신 건가요?”

“설마.”

데반이 낮게 한숨 쉬더니,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그자가 바닥에 떨어트리고 간 거다.”

“그자라면…….”

킬리언을 말하는 거였다.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이거였던 모양이었다.

“하도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 챙길 정신도 없었겠지.”

데반의 말에 난 눈을 내리깔고 손때가 잔뜩 묻은 지도를 바라봤다.

이곳저곳에 엑스 표시가 쳐 있었다.

“영지의 지도는 집사에게 부탁해 얻은 것 같던데, 나머진 널 찾아다니면서 직접 그린 모양이더군.”

난 원래대로 종이를 뭉쳐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돌려주지 그래요.”

“이제 필요 없잖나. 애초에 내 성과 영지 지도를 그자가 갖고 있는 것도 불쾌하고.”

“그럼 태우든가요.”

데반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종이 뭉치를 그대로 벽난로로 던졌다.

화르륵― 순식간에 불이 붙은 종이가 타들어 갔다.

난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고, 데반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냐. 해야 할 일이 가득이다.”

“해야 할 일이요? ……하지만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뭐?”

데반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해결할 수 있는 것도, 해결해야만 하는 것도 많지. 일단 가장 먼저, 근시일 내로 신전에 가서 식을 올릴 거다.”

“네?”

“결혼식 말이다. 어제부로 우린 어엿한 부부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혼식이라니? 신전에서 식을 치른다니!

“어차피 피차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닌데 식까지 치를 필요 있어요?”

“말했잖나. 결혼은 명분, 그리고 계약이라고. 전 제국에 소문이 나지 않으면 곤란한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닌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그렇긴 했다. 기왕 결혼한 이상, 대대적으로 공표해야 의미가 있었다.

“……신전은 안 돼요.”

하지만 신전이라니.

내가 어떻게 도망 나왔는데 그곳에 제 발로 들어간단 말인가. 그것만은 안 됐다.

“아아……. 신전이 널 찾고 있었지, 참. 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신전에, 제 가족들에. 안 되는 것투성이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절 지켜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를 빤히 보고 말하자, 데반이 멈칫하며 시선을 피했다.

“……넌 대공비다. 신전이 널 찾는다 한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널 데려가지 못해.”

“하지만…….”

마음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신전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잔학무도했다. 필요한 걸 얻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무슨 수라도…….

“아!”

돌연 소리치자, 데반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뭐지?”

“확인할 게 있어요. 그때 그 마물이요.”

힐다 일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지만, 나에겐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엘리운에서 죽인 그 마물 말인가?”

“네, 그거요! 사체에서 마석 챙겨 오셨죠?”

“그 상황에 마석을 챙겨 올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안 챙기셨어요? 마석은 힘의 근원이에요. 거기다 그 안에 단서가 있을 수도 있단 말이에요.”

“단서?”

분명 그때, 마물이 내게로 도약했을 때였다.

난 그 역겨운 초록색 비늘 사이에 인위적으로 박혀 있는 것 같은 마석을 봤었다.

내가 본 게 맞다면, 그건 신전이 마물을 조종했다는 증거였다.

“제가 아주 어릴 때, 디에고 백작에게 입양되기 전에 신전 산하의 고아원에서 지낸 건 알고 계시겠죠.”

데반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몇백 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막대한 신력을 가진 아이였어요. 하지만 저 외에도 그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신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누구는 아주 적었고, 누구는 꽤 많았죠.”

“무슨 소릴 하려는 거지?”

“신전에선 그 아이들에게서 신력을 쥐어짜 냈어요. 그렇게 신력을 빼앗긴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

“죽진 않아요. 그저, 텅 빌 뿐이죠.”

난 아이들의 텅 빈 동공을 떠올렸다.

차오르면 빼앗고, 다시 차오르면 빼앗고. 그걸 반복하다 마침내 너덜너덜해진 아이들이 여기저기로 팔려 갔던 일을 떠올렸다.

“너…… 그 마물이 신전과 관련 있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신전에서는 아이들의 신력을 모아, 마석에 보관했어요. 정확히는 마석과 똑같이 생긴, 하얀 보석에요. 보통의 마석은 붉은빛을 띠잖아요.”

“그 마물에, 하얀 마석이 박혀 있었다고?”

“……맞아요.”

난 고개를 끄덕였고, 데반은 말이 없었다.

신전의 대외적 평판을 생각한다면 믿기 힘든 이야기긴 했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 마물은 조사해 주세요.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믿지 않는다고 누가 그랬지?”

데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높아진 눈높이에 그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카렌을 엘리운으로 보내지. 누가 이미 처분했다고 하더라도, 높은 가격으로 마석을 구하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거다. 만약 그럼에도 찾지 못한다면…… 신전에서 먼저 수를 썼다는 소리일 테니.”

“……믿는다고요?”

데반이 제 책상 위의 종을 딸랑― 울렸다.

그러더니 날 바라보고 어딘가 고결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신전에게 당한 거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거든.”

*

킬리언은 그 날 이후로 성에서 자취를 감췄다.

가끔씩, 그가 가만히 서서 중얼거리던 게 떠올랐다. 도와줄 수 있어, 도와줄 수 있어…….

그럴 때면 어쩐지 오싹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뭘 도와준단 말인가. 그가 날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마님!”

그것도 잠시였다. 킬리언에 대한 생각은 금세 머릿속을 빠져나갔다.

생각을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이었다.

“이게 좋으세요, 아니면 저게 좋으세요?”

내 눈에는 똑같아 보이는 하얀 리본 두 개를 들고, 재단사가 내 앞에서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난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오른쪽을 손짓했다.

“그럼 이 진주와 저 진주 중에는 뭐가 좋으세요?”

이번엔 눈도 뜨지 않고, 대충 왼쪽을 손짓했다.

재단사와 그녀를 따라온 몇몇이 진지하게 목록을 작성하고, 장신구를 분류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오는 풍경이었다.

이래서 결혼식 따위는 하기 싫다고 했던 거였는데.

데반은 모든 걸 빠르게 진행했다.

신전에서 식을 올리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날로 제도에 사람을 보냈다.

신전에서 치르는 식은 제국민들에게 대단한 영광으로 여겨졌다.

황제보다도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관의 축복을 받을 수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니 그곳에서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됐다.

대신관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든가 그도 아니면 황족이어야 했다.

물론 데반의 경우엔 둘 다 해당 됐다.

모든 제국민이 부러워할 것이다. 아마 우리 둘만 빼고 그렇겠지.

그는 결혼식 준비를 모두 나에게 일임했다. 말이 일임이지, 그저 떠넘긴 게 맞았다.

자신은 영지를 다스리는 일만으로도 바쁘다고 말했는데, 모두 핑계로만 보였다.

귀찮았겠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나 역시 귀찮았으니까.

그 날 이후로 많은 게 변했다.

일단 내 방 앞에 두 명의 병사가 항상 상주하게 됐다.

데반은 내 안전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어쩔 땐 날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 번째, 난 대공령과 이 성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명목상 올라간 대공비의 자리였지만 주어진 일은 해야 했으니까.

데반이 시켰다기보단, 내가 나서서 그러겠노라 했다.

세 번째로는 내 방에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게 됐다.

지금 드레스와 예복을 신난 표정으로 늘어놓고 있는 재단사도 그중 하나였다.

난 심드렁한 표정으로 드레스를 바라봤다.

처음엔 예쁘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보면 볼수록 그게 그거 같았다.

자기 옷은 자기가 정할 것이지.

짜증이 나다가도, 데반의 미적 감각을 떠올리면 또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제 성의 정원마저 병사들에게 맡겨 버리는 자였으니까. 황량하기 그지없던 대공성을 생각하면 대단한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리라.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만하자.”

재단사가 눈에 띄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준비해 둔 것의 반절도 선보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었고, 난 그때 꼭 물어야 할 말이 있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자 포슬거리는 곱슬머리를 가진 앳된 여자아이가 서둘러 내 옆으로 왔다.

힐다가 사라지고 새로 구한 내 하녀였다.

“너 이름이…… 아니다. 너, 여기 남아서 정리를 돕도록 해.”

“아……. 네, 마님!”

그녀는 또랑또랑하게 대답하곤, 내가 방을 나설 때까지 그곳에 서서 날 바라봤다.

이번엔 또 무슨 소문이 돈 건지, 선망 어린 눈길로 보는 게 부담스러웠다.

데반과 나에 대해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은 세기의 사랑 이야기라도 퍼지고 있나 보지.

그녀는 나와 가까워지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너무 티가 나서, 오히려 꺼림칙했다.

딱히 싫은 부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녀의 태도가 좋으냐 싫으냐 한다면 사실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난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게 두려웠다.

힐다는 내가 친해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했으니…….

배신감을 느낀 걸 보면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정을 주고 있었던 걸까.

힐다, 그녀를 생각하면 두려웠다가 화가 났다가 황당했다가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데반은 7년 전부터 절 따라다니던 그 형체 없는 존재가, 정신을 차린 후부터 사라졌다고 했다.

힐다 역시 며칠 전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하루아침에 주변에서 사라져 버리다니.

뭘 알아야 데반의 눈을 치료할 수 있을 텐데, 이래선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다시 나타나 줬으면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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