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28화 (28/123)

28화

내 어깨를 아프도록 붙잡은 채 킬리언이 입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은 애절한 표정이었다.

“집이…… 집이 싫다면, 둘이 도망치자. 응? 에블린……. 이건 아니잖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마침내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난 무감한 표정으로 눈에 담았다.

“에블린…….”

그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그를 시험하기 위해 벌이라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내가 도와줄게, 내가…….”

“네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아니.”

돌연, 킬리언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뭔가를 떠올리기라도 한 듯 허공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래, 도와줄 수 있어!”

킬리언은 정말로 실성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꾸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소름 끼치는 모습에, 난 겨우 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벗어났다.

어느새 내 옆으로 온 데반이 집사 쪽을 눈짓했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홀을 빠져나왔다.

붙잡을 줄 알았던 킬리언은, 뭐에 홀린 건지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도와줄 수 있어, 도와줄 수 있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

생각보다 개운하게 잠에서 깼다.

따지고 보면 이 방에서 지낸 건 고작 며칠이었고, 엘리운에서 지낸 건 1년도 넘었는데 꼭 집에 온 것 같이 마음이 편했다.

하긴, 엘리운에선 항상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 백작이나 킬리언, 신전에서 날 찾아올까 봐.

신전.

뒤로 미뤄두었던 생각을 떠올리자 순식간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 마물에 대해 알아봐야 했다.

정말로 그 마물이 신전에서 보낸 거라면, 대책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려면 일단 데반을 만나는 게 먼저였다.

“……힐다?”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주위를 둘러봐도 힐다가 보이질 않았다.

그녀는 보통 내 침대를 지켰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설렁줄을 당겼다.

짤랑이는 종소리가 났지만, 여전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힐다의 방은 바로 옆이었다. 평소라면 달려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설마 아직 자나?

의아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벌써 해가 중천이었다.

어쩌면 급한 일이 있어 집사에게 불려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꽤나 큰 사건이 터졌으니, 수습하는 데에 품이 드는지도 모르지.

네글리제 위로 가벼운 숄 하나를 걸친 채 방을 나섰다.

바로 옆방의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힐다?”

달칵― 잠기지 않은 문은 가볍게 열렸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부신 눈을 가물가물 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복도로 나와 방문을 닫았다.

내 방문을 확인하고, 다시 힐다의 방문을 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탈출할 때 몰래 그녀의 옷을 꺼내 입었던 옷장도, 그 모습을 비춰 봤던 거울도 없었다.

“아!”

난 문을 쾅 닫고 빠르게 그레이트 홀로 내려갔다.

방이 바뀐 것이 분명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지 1년도 넘었는데, 힐다의 방도 달라졌겠지.

난 애써 위화감을 꾹꾹 누르며, 홀로 향했다.

“집사!”

마침 노집사가 홀의 장식들을 치우고 있었다.

되도 않는 태피스트리를 돌돌 마는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네글리제 차림의 날 보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힐다는?”

“예?”

“힐다는, 어디에 있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내 것일 리 없는 기억의 파편들이 떠올랐다.

“아가씨, 괜찮으신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니, 됐으니까 힐다 말이에요. 힐다, 그 애가―”

마른침을 삼키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다니, 대체 뭘요?”

“예? 그러니까…….”

노집사가 답지 않게 말을 골랐다.

“힐다……가 누구입니까?”

*

기억은 서서히 돌아왔다.

<안녕?>

<이해하려고 할 필요 없어.>

<마음뿐이겠어?>

맨 처음 그게 내 꿈에 나타났던 것부터,

‘아, 아, 아니면 아가씨는…… 이, 이런 제 모습이 좋으신 건가요?’

<‘미안. 네 주위에 있을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어.’>

데이지 꽃 앞에서 처음 힐다를 의심했던 일,

‘힐다는 힐다랍니다. 힐다는 처음부터 힐다였어요.’

<‘내가 읽을 수 있는 게 마음뿐이겠어?’>

바로 어제저녁까지.

하지만 잊고 있던 기억까지 돌아온 나와 달리,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힐다를 기억하지 못했다.

모두의 머릿속에 꼭 그 부분만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럼 그동안 제 목욕 시중을 누가 들었겠어요!”

“글쎄요……. 그러고 보니 분명 1년 전에는 하녀가 한 명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바로 어제까지도 있었다고요!”

노집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했고,

“그때 정원 산책을 할 때, 제 옆에 있었잖아요! 아니, 바로 어제도 정문에서 같이 환영해 줬잖아요. 정말 기억 안 나요?”

“그……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디 에블린. 혹시 절 놀리시는 건가요?”

카렌은 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유일하게 내 말을 믿어 준 건, 데반뿐이었다.

난 그의 집무실에 막무가내로 쳐들어갔다.

책상을 쾅 내리치고 지금까지의 일을 빠짐없이 설명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힐다란 하녀가 존재했단 말인가? 우리 중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맞아요.”

“그리고 그 하녀가 그 초월적 존재였고?”

“그런 것 같아요. 어쩌면 힐다라는 인간에게 빙의하듯이 들어간 건 아닐까도 생각해 봤지만…….”

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는 ‘힐다는 처음부터 힐다였다’고 했다.

“몸을 빌렸다기보다는, 몸을 만든 게 아닐까 싶어요.”

“……대체 어디까지 가능한 거지?”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소파로 이동했다.

그러곤 맞은편에 앉으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소파와 집무실 풍경까지도 1년 전과 그대로였다.

하긴, 노집사는 1년간 정신을 잃은 제 주인을 두고 함부로 배치를 바꿀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그, 초월적 존재와 인연이 있다고 했었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데반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신이라는 작자를 아는지도 모르겠다고.

서둘러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니까 5년 전, 아니지. 이제 햇수로는 7년 전, 그게 처음 내 주위에 나타났었다.”

“주위에 나타나다뇨? 힐다처럼요?”

“아니, 그저 주위에 존재했어. 형체도 없이 그저 주위에…….”

“형체가 없는 걸 어떻게 알죠? 그때는…… 앞이 보이지 않았잖아요.”

조심스러운 내 말에 데반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난 눈이 멀었었지만 집중하면 잠깐은 형체를 볼 수 있었거든. 음…….”

설명하기 어려운 듯했다.

“말하자면, 네가 여기에 있는 거나 이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것……. 모두 형태는 알 수 있지만 네 얼굴이라든가 가구의 무늬는 알 수 없는 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나도 모르겠다만, 7년 전부터 그랬어. 그래, 그 이상한 킬킬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힘이 생겼지.”

“…킬킬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럼 그게 전하의 곁에서 존재하면서, 힘을 줬다는 건가요? 그 덕에 사물의 윤곽이나마 알아챌 수 있었고?”

데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모르지.”

“그럼 혹시……. 1년 전, 제가 이곳에서 도망갈 때 사용했던 힘도 그게 준 걸까요?”

“벽을 타고, 잠긴 문을 열고, 결계를 부순 걸 말하는 건가?”

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네, 그거요. 이상하게 모든 게 제가 원하는 대로 됐거든요. 온몸에 힘이 넘치는 것 같고…….”

“그때 그게 네 주위에 있었나?”

“그건 아니에요. 다만…….”

그날의 일을 떠올려 봤다.

그의 오른쪽 눈을 치료하기 위해 모든 신력을 끌어올리고, 알 수 없는 그것과 싸우다 결국엔 몰아냈던 일을.

“아마 치료하는 과정에서 제 안에 들어온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네 안에 들어갔다고?”

“전하의 오른쪽 눈에도 검은 형체가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어떤 기운이 제 안에 들어온 게 아닐까 싶어요.”

“하아…….”

깊은 한숨을 쉰 데반이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그럼 대체 이게 뭐라는 거지? 형체 없이 내 옆에 몇 년이나 존재했고, 네 하녀였다가, 내 오른쪽 눈에도, 네 안에도 있다고?”

이해가 안 가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난 곰곰이 생각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력은 신이 내려 준 힘이잖아요. 마력은 자연이 주는 힘이고요.”

계속해 보라는 듯 그가 턱짓했다.

“그건 신력과 싸우는 것 같이 보였어요. 그러니까……. 그것도 어떤 힘인 거죠. 우리가 대화한 그 누군가는 그 힘의 근원인 거구요. 신력으로 따지자면 신, 마력으로 따지자면 자연.”

“결국 똑같은 이야기로군. 신과 비슷한 초월적 존재라는 게 아닌가.”

“말하자면 그렇죠.”

“초월적 존재와 싸워야 한다라…….”

싸운다, 싸운다라…….

번뜩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싸워야…… 하는 걸까요?”

“뭐?”

데반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정말로 그 존재와 우리가…… 꼭 싸워야만 하는 걸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