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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27화 (27/123)

27화

열여덟 살, 데반에게 납치당하기 불과 몇 달 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킬리언을 이용하고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내가 명령한 대로 제도에 소문을 냈고, 데이지 꽃향기가 나는 펜던트를 구해다 줬다.

숙련된 집사라도 되는 것처럼 내 수발을 들었고, 그 대가는 보통 한 번의 미소나 포옹 따위였다.

꽤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얼마 안 가 있을 데뷔탕트 덕분에, 디에고 백작이 나를 지하실에 부르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는 최소한 겉으로는 평범한 백작 영애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그래 봐야 방에서 잠을 자고, 방에서 일어나, 찬물로 씻고,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할 수 있는 것뿐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만족하며 데반이 나를 납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도 그랬다.

시중드는 시녀 한 명 없이, 난 사용인들이나 먹을 딱딱한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 뒤, 내 방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어째서였을까. 그날따라 주방 뒷문 틈으로 보이는 뒷마당이 눈에 밟혔다.

3년 전, 나 때문에 죽은 강아지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죄를 마주하는 건 힘들었다. 참회할 수 없기에 더욱 그랬다.

나는 다시 강아지를 살려 줄 수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하다못해 백작에게 복수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나 혼자 살아남는 것에 급급했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리화하며 마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고작 뒷문을 나서 몇 발자국만 가면 되는 일을, 3년 동안 미뤄 온 이유는 그런 것일 테다.

천천히 뒷마당으로 향했다.

사용인 모두가 식사를 하느라 주방엔 아무도 없었다.

시종이 강아지를 묻었던 일을 떠올려 봤다.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는 것만 기억났고, 자세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았다.

정원엔 나무가 지나치게 많았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나는 내가 죽인 생명을 위해 기도할 수도 없었다. 어디에 묻혀 안식을 취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나마 가장 커다란 나무 앞이었다.

치맛자락에 흙이 묻는 것도 모른 채, 난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니 있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몰라, 시선이 요동쳤다.

“……미안해.”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작은 목소리는 그 어떤 메아리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미안.”

한 번 더 속삭였다.

내가 너와 친해지지만 않았더라면, 너를 챙겨 주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널 챙겨 주는 걸 백작에게 들키지만 않았더라면…….

넌 여전히 살아 있을까?

축축한 흙 위에 슬쩍 손을 얹었다.

까맣고 툭 튀어나온 코가 생각났다. 이렇게 축축했는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가 급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모질게 대할걸. 모른 척할걸.

그랬으면 백작이 너와 네 아이들을 인질로 붙잡아 협박했을 리도 없는데.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더 좋았으리라.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막 일어나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주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사람 그림자가 뒷문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커다란 나무 뒤로 숨었다. 수풀이 가득해 내 몸 하나 정도는 가리기 충분했다.

쭈그리고 앉아 슬쩍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누군가 내가 앉았던 곳 근처에 털썩 주저앉았다.

각도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일하기 싫어 잠시 쉬고 있는 시종인지도 몰랐다.

그럼 아무렇지도 않게 흙을 털고 나와 들어가도 되리라. 저도 농땡이 피웠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을 테니.

그래, 그냥 서로 모른 척하자. 그런 생각으로 막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미안.”

난 다시 몸을 낮췄다.

미안하다니?

설마 이자도…… 강아지를 위해 온 건가?

여기 묻힌 걸 알고 있는 자라면……. 강아지를 묻었던 그 시종인지도.

옆으로 몸을 조금 더 뺐다.

“……나 때문인 거 나도 알고 있어. 다만…….”

누군지 모를 사내는 자책하고 있었다. 목소리에 물기가 있었다.

난 그제야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익숙하다는 걸 눈치챘다.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흙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해 줘.”

중얼거리듯 말하고 사내는 뒷문으로 향했다.

난 수풀에서 나와,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커다란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반듯하게 곧은 허리, 단정한 걸음걸이, 거기에 결 좋은 은발까지.

그였다, 킬리언 디에고.

힘이 풀린 다리로 겨우 걸어가, 나무 앞에 주저앉았다.

사내가 흙 위에 내려놓은 건, 임신한 개를 위해 내가 종종 챙겨 주곤 했던 퍽퍽한 소시지였다.

“흐으…….”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킬리언이 이 소시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임신한 개를 챙겨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걸, 백작이 궁금해 마지않았던 내 하나뿐인 약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였다.

3년 전, 개를 인질로 붙잡으라고 백작에게 고한 사람이.

소시지를 아무렇게나 짓뭉갰다.

고작 이딴 것 때문에, 이 아이가 죽었다.

고작 이딴 것 때문에.

강아지가 죽던 날, 킬리언이 내 방까지 따라왔던 일이 떠올랐다.

평소와 달리 의사를 불러 날 치료해 주고, 백작을 막아섰지.

그때는 조금쯤 그가 안쓰럽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내가 지하실에 드나들고부터, 그가 맞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향한 그 갈망에 비겁함이 가득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그를 탓한 적 없었다.

우리는 어렸으니까.

내가 그를 이용하는 것처럼 그도 날 이용할 뿐이라고, 그렇게 서로를 뜯어먹으며 살아남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게 위선이었다.

문을 가린 채 내가 치료를 마칠 시간을 벌어 주던 그 모습도, 순종적으로 날 올려다보던 그 표정들도.

그가 강아지를 향해 한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용서해 줘.’

그 자기연민이 가득한 한마디에, 토악질이 차올랐다.

*

“집…… 집으로 돌아가자, 에블린. 응? 집으로 가자.”

무릎을 꿇은 킬리언이 날 절박하게 올려다봤다.

난 손을 내려 그의 결 좋은 은발을 쓰다듬었다.

금세 표정이 풀어진 킬리언이, 급기야 내 손을 가져가더니 제 얼굴을 부비적댔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적은 없었는데, 이 상황에 어지간히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사라진 1년 사이에 이미 약간 미쳤는지도 모르지.

검지로 그의 턱을 치켜올렸다.

날 바라보는 맹목적이고 순종적인 그 눈동자에는 역시나 숨길 수 없는 갈망이 가득했다.

이제 보니 그는 내 기억 속 모습보다 마르고, 피곤해 보였다. 피부는 거칠어 보였고, 눈은 푹 패여 있었다.

여전히 잘생겼지만, 전보다 날카롭고 예민해 보였다.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미친놈처럼 이곳저곳을 다녔을지 듣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 뭔가 착각하고 있으신 것 같은데, 전 한 번도 그곳을 집이라고 생각한 적 없답니다.”

킬리언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러니 돌아갈 수도 없지요.”

“에블린…….”

어쩌면 나는 내내 이런 날을 기다려 왔는지도 몰랐다.

그 날, 그의 마지막 말에 대답할 날을.

“널 절대…….”

고개를 내려 그의 귓가에 쐐기를 박듯 속삭였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킬리언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난 그를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생각보다 통쾌하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때마침, 노집사가 내 방에서 혼인 서약서를 정리해 가져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해치우고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무릎께에 기대고 있던 킬리언이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얼른 하죠.”

냉정한 눈빛으로 데반을 바라보자 그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집사가 테이블 위에 혼인 서약서를 늘어놨다.

데반은 이미 피의 서명을 했으니, 이젠 내 차례였다.

그에게 손을 뻗자 데반이 단도를 건넸다.

“혼자 할 수 있나?”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는 상처 축에도 들지 않았다.

막 단도로 검지를 그으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발치에 주저앉아 있던 킬리언이 내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았다.

“도대체…… 도대체 뭘 하는 건데? 에블린……. 돌아가자, 집으로. 응? 에블린.”

그는 거의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에게 시선을 뒀다가, 거뒀다.

스윽― 망설임 없이 검지를 긋자 새빨간 피가 송송 피어났다.

핏방울이 서약서 위로 떨어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헛기침을 한 노집사가 말했다.

“이로써 두 분의 혼인이 성립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피의 서약을 하기 전까진, 절대로 이 서약을 깰 수 없습니다. 제가 이 혼인의 증인 역할을 하겠습니다.”

툭― 킬리언의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중요한 무언가를 빼앗기기라도 한 듯이.

통쾌하지 않다고 해서 그를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잃은 건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 테니까.

“……아무래도 연회는, 그만 끝내는 게 좋겠네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을 떠나려고 할 때였다.

킬리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앞을 막아섰다.

“……오라버니.”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젠 정말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가 이미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 양어깨를 붙잡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팔을 털어 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무슨 짓이죠?”

“나랑, 나랑 이야기 좀…….”

“할 이야기 없어요.”

붙잡힌 어깨가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 아파 왔다.

“이봐―”

데반이 말리기 위해 다가오려 했지만 난 눈짓으로 그를 저지했다.

이건 우리의 문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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