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26화 (26/123)

26화

데반 란티모스는 연회장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다, 익숙한 옆모습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게 대체 다 뭐죠?”

“제도에서 공수해 온 것들입니다. 특히나 저 태피스트리는 신혼부부의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지요. 급하게 구하느라 웃돈을 줬답니다.”

에블린이 노집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기대했던 반응 그대로라 데반은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팔짱을 끼고, 에블린의 모습을 아래위로 찬찬히 살펴봤다.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녀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하긴, 저주가 풀리고 처음으로 그녀를 봤을 때 느꼈던 감상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마르긴 했지만, 은은하게 초록색이 섞인 금빛 머리칼과 오밀조밀한 얼굴은 그녀를 충분히 우아해 보이게 만들었다.

낡은 옷에 피를 뒤집어쓰고 눈밭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그랬다.

그래서인지도 모르지, 답지 않게 이런저런 이유를 끌어와 혼인 따위를 제안한 게.

“그게 아니라, 이런 걸 대체 왜―”

“내가 지시했다.”

데반은 그녀의 옆으로 뚜벅뚜벅 다가갔다.

에블린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는데,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오래 전, 집사가 말한 그대로 꼭 은하수같이 아름다웠다.

“잘 어울리는군.”

눈동자 색과 꼭 맞춘 드레스도, 청금석 브로치도 아주 잘 어울렸다.

푸른빛과 황금빛이 이토록 조화로운 줄은 처음 알았다고 생각하며, 데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뒤편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덩치가 보였다.

에블린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데반은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렸다.

“뭐 하는―”

“쉿.”

그림자에서 벗어난 커다란 덩치, 킬리언이 마침내 이쪽을 바라봤다.

화려한 은발이 샹들리에 불빛에 이리저리 반사됐고, 지나치게 곧은 황금빛 동공은 크게 뜨여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데반은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저 빌어먹을 황금빛 눈동자는 몇 번을 마주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저 사내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그는 감싸 안고 있던 에블린의 몸을 빙글― 돌렸다.

“어제로 딱 일주일을 채웠는데. 어떻게, 경의 그 소박한 목숨은 준비되었는가?”

품 안의 작은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날카로운 시선이 제 볼로 박히는 것도.

데반은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아아, 또였다.

킬리언은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가 공주를 납치한 마왕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들과 꼭 닮은 황금빛 눈동자로.

*

킬리언과 다시 만나는 꿈을 수십 번도 더 꿨었다.

어느 때는 캄캄한 지하실이었고, 어느 때는 깊은 숲속이었다.

어느 때는 귀족 영애들이 가득한 디에고 백작가의 그레이트 홀이었고, 어느 때는 엘리운이었다.

개중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새파란 달이 뜬 사막이나, 까마득하게 높은 시계탑도 있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이런 꿈을 꾼 적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데반과 킬리언, 그리고 내가 한데 모이는 일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이런 꼴로.

난 차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입고 있는 화려한 드레스가 족쇄처럼 느껴졌다.

킬리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그에게 들리지 않게, 데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볼이 딱딱하게 굳었다.

데반은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그 모습을 보고 킬리언이 움찔―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저자가 언제까지고 내 영지를 들쑤시게 둘 순 없지 않은가. 하루빨리 정리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래서, 이게 그 방법이란 건가요?”

쏘아붙이는 내 말투에도 데반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어차피 이 결혼, 수락할 것 아닌가? 그러니 기왕이면 가장 첫 번째로 저자에게 알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봤다.

그야, 킬리언과 백작의 귀에 들어가기 위해 하는 결혼이긴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갑작스러울 필요는 없잖아요. 하다못해 저에게 귀띔이라도 해 줄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이편이 더 재밌잖아.”

눈을 치켜뜬 채, 뭐라고 단단히 한마디라도 하려고 할 때였다.

“에블린.”

너무나 익숙하고, 또 다정한 킬리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킬리언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에블린.”

킬리언이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후, 숨을 내쉬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데반이 내 어깨에 올려 둔 손에 힘을 줬다.

알고 있었다. 이건 모두 쇼였다. 어릴 적부터 매일 했던 그런 쇼. 이쪽에는 그보다 내가 더 이골이 나 있었다.

난 언제 당황했냐는 듯 킬리언의 참담함을 마주한 채, 눈을 사르르 접어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야, 오라버니.”

스윽, 데반의 허리를 감싸 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데반은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고, 킬리언은 휘청거렸다.

“앉지그래. 곧 연회가 시작될 텐데.”

여유롭게 말하며 데반이 근처에 있던 의자를 빼줬다.

데반과 친절함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난 미소 지으며 앉았다. 마치 이런 일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는 것처럼.

그는 식사 때마다 앉던 상석이 아닌 내 바로 옆에 자리했다.

킬리언은 테이블 한쪽을 붙잡은 채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날 응시하는 시선이 느껴졌고, 난 부러 그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데반은 타고난 것처럼 연기했다.

다정하게 내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고, 보란 듯 킬리언 쪽을 힐끔거렸다.

난 눈을 내리깔고 웃을 뿐이었다.

“자네는 앉지 않을 건가? 이래선 연회를 시작할 수 없는데.”

킬리언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그는 불안정하게 시선을 움직이다가, 간신히 내 맞은편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에블린, ……에블린.”

간절하게 날 부르는 그 목소리를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네, 오라버니. 말씀하세요.”

1년도 넘게 사라졌다 나타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태평한 내 목소리에, 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동안 대체…….”

데반이 손을 까딱거렸다.

대화를 끊어 내듯 노집사가 노련하게 테이블 위로 음식을 세팅했다.

눈앞을 가득 채운 먹음직스러운 음식에도 킬리언의 시선은 오로지 나에게만 향해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렸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토록 강렬한 시선을 느끼면서 식사를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난 슥― 내 앞의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식사보단 먼저 해야 할 게 있지 않나요, 전하?”

반쯤 내게 몸을 틀어,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연기하던 데반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얼른 서약서를 마저 작성하고 싶어요.”

계약 결혼은 알겠으니 이따위 쇼는 얼른 끝내고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의미를 눈치챘는지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음……. 그 전에, 전하는 너무 딱딱하지 않나?”

“……네?”

경련이 날 것 같이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렸다.

그는 정말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데반이 킬리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킬리언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날 응시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게 이를 꽉 물었다. 내가 입을 열어야 끝날 일이었다.

“……데반.”

큭, 데반의 잇새로 억눌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상황을 아는 나와 달리 킬리언에겐 제 연인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미소로 보일 테지.

“……어서 서약서부터 적어요.”

질린 표정으로 데반을 올려다봤다.

그가 마침내 집사에게 서약서를 가져오라 명했다.

“……전하.”

킬리언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지?”

“……분명, 모르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엇을?”

킬리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그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게 도대체 전부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데반이 턱을 치켜들곤 거만하게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래, 경이 잃어버린 걸 내 영지에서 찾고 싶다고 했지. 난 관대하게도 일주일의 시간을 줬고, 그 안에 찾지 못한다면 경의 소박한 목숨을 받기로 했던 것 같은데. 틀린가?”

유난히 ‘소박한’에 힘을 준 데반이 테이블에 턱을 괬다.

“……알고 계셨잖습니까.”

“알고 있었다면 뭐가 달라지나?”

킬리언은 입술을 꼭 물었다.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억울함 때문일까, 아니면 분노 때문일까.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데반이 부드럽게 제 턱을 쓸며 말했다.

“내가 숨긴 게 아니다. 에블린이 스스로 숨은 거지, 너에게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녀를, 에블린을 돌려주십시오.”

“웃기는군. 네가 에블린의 무엇이기에? 그리고 나는 또 무엇이기에. 선택권은 그녀에게 있다. 내가 아니라.”

데반은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킬리언의 가슴팍이 점점 거세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뭔가를 참는 것처럼 몸이 가늘게 떨리기도 했다.

그러다 그가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블린, 에블린, 에블린!”

그는 꼭 실성한 것처럼 내 이름만을 반복했다.

그러더니 자리를 빙 돌아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집…… 집으로 돌아가자, 에블린. 응? 집으로 가자.”

차마 참을 수 없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집이라. 그걸 집이라고 부르다니.

그 지하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서늘한 비소를 지으며 킬리언을 내려다봤다.

킬리언이 맹목적인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그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역겨움이 차올랐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