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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25화 (25/123)

25화

그 마물이 정말로 신전에서 보낸 거라면…….

신전은 아직까지 날 포기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다른 제국까지 도망쳤음에도.

그 말은 그들이 여전히 코델리아를 감금하고 신력을 강탈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차하면 신전은 날 죽여 그 시체라도 회수할 생각인지도 몰랐다. 해부라도 할 작정인지도.

제국을 떠나 있었음에도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난 그저 죽음을 1년간 보류한 것뿐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신전도, 킬리언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젠 피하고만 있을 때가 아닌지도 몰랐다. 도망치는 건 지긋지긋했다. 숨죽이고 사는 건 1년으로 족했다.

정말 그들이 날 포기하지 않은 거라면 나 역시…….

똑똑― 상념을 지우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예상대로 힐다였다.

“아가씨, 목욕 준비를 다 했어요!”

“……그래, 고마워.”

힐다가 날 바라보며 방긋방긋 웃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날 만나서 이렇게나 반가운 걸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와 내가 서로 알고 지낸 건 고작 며칠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씻고 준비한 후에 저녁을 같이하자고 하셨어요.”

“흐음…….”

“아무래도 보통 저녁은 아닌 것 같아요. 연회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녀는 손을 말고는 킥킥대며 웃었다.

“연회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혼인하실 거잖아요!”

힐다의 시선이 침대에 흐트러진 종이 뭉치를 향했다.

아직 승낙한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온통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이런 류의 소문은 일찍 퍼지곤 했다. 1년 전에도 그랬으니,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 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이런 드레스도 준비해 주셨다구요!”

날 거울 앞으로 끌고 간 힐다가 손에 들린 드레스를 내 몸에 댔다.

그러곤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너무 잘 어울리세요!”

드레스는 어깨와 쇄골이 드러나는 디자인에, 새파란 색이었다.

파도치는 치맛단은 아래로 갈수록 짙어져 종래에는 밤하늘같이 어둡게 변했다.

“집사 취향이 이런 쪽으로 바뀌었다니?”

“아니에요, 아가씨!”

힐다의 얼굴이 한층 더 상기됐다.

“이 드레스는 무려 대공 전하께서 직접 골라서 보내오신 거라구요!”

“뭐?”

데반이 보낸 드레스라고?

황당한 내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지, 힐다는 웃으며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드레스와 어울리는 브로치는 이미 아가씨가 가지고 계실 거라고 하셨어요. 정말인가요?”

“아…….”

방 한구석에 던지듯 놓아두었던 짐을 눈짓하자, 힐다가 재빨리 브로치를 찾아서 꺼내왔다.

“어쩜. 정말 아름다워요! 혹시 이것도 대공 전하께서 주신 건가요?”

“뭐……. 말하자면 그렇지.”

“혼인하신다는 말이 정말이군요! 두 분이서 이렇게 사랑하게 되실 줄은 정말 몰랐는데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분위기가 조금 그랬잖아요?”

제가 하녀의 신분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건지, 그녀는 건방진 말을 줄줄 늘어놨다.

그녀가 소매를 걷더니 말했다.

“제가 힘낼게요, 아가씨!”

그 표정엔 결연함마저 엿보였다.

힘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얼마 안 가 난 쉽게 알 수 있었다.

힐다는 전투적으로 날 씻기고, 입히고, 꾸몄다.

1년간 제대로 빗질도 못 해 준 머리칼을 어떻게든 복구시킬 모양인지 향유를 반쯤 들이붓다시피 했다.

머리를 빗으며 그녀는 쉴 새 없이 쫑알댔다.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 카렌 경에게 엄청 화가 나셨어요. 아까 무거운 갑옷 입고 계신 거 보셨죠? 그 날 이후로 매일 저러고 경비를 도신대요. 그리고 또 전하께서 고용하신 마법사랑 의사가 얼마나 성을 더럽히고 다니는지, 솔직히 집사님이랑 저 하나로는 너무―”

“힐다.”

“네?”

말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너도 내…… 오라버니를 봤니?”

“그럼요! 엄청나게 잘생기셨더라구요. 대공 전하보다 잘생기셨나? 흠……. 따지자면 제 취향은 전하 쪽인데…….”

“힐다, 힐다!”

또 금세 딴 곳으로 빠지려는 힐다를 겨우 붙잡았다.

얘가 이런 성격이었나?

분명 처음엔 잔뜩 겁먹고 소심한 애였던 것 같은데. 말도 엄청나게 더듬었던 것 같고.

“아, 뭐라고 하셨죠. 아가씨?”

“오라버니와 전하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들었어?”

“음……. 알면요? 제가 알려드리면, 저에게 뭘 해주실 건데요?”

그녀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아까부터 이상하다 했더니, 갈수록 더 건방져지고 있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너 뭔가 알고 있니?”

“……글쎄요?”

“힐다!”

내 고함에 그녀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것조차 어쩐지, 진짜 겁을 집어먹었다기보단 보여 주기 식으로 느껴졌다.

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대체 뭐지, 이 거북한 기분은.

“전 그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는 것만 알아요!”

“시끄러운 소리?”

힐다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말했다.

“에블린…… 오오, 나의 에블린……. 애원하는 소리랑 하, 하하하! 커다란 웃음소리, 그리고 쿵쿵쿵,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지요.”

그녀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연극이라도 하듯 과장된 동작을 취했다.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쩐지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감각에 난 뒤로 슬쩍 물러났다.

“……대체 뭘 하는 거야?”

“어머, 아가씨. 또 눈치채셨어요? 하긴, 이번엔 숨길 생각도 없긴 했어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니?”

“걱정 마세요. 오늘이 지나면 기억을 모두 돌려드릴게요.”

“뭐?”

힐다가 말갛게 웃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올라갔다.

“너…… 힐다가 아니구나.”

“에이, 아니죠. 힐다는 힐다랍니다. 힐다는 처음부터 힐다였어요.”

“그게 대체 무슨―”

“으음……. 하지만 당장은 연회를 즐기시는 게 좋겠네요. 꽤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힐다가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표정을 했다.

그녀의 시선을 좇아도 텅 빈 벽이 있을 뿐이었다.

뭘 보는 거지?

“아가씨에겐 보이지 않는 걸 보지요.”

홱, 고개를 돌렸다.

……내가 방금 소리 내서 말했나?

“말씀드렸잖아요!”

나무라듯 말한 그녀가 돌연 내게 얼굴을 바짝 붙여 왔다. 이마가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게 마음뿐이겠어?”>

탁―

그녀가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

그레이트 홀의 분위기가 어쩐지 묘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이 위화감의 원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샹들리에가 훤히 밝혀져 있었고, 벽에는 화려한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촛불과 아름다운 꽃이 든 화병이 놓여 있었다.

이게 다 뭐지?

대공 저와도, 데반과도, 그리고 나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거기에 분명 오늘 낮까지만 해도 1년 전과 다름없이 휑하지 않았던가.

반나절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노집사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 이게 대체 다 뭐죠?”

뿌듯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말했다.

“제도에서 공수해 온 것들입니다. 특히나 저 태피스트리는 신혼부부의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지요. 급하게 구하느라 웃돈을 줬답니다.”

“그게 아니라, 이런 걸 대체 왜―”

“내가 지시했다.”

홱, 고개를 돌리자 데반이 뚜벅뚜벅 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난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이트 홀만큼이나 데반의 모습도 평소와 달랐다.

그는 항상 입고 다니던 어두컴컴한 제복이나 로브가 아닌, 새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위로는 대충 걸친 제복 재킷이 금빛 견식 끈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재킷에는 심지어 화려한 견장까지 치렁치렁하게 달려 있었다.

난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얼굴로 열이 쏠리는 기분이었다.

“잘 어울리는군.”

내가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나, 했는데 그 말을 한 건 데반이었다.

난 그의 시선이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 그리고 그 위의 브로치에 닿아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서로를 염두에 두고 제작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드레스와 브로치는 맞춘 듯 잘 어울렸다.

그나저나 중요한 건 내 드레스 따위가 아니었다.

난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데반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왜 그렇게 보지?”

“아니…….”

입술을 달싹여 봐도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낯설다거나, 안 어울려서가 아니었다.

평소에 데반은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곤 했다. 특히나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을 때 더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잘 어울려서 눈 둘 곳이 없었다.

안대 때문인지 몰라도 그와는 검은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내 착각이었다.

안대를 벗고 화려한 차림을 하자 오히려 실감 났다.

그의 얼굴이 어떤 호화로운 장식 못지않게 화려하다는 것이.

“……그 차림은 대체 뭐예요?”

“마음에 안 드나?”

“제 마음에 들려고 입으신 것도 아니잖아요.”

“맞는데.”

“네?”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근사한 미소를 지은 데반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 하는―”

“쉿.”

그리고 빙글, 내 몸을 돌렸다.

그곳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여전히 내 어깨를 감싸 안은 데반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어제로 딱 일주일을 채웠는데. 어떻게, 경의 그 소박한 목숨은 준비되었는가?”

심장 박동이 귓가에서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여전히 화려한 은발에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킬리언 디에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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