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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24화 (24/123)

24화

데반이 기다렸다는 듯 노집사에게 손짓했다.

노집사 역시 모든 걸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품 안에서 종이 다발을 꺼냈다.

종이 다발?

“……이게 뭐죠?”

“혼인을 위한 서류지.”

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누가…… 한대요?”

“뭐? 그럼 안 하겠다는 건가?”

“일단 생각을 조금 해 봐야죠.”

“그럼 여기까진 왜 따라온 거지?”

“제가 따라오고 싶어서 왔어요? 달리는 마차에서 내릴 수는 없잖아요.”

난 허세를 부리듯 턱을 약간 들어 올렸다.

그는 날 필요로 하고 있었다.

마차에서의 태도를 봐선, 쉽게 날 죽일 것 같진 않았고.

적어도 그 순간엔 마물이 있는 숲에 혼자 남는 것보단 그를 따라오는 것이 살아남기에 더 적합했다.

거기에 내가 피하고 싶었던 건 그가 아니라 디에고들과 신전이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 그의 눈에 대해 궁금했다.

조사하다 보면 ‘끝나지 않은 아이’라는 의미에 대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순순히 혼인할 생각은 없었다. 계약적 거래에 가까우니만큼, 기왕이면 얻을 수 있는 건 얻어야지.

데반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지금 널 살려 두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너에겐 선택권이 없을 텐데. 대공령엔 그따위 것보다 더한 마물도 많다.”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다시 그 마물을 떠올리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전하께서 이 혼인을 통해 오른쪽 눈까지 완전히 고칠 수 있다면, 저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죠.”

“전부터 든 생각인데 거래를 참 좋아하는군. 말하지 않았나? 살려 주겠다고.”

데반은 내가 이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목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혼인을 거절하더라도 날 죽일 수 없을걸요? 신관도, 마법사도, 의사도 아무런 단서를 내놓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하.”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는 건 저라고, 방금 전하께서 그러셨잖아요. 그런 협박은 먹히지 않아요.”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불안한 미소였다.

“그랬었지, 아까까지는.”

“……네?”

“말했잖아. 나도 그 신이란 작자와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그것도 너보단 오래된 인연.”

데반은 서류를 한 장 한 장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곤 까득, 아무렇지도 않게 엄지를 물어뜯더니 그 피를 종이에 떨어트렸다.

피는 순식간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혈액으로 하는 마법 계약이었다.

그가 손짓하자, 이번엔 노집사가 서류를 내 앞에 늘어놓았다. 단도도 함께.

“네가 제국을 왜 뜨려고 했는지 모두 알고 있다. 디에고 백작가 놈들 때문이지.”

난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정말로 모든 걸 다 아는 표정이었다.

“네가 백작가에서 사라진 지 벌써 1년도 넘었다. 거기에 네 오라비는 널 찾는 걸 포기하지 않은 것 같고.”

“…….”

“킬리언 디에고라고 했나. 잊고 말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사실은 그자가, 지금 대공령에 있거든.”

“뭐라구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무릎이 부딪혀 찻잔이 덜그럭거렸다.

“성 안에 있는 식기는 모조리 깨트릴 모양인가 보군.”

“……대체 왜요?”

목소리가 갈라져서 튀어나왔다.

데반은 턱을 치켜들고 날 가만히 바라봤다. 이 대화의 우위를 누가 점하고 있는지 선명했다.

“그 목걸이 때문이지 않겠어? 그자가 직접 확인하기도 했고.”

“직접 확인했다니……, 그 목걸이를요?”

“보여 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데반이 어깨를 으쓱했다. 태평한 태도에 절로 주먹이 쥐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니 제안을 하는 거다. 나와 혼인하면, 백작도 네 오라비도 너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해 주지.”

난 그를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네가 이 눈의 치료법을 찾아낼 때까지 네 안전을 약속하겠다. 그 후엔, 원래 거래대로 이 제국을 떠날 돈과 지위를 주지. 네가 살던 것처럼…….”

데반이 내 옷을 빤히 바라보더니, 말을 골랐다.

“……그런 차림 말고, 제대로 살 수 있게 말이야.”

“눈을 치료하면 이혼을 해 주겠다는 말인가요?”

“물론.”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필 혼인이죠? 그냥 날 성에 머물게 할 수도 있잖아요.”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힘이 되기도 하지. 이른바 명분이라는 거다.”

명분.

그와 결혼을 하고 대공비라는 지위를 갖게 된다면, 나에겐 킬리언과 백작의 접근을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게 된다.

이 세계에선 결혼한 자식은 반쯤 남으로 봤으니, 백작이 가족으로서 나에게 권리를 행사할 수도 없을 거다.

하지만…….

“그건 저에게만 좋은 거 아닌가요?”

데반이 두 손을 깍지 끼고, 턱을 괬다.

“혼인은 또, 절대 무를 수 없는 계약이기도 하거든. 제국 전체를 증인으로 한.”

그러니까, 내가 저번처럼 계약을 해 놓고 도망갈까 그게 걱정된다는 거구나.

그다운 말이었다.

“……정말 내가, 그걸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진짜 예언의 주인공을 찾는 건 어때요? 그 사람이라면 오른쪽 눈까지 다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제 입으로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해 놓고 이제 와서 하기엔 웃긴 말이었다.

데반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글쎄, 이제 와서 다시 예언의 주인공을 찾는다 한들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거니와…….”

데반이 입매를 비틀었다.

“설령 또 찾는다 하더라도, 그 자가 진짜 예언의 주인공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건 데이지 향을…….”

“데이지 향이 난 건 너도 마찬가지였잖나. 누군가 너보다 더 영악하고 더 창의적일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다.”

“그러니까…… 아무도 못 믿으니까 차라리 절 믿겠다는 건가요? 나는 이미… 모든 패가 다 까발렸으니까?”

“…….”

데반은 답지 않게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래, 논리적으로 보자면 그런 이유에서겠지.”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는요?”

꼬투리를 잡듯 물었다. 나조차도 이유를 모르겠으나, 어쩐지 데반의 대답을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글쎄, 그냥…….”

턱을 쓸며, 데반이 살짝 미소 지었다.

“믿고 싶은가 보지, 너를.”

*

방에 돌아온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에 새겨진 사자를 심드렁한 눈으로 바라봤다.

한때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매일 눈을 마주쳤는데, 어느새 1년 만이었다.

“너도 여전하구나.”

여전히 화살이 박혀 있고, 여전히 아파 보이네.

“후…….”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이곳이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아직 내 피가 묻지 않은, 계약 전 혼인 서약서였다.

“결혼이라.”

생각할수록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돈에 미친 백작이라도, 그리고 내게 미친 킬리언이라도 대공비를 어떻게 하진 못할 것이다.

가문이라는 틀은 중요했다.

내가 이 제국에서, 에블린 디에고로 살아가는 이상 내 모든 일은 백작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입고 먹는 것부터 결혼, 그리고 생존까지.

하지만 내가 ‘디에고’에서 나와 ‘란티모스’가 된다면 그들은 날 쉽게 건들지 못하겠지.

……내 목줄을 쥔 이가 백작에서 데반으로 옮겨 간 것뿐이긴 하지만.

거기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낼 단서를 찾을 수도 있었다.

엘리운으로 도망쳐 사는 내내, 대공 저를 탈출한 날 내 속에서 터져 나왔던 그 뜻 모를 힘이 궁금했다.

거기에 내가 왜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지, 이번 생이 왜 내가 읽었던 책의 내용과 일치하는지도 항상 궁금해 왔었고.

“……빚을 갚을 수도 있고.”

데반은 나를 믿고 싶다고 말했다.

코델리아를 찾아 헤매는 대신, 나를 믿겠다고.

대체품 같은 인생이었다. 누군가를 대신해, 죽어버릴 인생이었다.

내가 전생을 기억해내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정말로 그랬겠지.

“그래서 그런가…….”

코델리아 대신 나를 선택한 데반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나를 믿는다고 말해준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으니까.

“너무 안일한 생각인가.”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게 맞는 걸까.

내가 지금껏 살아남은 건 누군가의 호의나 운 덕분이 아닌, 철저한 계획 덕분이었다.

“그래, 계산적으로 생각해보자.”

난 가능성을 하나씩 따져 봤다.

먼저 내가 혼인을 거부할 경우.

그는 킬리언에게 내 행방을 말할지도 몰랐다. 아니면 신전에 고발할 수도 있겠지.

날 죽이진 않더라도, 그가 날 지켜 줄 이유는 없었다.

그럼 결국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였다. 내 힘으로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던 그때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반면, 내가 혼인을 승낙할 경우.

그는 내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이다.

거기에 난 공식적으로 대공비라는 지위를 얻게 된다.

그가 아니더라도,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두 가지.

그가 약속을 지킬 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는 점과 전 제국에 좋든 싫든 대공비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는 점.

이것들도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데반을 믿는다기보단 그가 약속을 깨서 얻을 이익이 없었다.

물리적인 힘으로 날 협박하려고 했다면 굳이 결혼을 제안할 이유도 없었고.

두 번째의 경우엔, 어차피 결혼 생각도 없었으니 소문이 나든 말든 상관없었다.

거기에 결혼 상대로 데반이 좋으냐 나쁘냐를 굳이 따져 본다면…….

그의 잘난 얼굴과 커다란 성, 어마어마한 재산을 떠올려 봤다.

“……짜증 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격만 제외한다면 그는 꽤 괜찮은 결혼 상대였다.

더군다나 사실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걸리는 것이 있었다.

데반이 날 구해 주기 직전, 마물이 내게 도약하고 그 역겨운 비늘 하나하나가 느리게 보이는 것 같았을 때.

비늘 사이에 익숙한 게 있었다.

만약 내가 본 게 맞다면…….

까드득, 이를 물었다.

내가 본 게 정말 맞다면, 그 마물은 신전에서 보낸 것이었다.

날 붙잡기 위해서. 붙잡아, 죽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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