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고맙다는 말이 먼저 같은데.”
“……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잘 살고 있던 사람을 다시 납치해서 끌고 가는 주제에 고맙다고 하라고?
대체 내가 왜? 이번에야말로 그는 납치범이었고, 나는 피해자였다.
“내가 안 왔으면 이미 마물의 밥이 되어 너덜너덜해지지 않았겠나.”
“아…….”
“반쯤 먹히게 두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눈을 치켜뜨자 데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피 냄새를 좋아하던 거 아니었나? 바란다면 검을 다시 빌려줄 수도 있고.”
그는 금방이라도 허리춤에서 검을 뽑을 것처럼 움직였다.
난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그게 언제 일인데, 내가 그 검에 손을 벤 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어쨌든 고마워요.”
역겨운 초록색 비늘과 노란 진액이 뚝뚝 떨어지던 입이 다시 떠오르자 절로 감사 인사가 나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또 별개의 문제죠.”
“이거?”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에요.”
이미 눈치채 놓고, 골똘히 생각하기라도 하듯 그가 턱을 문질렀다.
“……아! 혼인을 말하는 건가?”
이제 보니 능청스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겨봤다.
“네가 싫다면 별수 없지.”
“네?”
의외로 순순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어딘지 불안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다시 돌아가서 그 숲에 사지를 묶어 둬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 그건 조금 궁금하군.”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절대 농담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정말로 날 다시 저 숲에 버려두리라.
“도대체…… 이유가 뭔데요?”
마침내 처음부터 내내 궁금했던 걸 물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요. 1년간 정신을 잃었다가 절 찾으러 여기까지 와서……. 잠깐,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이 엘리운에, 그것도 유난히 눈이 많이 와 썰매가 없으면 이동할 수도 없는 이 마을에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데.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은 가련한 평민 ‘레아’를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휘몰아치듯 빠르게 진행되는 일련의 상황 속에서, 잊고 있던 억울함이 피어났다.
데반이 낮게 혀를 찼다.
“빨리도 묻는군.”
“어떻게 알았냐고요!”
“말하자면 이것과 비슷한 방법이라고나 할까.”
데반이 여전히 제 손에 들린 노란색 펜던트를 흔들었다.
내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위치 추적을 했다고요?”
“그다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브로치를 팔지 않았더군.”
“……그래서 브로치를 준 거였어요?”
미간을 찌푸린 데반이 팔짱을 꼈다.
“황궁에서 만든 보석은 유사시를 위해 모두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다.”
“황궁의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어머니의 개인적인 물건이라고!”
“황후와 황궁이 어떻게 별개일 수 있겠어.”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내 눈 색을 꼭 닮아서, 거기에 그의 어머니가 남기고 간 물건이라는 이유로 브로치를 꽁꽁 보관하고 있던 게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게 그게 뭐가 좋다고 지금껏 갖고 있어.”
데반이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눈을 피하는 것 같은 그 태도에, 어이가 없어 가슴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봐요.”
똑똑― 손가락으로 세게 창을 두드렸다. 데반이 시선만 놀려 날 바라봤다.
“그래서, 왜 하필 혼인이냐고 묻잖아요.”
그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면 꼭 별것도 아닌 일에 나 혼자 열을 내는 기분이었다.
“신전에서 데려온 신관들도, 마탑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마법사들도, 제국 최고의 의사도 이것의 정체를 모른다.”
그가 검지로 제 오른쪽 눈가를 톡 건드렸다.
다시 봐도 묘한 눈동자였다.
잉크가 번진 것처럼 불길해 보이기도 하고, 밑바닥을 알 수 없는 호수처럼 깊어 보이기도 했다.
“모르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도 너라고 생각한다만.”
“가능성이요?”
“이걸 치료할 가능성. 어쨌든 넌 그 누구도 풀지 못한 내 저주를 풀었으니까.”
난 슬쩍 그의 오른쪽 눈동자를 침범하고 있는 검은 자국을 바라봤다.
그럴 리 없음에도 그건 꼭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 치료를 한 날, 내 신력과 싸웠던 검은 형체처럼 스멀거리는 느낌이었다.
“네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닐지언정, 저주를 푼 건 사실이니까. 뭐라도 관련이 있겠지.”
“관련이라니…….”
“정말로 아는 게 없나, 이것에 대해?”
난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공 저에서 도망친 지 1년, 그동안 계속해서 뇌리를 떠나지 않은 말이 있었다.
<아하. 너, 끝나지 않은 아이였구나. 그러니 시작도 하지 못했지.>
검은 형체가 걸어왔던 그 말.
이상하게도 마지막 순간만은 기억이 또렷했다.
그게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내 안에 침범했는지 모두 기억났다.
끝나지 않은 아이라.
1년간 그 말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게 무슨 말일까.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전생을 기억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정확한 뜻을 알 순 없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엔 없었다.
어쩌면 그것의 말은 내가 전생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그러니까 제대로 죽지 못하고 현생을 시작했다는 소리가 아닐까.
그래서 아직 진정으로 ‘시작도 하지 못’한 거고.
난 데반을 빤히 바라봤다.
그는 내 긴 침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런 사실을 그에게 모조리 털어놓을 순 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그가 믿을 리 없었으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것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이야기?”
그의 눈썹이 휘익 올라갔다.
“정확히는 그게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무슨 내용이었지?”
“그건…… 기억나지 않아요. 다만 마지막엔 다음에 보자고…… 인사했어요.”
“다음에 보자고?”
데반이 마차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면 역시 그 무언가가 네게 관심이 있는 거군.”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었다.
“달리 다른 특징이나 단서는 없나?”
“특징이요?”
“그게 ‘말’을 한다는 건 단순히 어떤 물질이 아닌 의식이 있는 존재라는 건데……. 인간이라든가, 혹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든가.”
흐음, 데반이 고민하는 듯한 탄식을 내뱉었다.
인간이 만든 것……?
“가령 나에게 원한이 있는 누군가가 나에게 보낸 것이라든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째서?”
“뭐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누군가가 만들었다거나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했다거나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었어요. 오히려 따지자면…….”
“따지자면?”
그는 이제 여유를 잃은 것 같았다. 초조한 눈빛의 데반과 눈 맞추며 말했다.
그래, 그건 따지자면……
“인간보다 우월한…….”
“신?”
차마 입 밖으로 확언할 수 없었다, 난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쩐지 이야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신이라면, 너처럼 막대한 신력을 가진 자가 알아채지 못할 수 있나?”
“그건 그래요. 가령 신력과 마력은 너무나 다르지만, 그 근본은 같거든요. 전 마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마법을 시전할 수도 없지만 느낄 수는 있어요.”
“그런데 내 눈의 이건…….”
“전혀 모르겠어요. 대체 뭔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신은 아니지만 그에 필적하는 초월적 존재라는 건가. ……이야기를 할수록 이상하군.”
“그러게요.”
대체 뭘까. 그 장난기 섞인 목소리와, 조롱하는 듯한 말투.
하지만 은근히 해치진 않을 것 같았단 말이지. 자기 입으로 도와주려는 거라고 하기도 했고.
“기분 나쁘게 킬킬대며 웃고…….”
“뭐?”
중얼거리는 내 혼잣말에 데반이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대답을 종용하는 그의 미간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네? ……기분 나쁘게 킬킬댔다고…….”
데반이 눈을 크게 떴다. 드물게 놀란 모습이었다.
“왜요?”
어딘가 불안한 마음에 묻자,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뭔가 아는 게 있어요?”
이번에 대답을 종용하는 건 내 쪽이었다.
데반은 약간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어쩌면…… 나도 아는지도 모르겠군. 그 신이라는 작자를.”
*
대공 저는 여전했다.
여전히 불필요할 정도로 커다랬고, 장식이 없어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용인이 적은 것도 예전과 같았다.
노집사는 절제된 몸놀림으로 우리를 맞이했고, 그 옆에는 힐다가 울먹이며 서 있었다.
“아가씨!”
힐다는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왔다. 그러곤 내 옆에 딱 붙어, 징징거렸다.
“도대체 어딜 갔다 오신 거예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보고 싶었어요!”
이럴 만큼 우리 사이가 돈독했던가?
약간 부담스러웠지만 티 내지 않고 그녀의 곱슬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어쨌든 1년 만에 만났다고 생각하자 묘한 반가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대공 저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레이디 에블린.”
홱,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갑옷을 입고 완전무장한 카렌이 있었다.
그는 근사한 미소를 띤 채 절제된 몸놀림으로 내게 인사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더군요. 그런 분인 줄 몰랐는데요.”
기사도에 맞지 않는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이곳을 탈출함으로써 경비대장인 그를 농락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머쓱하게 웃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데반이 내 옆으로 나섰다.
“웃기지도 않은 환영회는 나중에 하고, 일단 들어가지.”
거침없는 그의 뒤를 따라, 나도 성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그레이트 홀에 앉자, 노집사가 홍차를 내왔다. 역시나 익숙한 향이었다.
“후…….”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순식간에 따뜻한 기운이 몸에 퍼졌다.
엘리운보단 덜하지만, 한겨울이라 그런지 이곳 역시 꽤나 쌀쌀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씻지도 않고 식탁에 앉았네요.”
데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말했다시피, 씻든 안 씻든 그게 그거다.”
이젠 그의 눈이 제대로 보인다고 생각하자, 허름한 꼴이 부끄러웠다.
엘리운의 ‘레아’로선 당연한 옷차림이긴 했지만, 이런 성과 어울리는 차림은 아니었다.
그가 내 꼴을 더 뜯어보기 전에 서둘러 말을 꺼냈다.
“그보다, 그 혼인이요.”
“그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고, 노집사에게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