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머리를 스치는 소름끼치는 생각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촤악― 몸 위로 뜨끈한 무언가가 쏟아졌다.
가물가물 눈을 떴다.
이게 뭐지?
손으로 눈 부근을 비볐다.
“피……?”
새빨간 피가 손에 잔뜩 묻어 있었다.
죽은 건가?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아니면 다친 건가?
그래, 저 마물은 멍청해 보였으니까 날 한 번에 죽이지 못한지도 몰라.
그런데 이 정도로 피를 뒤집어썼는데, 어떻게 안 죽지? 왜 안 아프지?
생각이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눈을 밟는 소리와 파삭, 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발소리였다.
난 서둘러 눈앞을 가리는 피를 닦아 내고 겨우 앞을 바라봤다.
그러곤 그 소리의 근원을 확인하자마자 털썩― 그대로 눈밭에 주저앉았다.
그곳에 있는 건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남자였다.
차라리 마물의 손에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서늘한 눈빛을 가진 남자.
한 번도 마주해 보지 않은 시선이었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데반 란티모스, 그였다.
데반이 풀썩 주저앉은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바닥에 쌓인 눈 따위는 그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새까만 제복에 한 손엔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모두 새까만 검을 들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집무실 본 기억이 있는 검이었다.
데반 역시 마물의 피를 반쯤 뒤집어쓰고 있었다.
내 몸에 묻은 찝찝한 액체와 동일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검붉은 액체는 그와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
눈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그가 말했다.
“여기 있었군. 감히 날 속인 것도 모자라 도망을 쳐?”
“어, 어떻게…….”
난 앉은 채로 뒷걸음질 쳤다.
푹― 데반이 내 머리 바로 뒤에 검을 꽂았다. 이 이상 도망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꿈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서 도망친 지 벌써 1년이 조금 지났다. 햇수로만 따지자면 2년이었다. 벌써 내가 스무 살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타이밍에, 이자가 여기에 오다니.
아연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더군다나 그는 지금까지 본 모습과 달랐다.
항상 자리하던 검은 안대가 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눈이…….
데반이 허리를 굽혀 나와 눈을 맞춰 왔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방금 전 쏟아진 마물의 피가 눈 안에까지 들어갔나 싶을 정도로 붉은 왼쪽 눈동자였다.
그 다음은 빨려 들어갈 것같이 새까만 색이 퍼져 있는 오른쪽 눈동자였고.
피가 묻은 손으로 그가 내 턱을 부여잡았다.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때, 네가 상상한 그대로인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하지 않자, 데반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까닥했다.
“이 눈 말이다.”
“……눈이, 왜요?”
멍하게 대답하자 그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제 품 안을 뒤적거렸다.
그러곤 무언가를 꺼내 내 눈앞에 그대로 들이밀었다.
몸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의 손에 노란색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킬리언이 구해다 줬던, 데이지 꽃향기가 농축된 그 마도구가.
“이게 뭔지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
“‘데이지 꽃향기를 품은 어린 태양의 여신이, 너의 저주를 풀어 주리라.’”
시라도 읊듯, 그가 근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창의적이고, 열성적인 자는 처음이라 깜빡 속았군. 마도구까지 사용하다니.”
“……그게…….”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가 모든 걸 알아챈 것이다.
내가 그에게 사기를 쳤다는 걸. 예언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는 걸.
“어쩐지 조금만 신력을 써도 픽픽 쓰러지는 꼴이 이상하다 생각했지. 예언의 주인공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그건 저주 때문이 아닌데…….
이제 와서 변명한다 한들 믿어 줄 리가 없었다.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와 꽂혔다.
“날 속였을 땐, 그만한 각오도 함께였겠지? 책임의 무게가 가볍진 않을 거야.”
팍― 데반이 내 위쪽에 꽂혀 있던 검을 잡아 뽑았다.
움찔, 몸을 떨었다.
코앞에 다가왔던 죽음의 공포가 다시 전신을 휘감았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번엔 이자에게 죽는 건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거짓말을 굉장히 싫어해. 네가 오래 살아 있길 기도하지.’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하니, 그 거짓말을 책임지라고 여기까지 쫓아온 걸까?
그것도 1년이나 지나서? 정말…… 날 죽일 생각인가?
대륙 전체에 퍼진 흉흉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라면 능히 그럴 만했다.
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
“하지만, 어쨌든 네가 막대한 신력의 보유자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
꼭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리다, 그가 날 내려다봤다.
“아닌가?”
“……맞아요.”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는 뭔가를 가늠하는 듯하더니, 검을 능숙하게 검집에 꽂았다.
그러곤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 오른쪽 눈, 고칠 수 있나?”
오른쪽 눈? 슬쩍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안대를 썼을 때도 엄청나게 잘생겼었지만, 벗으니까 더욱 소름 끼치는 외모였다.
당장 내 목숨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내라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특히나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눈은, 어딘가 사람을 홀리는 데가 있었다.
꼴깍 침을 삼켰다.
“넋 놓고 감상할 때가 아닐 텐데.”
그가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찬찬히 그의 눈을 살폈다.
붉은 왼쪽 눈과 달리 오른쪽은 역시나 새까만 검은색이 퍼져 있었다.
“……오른쪽, 안 보여요?”
“희미하게 보인다.”
역시 저주가 풀리지 않은 건가? 내 신력을 모두 쏟아부었음에도 저 정도라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데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주는 다 풀렸어.”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그건 저주가 아니에요. 제가 전에 말했잖아요. ‘뭔가’가 있다고. 그거 때문이에요, 이 오른쪽 눈.”
“그래서 그 ‘뭔가’를 알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거다.”
“……몰라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몰라요. 그냥, 저주가 아닌 것만 알았어요.”
“완벽히 치료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나?”
눈을 내리깔고, 손끝만 바라봤다.
다시 한번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너는 왼쪽 눈을 먼저 치료했지.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말을 하면서. ……왜 그때 말하지 않았지?”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입을 우물거리자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데반이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그랬군. 사실이 어떻든 저주를 푸는 데 문제가 생기면, 너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할 테니까.”
“……그래요. 하지만 그건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든 아니든 풀지 못했을 거예요.”
원작에도 이런 건 나오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러겠지.
코델리아도 저건 풀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고칠 방법은?”
“…….”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자 그가 세 번째로 한숨 쉬었다.
그러더니 돌연, 내 턱을 잡고 품평하듯 이리저리 돌려봤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그의 시선이 내 머리카락과 눈동자, 코, 입으로 내려갔다.
“집사의 말이 맞군.”
“네?”
알 수 없는 소리를 한 데반이 날 깊게 응시했다.
확실히 눈동자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건 차원이 달랐다.
하필이면 핏빛 적안이라 그런지.
그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전까지 그에게 취했던 건방진 태도를 고수하기 힘들었다.
그가 엄지로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낯선 감촉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뭘 하는…….”
“뭔지도 모른다, 고칠 방법도 모른다. 그럼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군.”
내 말허리를 뚝 끊고, 그가 나른하게 말했다.
“나와 혼인하지.”
*
나는 대화를 통해 데반이 1년간 쓰러져 있었고, 몇 주 전 안대를 풀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전히 노집사와 카렌, 힐다가 그곳에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가 나에게 알려 준 건 그게 다였다.
반면에 데반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백작가의 사랑받는 여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노집사가 언뜻 내 몸에 새겨진 멍 자국을 본 것 같다고 증언한 탓이었다.
거기에 킬리언이 나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한다는 사실까지 알았는데…….
심지어 내가 몰랐던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그 목걸이가…… 뭐라고요?”
대공 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난 제 처지도 잊은 채 소리를 빽 질렀다.
“그 펜던트가 마도구인 건 알고 있겠지. 단순히 향기만 농축한 게 아니라,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더군.”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제야 1년 전, 킬리언이 그렇게 빨리 대공 저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순순히 목걸이를 구해 준다 했더니, 다 생각해 둔 수가 있었던 거였다.
“네가 한 건 아닐 테고.”
데반은 꼭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럼 지금은요? 지금도 다 추적되는 거 아니에요?”
“추적이 되든 말든 무슨 상관이지? 이미 그 자는 네가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할 텐데.”
“하지만 우리가 지금 엘리운에 있다는 것마저 안다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데반의 말이 맞았다. 이미 내 위치를 확신하고 대공 저까지 쳐들어왔는데, 내가 지금 엘리운에 있든 아니든 큰 상관이 있을까.
“……그래도 찝찝한데, 그냥 부수지, 왜요?”
“……어딘가 쓸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약간 언짢아 보였다.
“그럼 킬리언. 아니, 오라버니와 만났어요?”
“그래.”
“대체 만나서 무슨 얘기를…….”
“그보다.”
데반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꼭 화제를 돌리고 싶은 모양새였다.
“고맙다는 말이 먼저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