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는가.”
킬리언의 가슴팍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그의 떨리는 숨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덥석, 킬리언이 제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 검날을 붙잡았다. 꼭 제 각오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데반의 눈썹이 곡선을 그렸다.
“……찾지 못한다면 ……제 목숨은 가치가 없습니다.”
“‘찾지 못한다면’이라. 무엇을?”
킬리언이 눈을 부릅떴다.
“전하. ……부탁드립니다, 제발.”
“그러니 무엇을.”
“……에블린을 돌려주십시오.”
데반의 잇새로 조소가 터져 나왔다.
“……전하.”
“하, 하하하!”
데반이 파안대소했다.
어찌나 크고 즐겁게 웃는지 킬리언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질 정도였다.
킬리언이 잡고 있던 검날을 내려놓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하하……. 하아…….”
허리까지 꺾어 가며 웃던 데반이 돌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팍― 그는 카펫 위에 검을 세로로 꽂았다.
어느새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데반은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그게 뭐든, 원한다면 찾아보게. 일주일 주지. 내 성, 영지…… 어디든 뒤져도 좋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킬리언의 뒤로 데반이 덧붙였다.
“단, 찾지 못한다면…… 경의 그 소박한 목숨을 바쳐야 할 거야.”
목덜미에 닿았던 검보다도 더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킬리언은, 망설일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예를 차리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방금 전까지의 정중한 태도가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쾅― 거칠게 문이 닫히고 복도를 내달리는 발걸음 소리가 쿵쿵쿵 울렸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데반은 첨예한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검날 끝에는 킬리언의 피가 묻어 있었다.
검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그대로 뒤를 돌아 데반은 노란색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그것을 주시하는 데반의 표정엔 알 수 없는 언짢음이 가득했다.
“에블린이라.”
그는 킬리언이 단 한 번도 그녀를 제 누이라 지칭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했다.
부서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데반은 손안의 목걸이를 세게 쥐었다.
“이건 꼭…… 연인을 구하러 온 용사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제 역할은 공주를 탑에 가둔 마왕이리라.
황금빛 눈동자라니. 공교롭기도 하지.
데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
주위가 온통 새하얬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난 질끈 눈을 감고, 익숙한 거리를 걸었다.
푹푹―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파이는 눈은 뽀득거리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하아…….”
한숨과도 같은 입김이 터져 나왔다. 두 손을 싹싹 비벼 가며 열을 냈다.
그러지 않고는 가게에 도착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얼어 버리리라.
마침내 도착한 엘리운은, 상상 이상으로 아주 추운 곳이었다.
누가 이곳을 1년 내내 눈이 내리는 곳이라고 했던가. 엘리운은 정확히 말하면 눈이 내리는 게 아니라, 눈이 쌓이는 곳이었다.
녹을 시간을 주지 않고 쌓이고, 쌓이고, 또 쌓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무릎까지 올라오던 눈이 발목 정도로 낮아지고, 돌연 북적거리는 거리가 나타났다.
이 역시 엘리운의 특징 중 하나였다.
거의 매일 눈이 오는 이 나라는 공동체 생활이 당연시 돼 있었다.
모두가 모여 살았고, 그 중앙엔 이처럼 작은 번화가가 형성돼 있었다.
“어이, 레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자, 생선 가게 주인인 헤론이 날 보며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레아는 이곳에서 새로 생긴 내 이름이었다.
“헤론 아저씨!”
서둘러 그를 향해 달려갔다.
헤론은 제가 쬐고 있던 모닥불을 내 쪽으로 스윽 밀어줬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녹이고 있자, 헤론은 이번엔 놋쇠 컵을 내밀었다.
“자.”
“고마워요.”
두 손으로 받아들자 순식간에 온기가 퍼졌다.
“후우……. 겨우 살겠다.”
“아직도 썰매를 타지 못해서 어째?”
“곧 적응되겠죠.”
“그 전에 동사하는 건 아니고?”
껄껄거리며 웃는 그를 마주 보고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동 수단으로 말이나 마차 대신 썰매를 이용했다.
몇 번이고 시도해 봤지만 난 여전히 적응하지 못해, 집에서부터 번화가까지 긴 거리를 걸어 다니곤 했다.
“그래서 오늘은 뭘로 줘?”
“뭐가 있어요?”
“글쎄…….”
헤론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것저것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도 눈이 많이 오는 추운 동네다 보니, 이곳의 음식들은 대부분 말려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말린 생선은 가장 좋은 식재료였다.
오늘 저녁은 뭘 만들까?
입김을 호호 불어 가며 손을 녹였다.
스튜 같은 걸 해 먹어도 괜찮을 것이다. 딱딱하게 말린 생선을 부드럽게 먹을 수 있었고, 몸도 녹일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장작이 거의 다 떨어진 것 같은데.
가는 길에 들러야 할 가게들을 곱씹어 봤다. 한 번 나올 때마다 잔뜩 사 가다 보니, 들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번에 옆 동네에서 좋은 고기가 들어왔는데, 싸게 줄 테니 가져갈래?”
가게 안에서 헤론이 소리쳤다.
옆 동네는 제국을 뜻했다. 그러니까 내가 도망쳐 온 바로 그곳.
“……아뇨. 그냥 싼 걸로 주세요!”
가게 안쪽을 굽어보며 소리쳤다.
기왕이면 생선 하나도, 그곳과는 닿고 싶지 않았다.
*
한 손엔 말린 생선을, 다른 한 손엔 마른 장작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전히 눈은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
집에 가는 길은 빙 돌아가야 하는 큰길과 어두운 숲을 뚫어야 하는 지름길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무조건 전자였지만, 오늘따라 손에 든 짐이 너무 무거웠다.
이대로 집까지 갔다간 저녁을 먹지도 못하고 쓰러져 잠만 잘 게 뻔했다.
별일이야 있겠어?
안일한 생각으로 숲을 향해 걸었다.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시각이었고, 이 동네의 짐승이나 마물들은 대부분 온순했다.
하지만 숲에 들어오자마자 내 결정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키가 큰 자작나무들이 온통 주위를 감싸며, 조금이나마 얼굴을 내밀던 태양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바람은 나무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더욱 날카롭게 변했고, 급기야 휘이잉― 휘이잉― 하는 기묘한 소리를 냈다.
꼴깍, 마른침을 삼키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무들이 지붕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닥에 쌓인 눈의 높이가 숲 바깥보다 현저히 낮았고, 덕분에 발걸음을 빨리할 수 있었다.
“뭐, 금방이니까.”
괜히 명랑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래 봤자 음산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지만.
파삭― 아래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경기했다.
내가 밟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하아…….”
한껏 긴장한 상태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난 그제야 내가 지금껏 멀리 돌면서 굳이 큰길을 고집했던 이유를 상기했다.
국경을 넘을 때 마물 때문에 생사를 오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그걸 왜 잊고 있었지.”
소름 끼치는 초록 피부와 끈적이는 점액질, 바위보다 단단한 몸뚱어리.
1년 전 마주쳤던 마물들을 떠올리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물론 이 숲에는 그런 마물이 없지만, 없겠지만…….
“……서두르자.”
난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바닥에 쌓인 눈이 내 발걸음이 닿을 때마다 흩날렸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함께였다.
기묘한 소리를 내는 바람은 끊이지 않았고 내 두려움도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쿵― 뒤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굉장히 무거운 무언가가.
오싹한 한기가 돌았다. 그대로 몸이 경직됐다.
“크르…….”
짐승의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들짐승일 수도 있어. 이를테면 곰이라든가. 아니, 곰이어도 문제인가? 그래도 마물보단 낫지…….
현실에서 도피하듯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난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크르르…….”
툭― 들고 있던 생선과 마른 장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것은 입에서 노란 진액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온몸이 단단해 보이는 초록색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길고 역겨운 꼬리가 두 개나 달려 있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마물이다.
마물은 명백히 날 노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엘리운은 안전한 곳으로 유명했다.
눈이 많이 오고 항상 추워 위험한 짐승이나 마물이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마을의 젊은 청년들이 숲을 사냥터로 쓸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하필이면 내가 처음으로 숲에 들어온 날 마물이 나타난다고?
이 모든 게 단지 지독한 우연일까?
볼이 딱딱하게 굳었다.
“크와아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정확히는 이름 따윈 알고 싶지도 않은 마물이 높이 도약했다.
날 향해서.
“으아악!”
새된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몸을 옆으로 던졌다.
푹― 눈에 얼굴을 처박았지만, 다행히 죽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지?
슬쩍 고개를 들자 멍청한 마물은 휘휘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날 찾는 눈치였다.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뒤에 숨었다.
잘 생각해야 했다.
난 1년 전, 대공 저를 빠져나올 때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정확히는 그 이상하리만치 강력했던 힘을.
성벽도 타고, 잠긴 문도 열고, 결계도 부쉈잖아.
주먹을 꼭 쥐었다.
문제는…… 내가 그걸 어떻게 사용했는지 스스로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크아아아!”
우지끈― 내가 숨어 있던 나무가 그대로 옆으로 날아갔다.
마물이 이리저리 꼬리를 돌리다 우연히 맞은 모양이었다.
흡― 숨을 날카롭게 들이마셨다.
마물이 소름 끼치는 노란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들켰다.
마물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저 본능에 따르는 듯 바닥을 도약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학대와 고문에서 벗어나, 국경까지 넘고 이제 겨우 집을 마련해 숨 돌릴 틈을 찾았는데.
이대로 죽는다고?
마물이 나를 덮치는 모습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그 몸에 달린 끔찍한 비늘까지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틈에서 하얗게 번쩍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하얗다고? 저건 설마…….
머리를 스치는 소름끼치는 생각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