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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20화 (20/123)

20화

데반은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의 책상 앞에는 킬리언으로부터 날아온 편지가 있었다.

알현을 원한다는 정중한 내용이었다.

“지긋지긋하군.”

그는 편지를 벽난로에 미련 없이 던졌다.

화르륵, 편지는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1년 전, 전하께서 쓰러진 이후로 계속 기다려 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곧바로 편지를 보내온 걸 보면요.”

노집사가 익숙하게 편지지와 펜을 준비해 그의 책상 위에 올려 뒀다.

“집사가 대신 쓰지.”

“그랬다가 황태녀 전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좋은 소리를 못 들으실 겁니다.”

“1년간 정신을 잃었어도 단 한 번도 연락 없던 그 황태녀 전하 말이신가.”

비꼬는 데반의 말투에, 노집사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옆에서 차를 따랐다.

길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데반이 말했다.

“어쩌면 이자는 그 여자의 행방을 알지도 모르겠군.”

“그 여자라면…….”

“에블린 디에고 말이다.”

노집사의 시선이 책상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노란색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로 향했다.

“그녀라면, 이 눈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다못해 이유라도 알려 줄 수 있겠지.”

집사는 말이 없었다.

데반은 그를 한 번, 여전히 백지인 편지지를 한 번 바라보다 우악스럽게 종이를 구겨 벽난로로 던졌다.

화르륵― 다시 한번 불이 거세게 타올랐고, 집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새 편지지를 올려놨다.

“……나도 안다.”

데반은 펜촉에 잉크를 묻혀 수려한 글씨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도망치듯 이 저택을 빠져나간 건 이 눈을 완벽하게 고치지 못할 거란 걸 미리 알고 있어서겠지.”

“…….”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데반은 펜을 든 채 편지지를 내려다봤고, 그 탓에 금세 잉크가 뚝뚝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노집사는 역시나 능숙하게 새 편지지를 다시 올려놨다.

톡톡― 데반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오른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데반은 다시 생각했다.

에블린이 벽을 타고, 병사들의 눈을 돌리고, 결계를 부수며 이 성을 탈출할 만한 이유에 대해.

그러곤 얼마 안 가 에블린이 저주를 완벽하게 풀지 못해 도망쳤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녀는 막대한 신력의 소유자는 맞았지만 예언의 주인공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예언을 따랐으나 저주를 풀지 못한 황족은 없었으니.

무엇보다 그녀가 떨어트리고 간 노란색 펜던트.

데반은 에블린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그 펜던트를 정밀하게 조사했다.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펜던트에는, 고도의 마법이 걸려있었다.

허락받은 자만이 펜던트를 열 수 있게 만드는 마법.

데반은 마법사들을 닦달해 어떻게 해서든 펜던트를 열라고 종용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안에 든 것이 데이지 꽃향기를 농축한 용액이라는 게 밝혀졌다.

데이지 꽃향기라니.

예언을 몰라 어리둥절한 마법사들과는 달리, 데반은 그 사실을 전해듣자마자 모든 상황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예언의 내용을 알아낸 건지는 몰라도, 에블린은 이 펜던트를 이용해 데반에게 사기를 친 것이다. 본인이 예언의 주인공인 척.

“하지만 말이야.”

데반은 킬리언 디에고가 이곳에 온다고 전했을 때 에블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던 것을 기억했다.

말을 번복하면서까지 갑작스럽게 진행된 오른쪽 눈의 치료와 그녀의 다급해 보였던 태도를 떠올렸다.

굳이 그렇게 급하게 도망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녀가 설령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 한들, 왼쪽 눈의 저주가 풀린 건 틀림없지 않은가.

더 시간을 끌어 막대한 돈을 가져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리라.

“난 왜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

그의 서늘한 눈동자가, 심경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어두운 호수 같은 그 오른쪽 눈동자가 책상 위에 올려둔 편지지를 꿰뚫을 듯 노려봤다.

정확히는 가장 첫 줄에 적어 둔 ‘킬리언 디에고’라는 이름을.

*

데반 란티모스는 심기가 불편했다. 평상시에도 그렇긴 했지만, 지금 특히 그랬다.

그는 제 앞에 앉아 빳빳한 자세로 차를 마시는 미남자를 바라봤다.

눈이 부신 은발에 역시나 눈이 부신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킬리언 디에고였다.

그의 예의는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조금 과하기까지 했다.

킬리언은 백작가의 장남으로, 굳이 근위대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백작 작위를 물려받아 그대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더군다나 디에고 백작가는 거부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킬리언의 태도는 이상했다.

겸손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꼭 데반의 곁을 오래도록 지킨 노집사 같았다.

그 정도로 깍듯하고, 정중했다.

“의식을 되찾으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알현을 허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데반은 대답 없이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그 거만한 태도에도 킬리언은 심지가 곧아 보이는 눈동자로 그를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

보나 마나 아스트릴라의 이름이 등장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킬리언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데반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저주가 풀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경과 상관있는 일인가?”

킬리언이 제 무릎으로 시선을 떨궜다. 꼭 벌서는 아이라도 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예언의 주인공을 찾으신 겁니까?”

데반의 미간이 한층 더 깊게 파였다.

“그게 경과 상관있는 일이냐고 물었네.”

무릎 위로 두 주먹을 올려 둔 채, 킬리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데반이 지루함을 느낄 정도가 돼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막대한 신력을 가진 자라면…… 예언의 내용과 상관없이 모든 저주를 풀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게 만들지 말게.”

데반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퍼뜩,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킬리언의 눈동자에 흥미를 느끼지만 않았어도 그리했을 터였다.

재미없을 정도로 심지가 곧은 눈동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알 수 없는 욕망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욕망이라?

거기에 하필이면 황금빛 눈동자라니.

데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마주 봤다.

“제가…….”

킬리언은 그의 시선을 피하더니,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사실은…….”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까의 그 욕망 어린 눈동자는 착각이었나. 데반이 다시 흥미를 잃어 갈 때였다.

킬리언의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지 않은 무례에 데반은 티 나게 얼굴을 구겼으나, 킬리언의 시선엔 그가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는 데반의 책상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과 등을 지고 있는 터라, 데반은 그의 시선을 좇기 위해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뭘 보는 거지?

책상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그가 저주로 눈이 멀었을 때 사용했던 마도구와, 편지를 봉할 때 사용하는 밀랍 도장.

그리고 에블린이 남기고 간 노란색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뿐이었다.

목걸이?

데반은 킬리언의 시선을 명백히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계속해서 멍하니 선 채로, 그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넋을 놓은 것처럼 굳어있던 남자는 이윽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블린…….”

저주 운운할 때부터 이상하더니, 정말로 에블린을 찾으러 온 건가?

데반은 그를 관찰하듯 바라봤다.

디에고 백작가의 남매는 우애가 좋기로 소문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동생이 걱정돼서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다, 여기까지 당도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1년 전 그때, 에블린이 지적했던 대로 대공 저에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영지에 대대적으로 퍼졌다.

데반은 황태녀가 온 거라고 수습했지만 그녀의 근위대장인 킬리언이라면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 수도 있었다.

정말로 그 소문이 그렇게 빨리, 제도까지 당도했단 말인가.

킬리언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1년이 지난 이 시점에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킬리언이 찾아왔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동생을 잃은 오라비의 지독한 집념 정도로 여길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때, 소문이 영지에 퍼지고 그가 알현 신청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며칠이었다.

그게 가능한가?

단 며칠 만에 이 변두리의 소문을 듣고 알현 신청을 하는 게?

“황태녀 전하의 근위대장을 맡는 자치곤 예의범절을 모르는 것 같군.”

데반은 부러 날카롭게 말을 꺼냈다.

킬리언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분노와 좌절,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이 들어 있었다.

“어디에 있습니까?”

“뭐가 말인가.”

“……에블린.”

꼭 목이 졸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킬리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잔뜩 억눌려 있었다.

“에블린?”

데반의 말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에블린……. 도대체 어디에…….”

그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스로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초조하게 몸을 들썩이던 킬리언은 급기야 허락도 받지 않고 데반의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데반은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더니, 책상을 향하는 킬리언의 등 뒤를 향해 검을 겨눴다.

이 이상 무례를 묵인할 수 없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제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뒷덜미에 서늘하게 닿는 검까지 무시할 순 없는지, 킬리언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일어나라고 허락한 적 없는 것 같은데. 걸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은 더더욱 없고.”

“……송구합니다, 전하. 제가…… 제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것 같아…….”

“네가 잃어버린 게 내 방 안에 있다?”

데반은 검 끝을 까딱거려 킬리언을 책상에서 멀리 떨어트렸다.

그러곤 마치 펜던트를 가리듯 그 앞에 몸을 기댔다.

한눈에 봐도 묵직해 보이는 검을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며 데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경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건가?”

“……전하. 제발…….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데반은 노골적으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제 목숨보다 소중하다라.

“그렇다면…….”

그가 킬리언의 목덜미에 검을 가져다 댔다. 서늘한 감촉에 킬리언이 몸을 굳혔다.

“그렇다면, 여기서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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