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저녁 식사를 든든히 한 후, 나는 곧바로 데반의 방에 직행했다.
약속된 시각보다 약간 이른 때였다.
벌컥, 문을 열며 말했다.
“준비됐으면 바로 시작하죠.”
들려오는 답은 없었고, 방 안은 굉장히 어두웠다.
문이 열리면서 함께 들어온 빛에 어렴풋한 실루엣이 보였다.
데반은 의사로 보이는 자와 함께 있었는데, 그가 데반의 안대를 새로 묶어 주고 있었다.
탁― 방에 불이 밝혀졌다.
난 그제야 데반이 훈련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 부러 방 안을 어둡게 해 둔 것 같았다.
내가 문을 열어 빛이 들어왔을 때, 만약 그가 안대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자 약간 오싹해졌다.
내가 조금이라도 빨랐다면…….
“그, 미안해요. ……노크를 했어야 했는데.”
데반은 혀를 차곤, 손짓 한 번으로 의사를 내보냈다.
그다지 화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앉지.”
서둘러 그의 곁에 가 앉았다.
“차도가 좀 있어요?”
“……말했던 대로. 저주는 풀렸지만 완전히 보이려면 며칠 걸린다는군. 오늘 네가 오른쪽을 치료해 주고 함께 훈련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
그는 은근하게 치료를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평소 성격을 생각한다면 꽤 다정한 말투였다.
심지어 내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음에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으니.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게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새삼 느껴졌다.
“좋아요. 얼른 하죠.”
덥석, 데반의 오른쪽 손을 붙잡았다.
다급해 보이는 내 태도에도 그는 군소리 없이 손을 내줬다.
“저번과 같이 집중하세요.”
“그러지.”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를 수도 있어요.”
“어째서?”
입술을 축였다.
처음 몇 번의 시도는 그의 양손을 붙잡은 채였다.
바로 어제는 왼손을 붙잡은 채였고.
그리고 지금은 오른손만.
그러니까 이 말은, 왼손이 상쇄해 주던 초반보다도 더욱 심한 거부감이 들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대답이 없는 나에게 데반은 혼자 납득한 듯 말을 이었다.
“아직 신력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건가?”
그는 내가 말했던 ‘뭔가’가 오른쪽에 한정돼 있는 줄 몰랐다.
어제 내가 왼쪽 눈을 치료한 것으로 장애물을 완벽히 없앴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요.”
난 그 착각에 부응하기로 했다.
굳이 진실을 말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데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눈을 치료한 뒤로 그가 유해진 건 분명했다.
날 완전히 믿고 몸을 맡기는 그를 보자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이게 마지막 치료였으니까. 설령 실패한다 해도, 난 그대로 도망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시작부터 역한 기분이 들었다.
위장이 모두 반대로 자리를 바꾸는 느낌이었다.
이건 절대로 평범한 저주가 아니야.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안의 신력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방대한 양이 느껴졌다.
그걸 데반의 오른쪽 손등으로 보내려고 할 때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형체가 내 쪽으로 스물스물 다가왔다.
내 신력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잡아먹힌다,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떼려고 할 때-
<킬킬>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낯선 소리에 놀라 멈칫했을 때였다.
검은 형체가 순식간에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꽉 붙잡은 손은 떼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걸 막고 있는 것처럼.
<금방 또 만났네?>
또 만났다니. 우리가 도대체 어디서 만났는데?
‘뭔가’와 대화를 하기 때문인 걸까? 어쩐지 역겨움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 검은 형체를 받아들이면, 그대로 편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안하지만 넌 날 몰아낼 수 없을 거야.>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익숙했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검은 형체는 몸 가장 깊숙한 곳, 내 방대한 신력이 잠들어 있는 곳까지 침투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걸 받아들이면 내 신력은 사라진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돌연 그런 생각이 들더니, 몸에 힘이 빠졌다.
지금껏 날 괴롭혀 오기만 했던 신력 따위 모두 포기하고 편해지면 안 되는 걸까?
이게 있어서 신전에서 이용당했고, 디에고 백작에게 갖은 고문을 당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애쓰며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죽어도 나쁠 건 없잖아.
문득 죽음이 그렇게 괴로운 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죽자. 편해지는 거야.
<도와주려는 거야. 순리대로…….>
이상했다.
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나른했고,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깨갱!’
그 순간, 머릿속에서 강아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잡아.’
‘컹! 컹컹!’
‘너 때문에 새끼를 셋이나 잃은 어미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보지?’
디에고 백작의 악독한 표정과 짐승의 짓눌린 울음소리가 떠올랐다.
그 끔찍했던 지하실이, 더 이상 아픔조차 느끼기 힘들었던 매질이, 킬리언의 시선이.
무엇보다…… 맹목적으로 날 바라보던 어미 개의 새까만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렇게 끝낼 순 없어.
고작 이런 것에 지려고 온갖 고통을 참아 가며 10년을 버틴 게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파앗― 내 안쪽에서 신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응?>
한 번 내 안쪽에 꾸물거리며 자리를 잡았던 검은 형체가 빠르게 밀려 나갔다.
나른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우욱.”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다시 역겨운 기분이 들었고, 토기가 차올랐다.
이편이 나았다. 고통은 제대로 된 사고를 가능하게 해줬다.
지금껏 버텨 온 날들을 무용지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것의 정체도 모른 채 반항 한 번 못하고 잠식되는 건 사양이었다.
살아남을 거다. 이따위 것에는 지지 않아.
무언가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라도 하듯,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온통 새하얀 빛 무리가 가득했다.
눈이 부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데반의 주위로 검은 형체가 꾸물거리는 게 보였다.
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크기였다.
힘겨루기라도 하듯, 새하얀 내 신력과 그 검은 형체는 나와 데반의 중간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하……. 너, 끝나지 않은 아이였구나. 그러니 시작도 하지 못했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난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몰아내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쪽과 데반 쪽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그것들은 커다란 소음과 함께 폭발했다.
팟―
몸의 균형이 무너지고, 난 그대로 튕기듯 쓰러졌다.
그제야 이 모든 일련의 상황에도 데반이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하다는 걸 눈치챘다.
“으으…….”
소파를 넘어 바닥에 곤두박질쳐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가물가물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나와 비슷하게 바닥에 쓰러져 있는 데반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윽.”
복부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장기 안쪽, 모든 신력의 근원에서.
설마……. 이미…….
<다음에 봐! 아니, 인사는 필요 없나?>
발랄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들리고, 서서히 눈앞이 흐려졌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데반 란티모스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저주는 확실히 풀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저도 도통…….”
익숙한 노집사의 목소리와 눈의 치료를 위해 성에 불렀던 의사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데반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어쩐지 몸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건가! 저주가 다 풀렸다면 대체 왜 깨어나지 않으시는 거냔 말이야!”
“그게 이론상은 그래야 하는데요…….”
이번 목소리는 카렌이었다.
저자까지 도대체 왜 여기에.
데반의 미간이 짙게 패였다.
그의 가슴팍이 위아래로 크게 오르내리고, 마침내 그가 아주 약간 몸을 일으켰다.
“오늘로 벌써…… 대공 전하!”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건 카렌이었다.
카렌은 재빨리 데반의 곁에 다가와 그가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왔다.
“괜찮으십니까?”
다급한 노집사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데반은 천천히 상황을 가늠해 봤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꼭 오랫동안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데반의 목소리가 푹 잠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제 눈을 만져 봤다.
여전히 검은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머리가 지끈거렸다.
에블린 디에고, 그 애를 납치했고 치료를 종용했고, 거래를 했었지.
마침내 왼쪽 눈의 저주를 푸는 데 성공했고, 그 대가로 돈을 줬다.
거기까진 기억났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설명해.”
데반이 싸늘하게 말했다.
움찔, 몸을 떤 카렌이 슬쩍 노집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눈치싸움에서 패배한 건 노집사였다. 작게 한숨을 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날…… 오른쪽 눈을 치료했을 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소식이 없어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집무실에 갔습니다.”
“요점만 말하지.”
“……두 분 다 쓰러져 계셨고, 서둘러 의사와 신관 등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선 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습니다.”
데반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 오른쪽 눈을 치료해 주겠다고 했다. 집무실에 마주 앉았었지. 그리고…….
에블린이 제 손을 잡고 집중하라고 한 후부터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저주는?”
“신관에게도 확인을 받았는데, 저주는 완벽히 치료됐답니다!”
의사가 끼어들었다. 꼭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모양새였다.
“그럼 이제 앞을 볼 수 있는 건가?”
데반은 금방이라도 안대를 벗을 것처럼 손을 올렸다.
재빨리 저지한 의사가 말을 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일단 예전처럼 빛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먼저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저주는 분명히 풀렸지만.”
“잠깐.”
어딘가 위화감을 느낀 데반이 손을 들어 의사의 말을 멈췄다.
“예전?”
“예?”
멍청한 목소리의 의사 뒤에서, 노집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정신을 얼마나 잃었던 거지?”
데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