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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5화 (15/123)

15화

이대로 데반의 저주를 풀지 않고 도망간다.

번뜩 든 생각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가 사라지면, 데반은 평생 반쪽짜리 저주에 걸린 채로 살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코델리아가 나타났잖아.

내가 이대로 사라지면 데반은 어떻게 해서든 날 찾으려 할 것이다. 그는 내가 예언의 주인공인 줄 알고 있으니까.

저주를 풀다 말고 도망갔으니, 괘씸해서라도 그럴 거야.

그러다 보면 역시 날 찾아다니는 신전과 정보를 나눌 수밖에 없을 테고, 언젠가 코델리아를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어쩌면 그 둘은 서로를 알아볼 수도 있어.

비록 코델리아에게 디에고의 인장은 없지만, 그녀는 데이지 꽃향기가 나니까.

거기다 원작의 주인공들인걸. 운명처럼 이끌릴 수도 있겠지.

주먹을 꼭 쥐었다.

이 모든 게 내 합리화는 아닐까.

나 혼자 살자고 데반을 내팽개치고 떠나도 되는 걸까.

“하아…….”

털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의 오른쪽에 있던 정체 모를 어두운 형체가 떠올랐다.

무언가에 붙잡힌 듯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대체 그건 뭐였을까. 원작에서는 그런 묘사가 없었는데.

내가 개입함으로 인해서 뭔가가 바뀐 걸까.

그게 데반과 코델리아의 상황을 안 좋은 쪽으로 변하게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손바닥이 하얘지도록 두 주먹을 쥐었다.

여전히 천장에선 화살이 잔뜩 박힌 사자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사자가 불쌍해 보였다.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난 성의 구조를 살피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카렌과 함께 정원을 둘러봤을 때, 유난히 오르내리기 쉬워 보이던 성벽을 기억해 뒀었다.

그게 성 내부에서는 어디인지 찾아내야 했다.

언제 도망가야 할지 모르니까.

바깥에서 봤을 때 연기가 나고 있었으니까, 주방 쪽일 테다. 아직 따듯한 날씨라 벽난로도 때지 않으니.

힐다도 없이 혼자 살금살금 그레이트 홀로 향했다.

주방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지만, 집사가 항상 음식을 내오는 방향은 알고 있었다.

이쪽이겠지?

그레이트 홀 왼쪽 입구로 들어갔다.

코너를 꺾자, 곧바로 음식 냄새가 풍겼다.

정답이었다. 이 건너편에 주방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곳을 통해 도망치려면 안의 구조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주방 사용인들이 언제 주방을 비우는지, 또 그 비운 주방을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그걸 알아내야 했다.

그렇다고 지금 갑자기 들어갔다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무슨 핑계를 대야…….

그 순간이었다.

주방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품 안 가득 식재료를 든 멍한 인상의 시종이 튀어나왔다.

“아……가씨?”

핑계를 댈 시간도 없이, 들켜 버렸다.

난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서둘러 턱을 치켜들었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아가씨!”

시종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저, 여기는 무슨 일로…….”

“그냥, 잠깐 둘러볼 수 있을까?”

“그……. 그럼요. 아가씨!”

시종은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슬쩍 문에서 비켜섰다.

어찌 됐든 겉으로는 백작 영애인 날 한낱 시종이 막아설 명분은 없었다.

주방은 사용인들로 북적거렸다.

다른 휑한 곳들과 달리 이곳만큼은 디에고 백작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음식이 맛있었던 이유가, 그만큼 데반이 신경 쓰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저기 물이 끓잖아! 덜 익었어, 더 구워! 거기 너, 창고에 다녀오랬더니 왜 아직…….”

주방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이리저리 고함을 치며 통솔하고 있었다.

그러다 날 보곤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누구…… 혹시 그, 아가씨십니까?”

‘그’ 아가씨라.

데반이 나에 대해 떠벌리고 다닐 리는 없었으니, 내가 그의 저주를 풀기 위해 왔다는 걸 알진 못할 터였다.

그렇다면 사용인들 사이에도 영지에서 도는 것과 비슷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걸까.

“그냥 조금 둘러보러 왔어.”

“주방을요?”

그녀는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를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그러실 수 있죠. 뭐가 궁금하십니까?”

생각보다 유한 태도에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내 짐작이 맞는 것 같았다.

사용인들 사이에 퍼진 소문도 영지에 퍼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이 성의 안주인이 될 사람으로서 미리 주방을 확인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음. 주방은 사람이 꽤 많네? 전하께서 음식에 신경을 많이 쓰시나?”

“예, 미식가셔서요.”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는지도 잘 알겠군?”

그리고 지금으로썬, 그 소문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남의 연애담이라도 듣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변했다.

“예, 그럼요. 전하께선 싱싱한 샐러드와 거의 익히지 않은 고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래…….”

난 슬쩍 그녀에게 더 다가가며 주방을 한 바퀴 휙 둘러봤다.

사용인들은 내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주방에는 창문이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다행히 음식 연기가 나가는 곳은 꽤 커다란, 다른 쪽 창문이었다.

내 몸이 능히 빠져나갈 정도의 크기였다. 창문 밖에는 내가 밖에서 봤던 오르내리기 쉬워 보이던 성벽이 있었다.

주방장은 아래를 굽어보는 나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난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말투에서 단 하나의 유해함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그럼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

주방장은 술술 정보를 불었다.

약간의 대화만으로 나는 주방이 밤 열한 시에 모든 일을 마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자가 처음 문을 열고 나왔던 맹한 표정의 시종이라는 것도.

모든 정보를 얻은 후에는 식사를 위해 내려온 척 그레이트 홀의 테이블에 앉았다.

데반은 내가 그보다 먼저 왔다는 사실에 약간 놀란 듯했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곧 호화로운 식사가 나왔다.

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식사를 하며, 계속해서 주방을 주시했다.

과연 그 어리고 맹해 보이는 시종에게 주방의 열쇠를 맡길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저택 어딘가에 중요한 열쇠들을 관리하는 곳이 있고, 시종이 출퇴근을 하며 그곳에서 열쇠를 받아오는 것.

그게 더 현실성 있었다.

그렇다면 그 열쇠를 관리하는 곳은 어딜까.

이 성에 계속 머무르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이봐.”

갑자기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데반이 식기를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네 말대로더군. 왼쪽 눈의 저주는 모두 풀렸다고 한다.”

그새 의사와 의논을 한 모양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은 채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됐네요.”

“오늘은 역시 치료가 없는 건가?”

“아…….”

‘오른쪽은? 내일은 오른쪽의 저주를 풀 수 있나?’

‘일단 조금 느긋하게 가죠. 원래 신력이 그렇게 한 번에 막 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분명 어제 신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핑계로 치료를 미뤘었다.

오른쪽의 그 이상한 형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직 전혀 단서를 찾지 못해서였다.

데반은 약간의 긴장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는 나에 대한 신뢰를 완벽히 회복한 것 같았다.

지금껏 그 누구도 풀지 못한 저주를 풀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건 왼쪽뿐이었다.

오늘 섣불리 치료를 시작했다가 또다시 쓰러지는 등의 추태를 보인다면 그의 신뢰에 다시 금이 갈지도 몰랐다.

역시 오늘은 치료를 미뤄야겠다고, 막 입을 열 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말하는 걸 잊은 게 있는데…….”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데반이 화제를 돌렸다.

“중요한 건가요?”

“어쩌면.”

난 포크를 옆에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신전이 나에 대한 단서를 찾은 걸까, 아니면 코델리아의 이야기일 수도.

적어도 긍정적인 소식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다 먹었다는 뜻으로 노집사를 바라보자, 그가 눈치 빠르게 식사를 치우고 홍차를 내왔다.

“뭔데요?”

“네가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알아도 별생각 안 할 수도 있지만…….”

답지 않게 그의 서론이 길었다.

“네 오라비, 킬리언 디에고가 알현 신청을 해 왔다.”

뭐?

난 그대로 마시던 차를 뿜을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대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내려뒀다.

찻잔과 받침이 부딪쳐 덜그럭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오라비, 킬리언, 디에고, 알현.

단어들이 채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머릿속을 부유했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네가 여기 있는 걸 알 리는 없으니, 너 때문은 아니겠지만. 듣자 하니 남매간의 우애가 돈독하다던데 만나게 해 줄 순 없지만 원한다면 멀리서 보는 것 정도는 허락할 수도 있다.”

데반은 꼭 대단한 선심이라도 쓴 것 같은 말투를 했다.

난 입술만 달싹거리고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그러니까……. 왜요?”

겨우 내 입에서 나온 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왜냐니? 왜 만나게 해 줄 수 없느냐고 묻는 거면, 어쨌든 난 널 아무런 말없이 데려왔고―”

“아니, 그게 아니라 오라버니가 대체 왜 알현 신청을…… 한 건데요?”

그는 질문이 의외인 건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아스트릴라 직속 근위대의 대장이 된 걸로 알고 있다. 한 번쯤 나를 만나러 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

아스트릴라 란티모스. 이 제국의 황태녀.

그러고 보니 킬리언은 그녀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다.

얼마 전 근위대장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아무리 저주에 걸렸어도 데반은 황태녀를 제외하면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다. 흉흉한 소문도 퍼져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 그의 알현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이유로 오는 거라고?

절대 그럴 리 없다. 어떻게 안 거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까드득 이를 물었다.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그러다 제가 납치됐다는 걸 들킬 수도 있어요. 그럼 전하께도 좋지 않을 텐데요?”

“나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어.”

“무슨 명분이요?”

데반이 의자에 몸을 깊게 묻었다.

“섣불리 거절했다간 황태녀에게 모반을 꾀하는 것으로 의심받을 수가 있거든.”

그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결정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하나였다.

그가 오기 전에 내가 이곳을 떠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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