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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3화 (13/123)

13화

“의외로 정원이 아름답네요.”

시간을 죽이고자 꺼낸 내 말에 카렌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확실히 의외이긴 하죠. 대공 전하께서 성을 꾸미는 데에는 재주가 없으시니까요. 이 정원은 모두 병사들의 공적입니다.”

“병사들이요?”

난 색색별로 잘 정돈 돼 있는 화원을 바라봤다.

“하도 할 일이 없으니, 다들 이런 데에 취미를 붙여서요.”

“대공 저에는 큰일이 터지지 않나 보네요.”

카렌은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변두리니까요. 거기에 대공 전하는…… 황권에도 제도에도, 정치에도 하등 관심이 없으시잖습니까.”

황권에도, 제도에도, 정치에도 관심이 없다라.

난 제국 전체에 퍼진 소문을 떠올렸다.

그가 제 동생을 끌어 내리고 언젠가 황좌를 차지하려 한다는 그 소문.

하지만 막상 그를 만나니, 카렌의 말에 공감이 갔다.

그는 그런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저주를 풀고 이대로 대공 저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만이 그의 목표 같았다.

어쩌면 그의 처지와 내 처지가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란 자 때문에 한곳에 처박혀 어디에도 나아갈 수 없는 모습, 되도 않는 소문에 시달리는 모습 따위가.

서둘러 고개를 털었다.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었고, 난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그런 둘의 처지가 비슷하다니. 웃기는 소리지.

“카렌 경은 제국 밖으로 나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난 짐짓 가볍게 지나가는 말처럼 카렌에게 물었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제 이야기를 떠벌리기 시작했다.

“몇 번 원정 때문에 나가 본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국경 근처의 기사단에 소속돼 있었거든요.”

“와, 전 백작령을 나가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너무 신기해요. 북쪽에는 아름다운 곳이 있다고 들었어요. 정말인가요?”

사실은 백작령이 아닌, 백작가 성에서도 나가 본 적이 없었지만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북쪽이라면 엘리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엘리운.

손쉽게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백작가에서 갇혀 지내는 나날 동안, 난 킬리언에게 근처 제국에 대해 알 수 있는 서적을 부탁했었다.

이곳을 떠나서 정착할 만한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은 곳이 바로 엘리운이었다. 대공령과 가까우면서, 숨기 쉬운 곳.

난 손뼉을 치며 미소 지었다.

바깥 세계에 열렬한 관심이 있는 순진한 백작 영애처럼.

“카렌 경은 엘리운도 가 보셨나요?”

“그럼요. 엘리운에서는 1년 내내 하늘에서 눈이 내립니다. 이 제국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풍경이라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생활하기 힘들기도 하죠.”

“그렇게 눈이 많이 오면 이동하기 불편하겠어요.”

“예, 안 그래도 눈이 특히나 많이 오는 시기에는 거주민들도 주로 칩거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말이나 마차도 다니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그곳에 갔을 때 잠깐 썰매를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타고난 운동 신경을 가지고도 어찌나 힘이 들던지.”

카렌은 묻지 않은 것까지 떠벌렸다. 어느새 화제는 그의 운동 신경으로 넘어 갔다.

난 그의 말에 대충 호응해 주며, 엘리운을 떠올렸다.

1년 내내 하늘에서 눈이 오고, 주로 칩거를 한다…….

카렌의 이야기는 나에게 확신을 줬다. 엘리운이 내 여생을 바쳐 정착할 만한 곳이라는 확신.

마침 발길이 닿은 정원 한구석에는 눈처럼 새하얀 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앞서가던 카렌 역시 그 자리에 멈췄다.

엘리운.

혀 안으로 굴려보는 그 이름이 달콤했다.

그 눈 속에 숨어들면…….

흰 나비 하나가 꽃 위에 앉았다.

아무도 찾지 못하겠지.

허리를 숙여 꽃을 망설임 없이 툭, 꺾었다. 흰 나비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팔랑거리며 나비가 날아간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 순간, 노란색 펜던트가 쇄골을 간지럽혔다.

뭐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뒷골이 서늘해졌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카렌을 제외한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시선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기분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사실이 고개를 쳐들었다.

킬리언.

그 욕망으로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떠올리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갑작스럽게 이런 기분이 든 걸까. 킬리언이 이곳에 있을 리 없는데.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카렌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제야 내 낯빛이 안 좋다는 걸 깨달았다.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는 백작령에 있고, 나는 이곳에 있다. 아니, 곧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숨어들 것이다.

난 10년간 준비했던 계획의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그로부터 이틀 후, 킬리언이 대공 저로 찾아올 것도 모른 채.

*

정원에서 돌아와 가볍게 목욕한 후, 데반의 방으로 향했다.

치료를 위해서였다.

‘오늘, 저녁 치료에서는 분명 성과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적어도 한쪽 눈은 보이게 해 줄게요.’

그렇게 장담한 이상 반드시 해내야 했다.

주먹을 꼭 쥐고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데반은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 역시 약간은 긴장돼 보이기도 했다.

하긴, 한 쪽이든 두 쪽이든 그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던 앞이 보일 수도 있다는 희망. 그건 내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일 테지.

“앉지.”

데반이 제 옆자리를 건드렸다.

심호흡을 한 번 더 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자신은 있는 건가?”

그는 제 두 손을 깍지 꼈다.

뼈가 툭 불거진 손가락 마디마디가 붉게 변할 정도로 강하게.

“있어요.”

아니, 사실 없었다.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나조차 눈치챌 정도였다.

“다만, 제가 또 쓰러질지도 몰라요. 그건 이해해 주세요.”

“결과만 확실하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손 주세요.”

데반이 여태껏 했듯 두 손을 내밀었다.

“왼손만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는 순순히 오른손을 다시 가져갔다.

난 두 손으로 그의 왼손을 붙잡았다.

맞잡은 손바닥에 땀이 났다. 그게 나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전하께서도 집중해 주세요. 최대한 흐름을 느끼려고 노력해 주세요.”

“흐름이라.”

“왼쪽 눈을 치료할 거예요. 그쪽에 신경을 모아 주세요.”

“그러지.”

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왼쪽 눈만을 먼저 치료한다고 한 이유는 뻔했다.

그의 왼손을 잡았을 때 알 수 있었다. 이상한 기운은 오른쪽에만 흐르고 있었다.

만약 지금껏 내가 그의 치료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가 모두 그것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왼쪽은 가능하지 않을까?

천천히 신력을 흘려보냈다. 그의 손등을 타고 신력이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전처럼 역겨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싹한 한기도, 식은땀과 달달 떨리는 손도 없었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어.

신력은 빠르게 퍼졌다. 신전에서 환자들을 치료했을 때와 같은 수준이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내 손으로 누군가를 치료하는 기분. 역겹다기보단 오히려 포근한 느낌.

손등을 타고 팔목을 타고, 마침내 데반의 왼쪽 눈에 신력이 닿았다.

잔뜩 얽혀 있는 저주가 느껴졌다.

저주를 치료한다는 건, 저주가 있는 자리에 신력을 대신 메우는 일이었다.

메운다고는 해도, 애초에 신력이 없는 자는 신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니 결국 얼마 안 가 신력도 저주도 한 번에 사라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청소였다. 신전에서는 이를 정화라고 불렀고.

그의 저주에 신력을 흘려보냈다. 저주가 차 있던 자리를 순식간에 신력이 메우는 게 느껴졌다.

응?

그때였다. 갑자기 역겨운 기분이 들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였다. 정신을 더 집중해 보니, 그의 오른쪽 눈 근처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 오고 있었다.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형체가.

조금이라도 가까이 갔다간 내 신력이 잡아먹힌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점점 토기가 올라왔다.

저곳을 건드려선 안 됐다.

나는 서둘러 신력을 불러들이고, 데반의 몸에서 손을 뗐다.

“후.”

천천히 심호흡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신력을 먹히고 말았으리라.

“뭐지?”

데반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제 왼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가 느끼기에는 눈 깜짝할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난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데반을 빤히 바라봤다.

다행히 전처럼 검은 형체가 그의 주변에서 일렁이지는 않았다.

다시 그의 왼손을 슬쩍 잡았다.

왼쪽 눈에 걸려 있던 저주가 모두 사라지고, 그 안에 내 신력이 가득 차 있는 게 느껴졌다.

신력 역시 빠르게 소멸 중이었다.

그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주에 걸리기 전 상태로.

……왼쪽뿐이지만.

작게 안도의 숨을 쉬고 말했다.

“끝났어요.”

“끝났다고?”

그는 내 말을 멍하니 되풀이했다.

“왼쪽 저주를 없앴어요. 아마, 곧 왼쪽 눈은 보일 거예요.”

“……정말인가?”

의구심이 가득한 어조로 그가 물었다.

그럴 만했다. 저주를 푼다고 특별한 느낌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신체적 훼손이면 모를까, 그처럼 눈이 먼 자는 특히 더했다.

“눈은 제대로 치료됐을 거예요. 다만―”

서둘러 안대를 벗으려 하는 그의 손을 저지했다.

“저주가 없어졌다고 곧바로 앞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지?”

“완벽히 예전 상태로 돌려주는 건 아니란 소리예요. 가령, 10년 동안 다리가 마비됐던 사람의 저주를 풀어 준다고 바로 걸을 수 없는 것처럼요. 훈련이 필요해요.”

“……어떤 훈련?”

그는 초조해 보였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일단은 어둠 속에서 눈을 뜨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갑자기 빛을 보면 위험하니까요.”

“그러지.”

“그리고 의사를 한 명 불러오는 것도 좋겠죠. 저는 저주를 풀 수 있을 뿐, 의학적인 도움을 드릴 순 없으니까요.”

“……알았다.”

순순히 내 말을 따르면서도 그는 어딘가에 정신을 빼앗긴 듯 멍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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