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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을 치료하고 도망쳐버렸다-12화 (12/123)

12화

안 그래도 싹을 틔우고 있던 의심에 방금 전 내가 한 행동이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데반은 다리를 꼬더니, 지그시 날 바라봤다.

물론 그의 눈은 보이지 않겠지만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데반이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난 그의 의심을 피할 방법을 고심했다.

“그건 저주가 아니었어요. ……아니어야 해요.”

“착각이었다?”

“……제 신력이라면 저주는, 저주는 손쉽게 치료할 수 있어요. 분명 그 외에 뭔가 있는 거라구요.”

단호한 내 말투에 데반이 깊게 한숨 쉬었다.

이 말은 정말이었다.

신전에서 살았을 때, 난 저주를 치료해 본 적이 있었다.

신의 저주는 황족에게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부정을 저지른 자들도 종종 저주에 걸리곤 했다.

신전은 저주를 풀어 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돈을 받아 냈다.

물론 실제로 치료하는 건 나와 같이 큰 신력을 타고난 아이들의 몫이었다.

황족에게 걸리는 저주는 예언 때문에 조금 더 까다로울 뿐이었다. 그 역시 저주를 능가할 정도로 막대한 신력이 존재한다면 이론상으론 치료가 가능했다.

물론 이 전까진 나나 코델리아만큼 큰 힘을 지닌 아이가 없어 예언의 단서를 찾아다녀야만 했지만…….

하지만 아까 데반의 주위를 감싸던 그 어둡고 위험해 보이는 기운은 내가 접했던 저주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 뭔가…… 뭔가를 처리할 수만 있으면 치료하는 건 쉬운데…….”

난 손톱 끝을 초조하게 뜯었다.

“아까부터 자꾸, 내게 문제가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문제인지는 몰라도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해요.”

“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른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데반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이미 날 의심하고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오늘.”

단호한 내 한마디에 데반의 신경이 내 쪽으로 향했다.

난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 저녁 치료에서는 분명 성과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적어도 한쪽 눈은 보이게 해 줄게요.”

“한쪽 눈?”

왜 하필, 이라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난 깊게 심호흡했다.

이건 도박이었다. 그의 신뢰를 얻기 위한 도박.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으니까요.”

데반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저건 기대일까, 불안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생리적 현상인 걸까.

잠깐의 정적이 지나갔다.

“……알았다.”

그가 대답했다. 이젠 되돌릴 수 없었다.

더 이상 그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으리라.

*

저녁 치료에 앞서, 난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힐다가 내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힐다.”

“예, 아가씨.”

“넌 이 성의 길을 알고 있니?”

“그럼요, 아가씨! 모두 알고 있지요. 가고 싶으신 곳이 있으세요?”

힐다는 나보다도 하루 늦게 온 주제에 어떻게 이토록 자신만만한 걸까.

조금 의아했지만, 든든하기도 했다.

“그냥 좀 둘러보고 싶어. 아직 길을 잘 모르거든.”

“성 내부요?”

“음……. 아니, 일단은 바깥을 좀 볼까?”

“그럼 정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아가씨.”

그녀가 슬쩍 앞장섰다.

정문은 꽤 멀었고, 덕분에 가면서 성의 내부도 구경할 수 있었다.

성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컸다.

지금껏 내 발길이 닿은 곳은 내 침실과 데반의 집무실, 식사를 하는 그레이트 홀뿐이었다.

그게 알고 보니 성의 동쪽 탑에 해당되는 곳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성 전체는 그 공간의 세 배는 넘는단 소리였다.

디에고 백작의 성 역시 다른 곳에 뒤지는 크기는 아니었다. 사교회에 참석한 영애들에게 들은 사실이니 분명했다.

그런 백작성과 비교해도 이곳은 무지막지하게 컸다.

오가는 사람도 없고 장식이나 가구에 음산한 분위기가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

“저쪽이 정문이에요, 아가씨.”

“그래.”

우리가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대뜸 두 명의 병사가 앞을 막아섰다.

이 성에선 노집사와 힐다, 데반을 제외하고 처음 보는 사용인이라 난 움찔 놀랐다.

“이곳으로는 더 이상 가실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병사 둘은 말없이 창 두 개를 겹쳤다. 꼭 포위하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대공 저에 제대로 된 병사가 있다는 사실에 한 번, 그들이 날 막아선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병사들의 뒤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병사들과 비슷한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그 위용이 남달랐다.

검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사내가 병사들을 지나쳐 내게로 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절제된 몸놀림이 꼭 킬리언과 비슷했다.

기사구나,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레이디, 성 밖으로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왜죠?”

“그야…….”

기사가 곤란한 듯 볼을 긁적였다.

난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설마…….”

“하하…….”

그가 더 어색하게 웃었다.

그자였다. 디에고 백작가에서 날 이곳으로 납치해 와, 내 목덜미를 내려쳐 기절하게 만든 자.

“당신이군요.”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하의 명인지라.”

새삼스럽게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기에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그는 오히려 내 은인이기도 했다. 헷갈리지 않고 날 제대로 납치해 줬으니까.

“그보다 성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은, 그것 역시 전하의 명인가요?”

“따로 명하신 건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고 처지가 처지이신지라.”

“……설마 지금까지 절 감시하셨나요?”

그가 나타난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하지 않은가. 내 물음에 사내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어쩐지. 첫날, 날 방에 가둬 둔 것치곤 성 이곳저곳을 활개치도록 내버려 둔다 했다.

안 보이는 곳에서 병사들이 날 감시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기분이 찝찝했다. 애초에 데반이 날 완전히 신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쩐다. 난 조용히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감시는 그렇다 쳐도 성 밖에 못 나가는 건 곤란했다.

언제가 될진 몰라도 난 이 성을 탈출해야만 했다.

물론 상황이 아주 잘 풀린다면, 내가 데반의 저주를 모두 치료할 때까지 그가 날 의심하지 않고, 신전에서 날 찾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데반에게서 정정당당하게 돈을 받고 성을 나갈 수 있겠지만.

그런 요행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저주를 푸는 데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부터, 오늘 데반의 태도만 봐도 그랬다. 이미 날 의심하는 것 같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코델리아의 이름까지 나왔으니……. 도저히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잠깐 산책을 하고 싶은데, 경과 함께여도 곤란할까요?”

눈썹을 늘어트리며 기사에게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내 태도에 약간 놀란 듯했다.

“대공 전하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역시, 이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다.

나는 기사의 뒤에 서있는 병사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 네가 가서 한번 여쭤봐 주겠니?”

“저 말입니까?”

병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손가락질했다. 하는 행동이며 생긴 게 경력이 길어 보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나이가 어려 보였다.

“그래, 너 말고 달리 누가 있겠니. 내가 다시 이 먼 길을 돌아갈 수도 없고. 나는 아직 내 방의 위치도 외우지 못했단다.”

“아……. 알겠습니다, 레이디!”

약간 붉어진 얼굴로 병사가 후다닥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한 뒤에, 기사에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예?”

그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난 킬리언이 껌뻑 죽었던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경의 성함을 알고 싶단 뜻이었습니다. 실례가 될까요?”

“……그럴 리가요. 카렌 위보우입니다, 레이디 에블린.”

“카렌 경……. 그렇군요. 멋진 이름이네요.”

한 번 더 짙게 미소 짓자, 카렌의 몸이 약간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얼마 가지 않아 병사가 돌아와 보고했다.

“대공 전하께서 카렌 경과 함께라면 정원까지는 돌아봐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레이디.”

뛰어온 걸까? 그가 거친 숨을 쉬며 칭찬해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싱긋 웃어 주고 시선을 카렌에게로 돌렸다.

“정원이라……. 정원이 많이 큰가요?”

“산책하기엔 부족함이 없으실 겁니다. 제가 모시죠.”

카렌이 정중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손을 가볍게 올렸다.

“갈까요, 레이디?”

“좋아요. 그럼, 힐다 너는……. 힐다?”

난 주위를 둘러 힐다를 찾았다. 그러나 힐다는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 사라진 거지?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을 때만 해도 분명 내 옆에 있던 힐다는, 홀연히 모습을 감춘 뒤였다.

“레이디? 무엇을 찾으시는 겁니까?”

카렌이 의아한 얼굴로 움직이지 않는 나를 돌아봤다. ……뭐, 급한 일이 있어 돌아갔겠지.

“……아니에요. 가죠.”

찝찝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나는 카렌의 뒤를 따랐다.

*

카렌과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난 성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했다.

가령 이런 것들이었다.

성에서 나오면, 커다란 정원을 성벽이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다. 성벽을 나서면, 또다시 강이 감싸고 있었다.

원 안의 원 안의 원이었다.

그 강을 건널 방법은 오로지 성문에서부터 일자로 나 있는 다리뿐이었다.

성을 호위하는 병사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저 딱 구색을 맞출 정도였는데, 다만 카렌 정도로 실력 있는 기사도 몇 명 있는 것 같았다.

한 번이라도 들킨다면 곧바로 붙잡히겠지.

그러니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벽 정문을 통과해 다리를 건너는 것.

다리 끝에 있는 커다란 숲까지만 당도한다면 추적을 따돌릴 수 있으리라.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수많은 화목이 피어있는 정원을 카렌과 함께 걸었다.

빈틈이 있을 때마다 성의 창문에서 바닥의 거리를 재는 걸 잊지 않았다.

내 방에서 정문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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