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호, 혹시 대공 전하도 신력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닐까요?”
힐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신력을?”
그런 낌새는 없었는데.
곰곰이 생각하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리고 전하께서 신력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오히려 더 쉽겠지, 이렇게 내가 쓰러질 리가……. 잠깐.”
신력이 아니라 다른 게 있는 건가?
이를테면 마력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적응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력을 받아들이기 힘든 몸이라서, 날 튕겨 내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내 탓이 아니라 데반 탓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전하가 마법을 할 줄 아나?”
“아니실걸요?”
내가 알기로도 아니었다.
원작에서 그가 마법을 쓰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뭐지?
신력도 마력도 아니면 대체 뭐가 있지?
애초에 원작에서 코델리아는 그를 치료하는 동안 한 번도 쓰러진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내가 진정한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속이 쓰렸다.
예언의 주인공이 아님에도 그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방대한 내 신력의 양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내 신력이 코델리아에 비해 부족한 거라면, 그래서 이런 거라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난 어디까지나 대체품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돈은?”
“예?”
힐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반에게 돈을 받아야 했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
걱정스러운 표정의 힐다가 내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조, 조금 더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쓰러지셨었는데…….”
난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무작정 방 밖으로 향했다.
정말로 내가 예언의 주인이 아니라 치료가 안 되는 거라면, 그렇다면 더더욱 돈이 필요했다.
돈, 이 제국을 떠날 수 있을 정도의 돈.
지금 내게 간절한 건 겨우 그거였다.
*
원작을 건드리지 않고 백작가를 떠날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차라리 백작의 학대를 피해 도망쳐 버릴까.
킬리언을 이용해서 며칠이라도 버틸 수 있는 돈을 구한다면 달아나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특히 열여덟, 킬리언이 근위대에 들어간 이후로 그랬다.
나는 백작가에 갇혀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그에 반해 킬리언은 제도와 백작령을 오갔다.
예전과 달리 지금의 그라면 제가 황궁에서 번 돈이 있을 테고, 그 정돈 쉽게 내어 주지 않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킬리언은 디에고였다. 그는 킬리언 디에고였다는 말이다.
내가 그에게 얼핏 돈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난 그의 눈빛에서 백작과 비슷한 욕망을 볼 수 있었다.
다 잡은 줄 알았던 물고기가 제 말을 듣지 않았을 때의 분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던 위화감이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킬리언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의 사정거리 안에 있을 때만이었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남자는 절대로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어쭙잖은 계획으로 도망쳤다간, 붙잡힌다. 그것도 백작이 아닌 킬리언에게.
그러니까 나에게 남은 방법은 데반 란티모스뿐이었다.
이 제국의 대공이라는 권력과,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는 데반 란티모스.
그의 저주를 치료하고 돈을 받아야 했다. 그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으니까.
벌컥― 데반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데반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평온했다.
복도를 걸어오는 내 발소리를 들은 게 틀림없었다.
“돈이요. 돈 주세요.”
“……몸은 괜찮은 건가?”
“괜찮아요. 그보다 돈이요.”
데반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책상에 몸을 기댔다.
그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네 걱정을 하는 게 아니야.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쓰러진다면, 내가 널 뭘 믿고 돈을 주지?”
“그건……!”
“너는 내 몸 전체에 신력을 불어넣었다고 했지만, 내가 느낀 건 찰나의 고통뿐. 정말로 치료에 진전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지 않나?”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내가 그의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이유는 저주를 고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대로 그의 신뢰를 잃었다간 모든 게 끝장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미 내가 예언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마법 쓸 줄 알아요?”
“뭐?”
뜬금없는 나의 말에 데반이 얼굴이 구겨졌다.
“아니죠?”
“그래. 그건 왜 묻는 거지?”
“뭔가…… 뭔가가 전하의 몸에 신력이 들어오는 걸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네 탓이 아니다?”
“……그래요.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예요.”
데반이 팔짱을 꼈다.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 듯했다.
“그런데 마법은 왜? 신력을 막는 게 마력이라는 건가?”
“가능성을 점쳐 본 거예요. 하지만 마법을 쓰지 못하신다면, 역시 아니겠죠.”
“마법을 쓰지 못해도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있다고 들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다.
데반이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정말 마력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성큼성큼 데반의 앞으로 다가갔다.
“잠깐만 손 좀 줘 봐요.”
대답도 듣지 않고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뭘 하려는 거지?”
“기다려 봐요.”
그대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저번처럼 내 신력을 흘려보내려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데반의 몸에 감돌고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전과 달리 그의 몸에 흐르는 혈액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이건…….”
인상을 팍 구겼다.
데반의 오른쪽에 뭔가가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신력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력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 이상한 기운에 가까이 갈수록 역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신력을 흘려보낼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온몸이 역류하는 기분, 꼭 뭔가가…….
<킬킬.>
팟, 데반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오싹한 한기가 몸을 감쌌다.
무슨 소리지?
분명히 어디선가 웃음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곳에는 나와 데반뿐이었고, 그건 내 목소리도 그의 목소리도 아니었으니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몸이 휘청거렸다.
“무슨 일이지?”
붙잡을 게 필요했다. 무작정 팔을 내둘렀다.
놀란 데반이 내 팔을 붙잡았고, 그 순간 다시 역한 기분이 들었다.
“놔요!”
나도 모르게 거칠게 그를 밀어냈다. 비틀거리는 몸은 결국 중심을 잃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이 핑 돌았다. 모든 게 새하얘서 앞이 보이질 않았다.
분명 웃음소리였어, 이상한 웃음소리가.
“……에블린?”
파들파들 떨리는 몸으로 겨우 고개를 들어 데반을 바라봤다.
그의 주위에 무언가 새까만 형상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안개 같은 게 데반의 얼굴 주위를 뿌옇게 가리고 있었다.
“……저주?”
“뭐? 이봐, 일단 일어나서.”
“다가오지 마요!”
데반이 다시 내 쪽으로 손을 뻗으려고 했다.
난 거칠게 심호흡했다.
“……힐다를 불러 줘요.”
“……누구?”
흐읍― 거친 숨을 내쉬느라 채 대답하지 못했다.
말하지 않아도 곧 그가 힐다가 내 하녀라는 걸 눈치챌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반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날 내려보다가, 종을 흔들어 집사를 부를 뿐이었다.
“전하.”
빠르게 도착한 집사가 허리를 숙였다.
데반의 명에 따라 그가 주저앉은 나를 부축해 소파에 눕혔다.
다행히 집사의 손이 닿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의사를 불러올까요?”
노집사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난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의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이 이상 늘어나길 원치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데반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여전히 내 가슴팍은 위아래로 크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깊게 호흡하며, 난 다시 데반을 슬쩍 바라봤다.
아까까지 그의 주변을 음험하게 감싸고 있던 새까만 기운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손 좀.”
데반이 주춤거렸다. 내가 다시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인 듯했다.
“이제 정말 괜찮을 것 같으니까 줘 봐요, 잠깐.”
주춤거리는 그의 손을 낚아챘다.
긴장하고 있었던 게 무색하게 이번엔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대체 뭐였지?
“아까 분명, 저주라고 하지 않았나?”
나에게 손을 붙잡힌 채, 데반이 물었다.
그는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순간 다시 머릿속에 그의 주변을 떠다니던 새까만 형상이 떠올랐다.
꼭 데반을 집어삼킬 것 같은, 모든 걸 제 먹이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순간 저주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저주인 걸까?
입술을 꼭 깨물고,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데반이 내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그가 슬쩍 눈짓하자 눈치 빠른 노집사는 말없이 방을 나갔다.
다시 둘만 남은 방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저주에 대해선 알고 있을 텐데.”
저주.
제국에서 그 저주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었다.
데반의 눈을 멀게 한 저주는 신의 짓이었다. 그건 신이 직접 내리는 순리 같은 것이었다.
신전에 모아 하룻밤 재워서 신성한 표식을 찾는 그 황당한 자격시험 다음 날, 자격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저주가 내려왔다.
제국이 세워지고 신전이 황가의 후계를 정하기 시작한 후부터 계속 전해 내려오던 전통이었다.
그 저주는 데반처럼 눈이 멀거나, 귀가 먹는 등의 신체적 장애일 수도.
혹은 평생 누군가와 말을 섞지 못한다든가 겉모습이 완전히 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일 수도 있었다.
신은 또한 저주와 함께 예언을 내렸다.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단서를 가리키는 예언이었다.
[데이지 꽃향기를 품은 어린 태양의 여신이, 너의 저주를 풀어 주리라.]
원작에서 미리 읽은 나를 제외한다면, 오직 데반만이 그 예언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신전은 이 행위가 완벽한 황권을 위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저주에 걸린 자들은 필연적으로 각자의 예언 속 단서를 찾아 평생을 헤매야 했다.
그들의 정신은 온통 그곳에 팔려 있어, 자신에게 저주를 내린 신에게 복수한다거나 신의 뜻을 꺾고 황제가 되겠다거나 하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꽉 막힌 풍선은 언제가 터지고, 지나치게 꼿꼿한 막대는 쉽게 부러지는 법이었다.
신전은 그들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단 하나의 구원을 내려 준 것이다.
무엇보다 그 예언은 진짜였다.
단서를 찾은 몇몇 황족들은 정말로 저주에서 풀려 났고,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일생을 살았다.
저주에 걸린 자들이 예언에 목맬 만도 했다.
그러니 데반이 나에게 갑자기 저주를 운운하는 이유는 뻔했다.
“네가 정말 예언의 주인이라면, 저주를 두려워할 리 없다.”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진짜 예언의 주인공이 맞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