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코델리아가 등장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으니 분명 언젠가 나타나리라 각오했다. 사실은 지금껏 등장하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 막상 이름을 듣자 왜 이렇게 손발이 달달 떨리는 걸까. 난 두 손을 맞잡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쩌면 그녀가 실존함으로 인해, 정말로 내 역할이 엑스트라라는 확인 사살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꼭 내가 지난 10년간 애써 온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가 진짜 예언의 주인공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데반은 어떻게 할까.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난 거짓말을 굉장히 싫어해. 네가 오래 살아 있길 기도하지.’
잘게 떨리는 손으로 목덜미를 더듬어 작은 노란빛 펜던트를 꼭 쥐었다.
데이지 꽃향기.
이것만 들키지 않으면……. 이것만 아니면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대로 뒤로 넘어가 침대에 풀썩 누웠다.
지금까지 10년을 버텼는데, 이 조금을 못 버티는 건 말이 안 됐다.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중요한 건 코델리아가 아니었다. 신전에서 날 찾고 있다는 것, 그게 당장 더 중요한 문제였다.
도대체 왜?
‘웬 여자아이 하나가 아프다더군.’
번쩍 눈을 떴다. 코델리아가 아프다.
그녀가 아플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신력을 혹사당해서겠지.
그렇다면 신전이 날 찾는 이유는 대체 뭘까.
그것도 지금의 나에겐 신력이 없다고 믿고 있으면서, 날 왜?
그 순간 벼락같이 깨달았다.
명백한 사실은 이랬다.
첫째, 그들은 코델리아를 회복시키고 싶어 한다.
둘째, 막대한 신력을 가진 사람은 보통 사람과 체질이 다르다.
그러니 셋째, 코델리아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그녀와 같은 체질인 사람이 필요하다. 실험체로서.
이거다.
어린 시절, 디에고 백작이 나에게 먹인 물약들은 모두 신전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종종 신력과 관련된 새로운 물약들을 만들었다.
신력을 증가시켜 준다거나, 지속력을 높여 준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간 검증되지 않은 그것들을 위한 실험체가 바로 나였다.
그런 그들의 습성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내 신력이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반면 코델리아의 신력은 무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날 대상으로 연구를 해서 그녀를 고칠 방법을 찾을 셈인 거지.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이대로 신전에게 붙잡혔다간, 원작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결국 코델리아를 위한 실험체로 쓰이다가 버려질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올 리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데반의 저주를 최대한 빨리 풀어서 돈을 가지고 이 나라를 떠나는 것.
그러려면 어제와 같은 상황이 돼선 안 됐다.
그런 식으로 쓰러졌다간 어느 세월에 치료가 끝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3일째였다.
창밖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눈이 오기 전, 적어도 그때엔 떠나야 한다.
“후우…….”
콧속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
한참을 쉬고 머릿속을 정리하다, 저녁이 되자 난 다시 데반의 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조금 무리해서라도, 그의 몸 전체에 신력을 흘려보낼 작정이었다.
그렇게 그의 몸이 신력에 익숙해진다면, 그 후엔 치료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똑똑―
“들어와.”
데반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내가 올 걸 미리 예상한 것 같았다.
난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앉았다.
“할 얘기가 있어요.”
그러곤 오후 내내 생각한 제안을 말했다.
“오늘부턴 제가 치료를 하는 만큼 돈을 줘요.”
“뭐?”
“그러니까 돈을 한 번에 주는 게 아니라 나눠서 달라구요.”
“내가 못미덥나? 그까짓 푼돈을 가지고 널 속이기라도 할까 봐?”
안대에 가려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가 한껏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꼭 그렇다기보단, 그게 공평하고 좋잖아요. 저는 하루에 한 번씩 치료를 해 주는데 돈은 나중에 받는다는 게 좀 그래요.”
그가 정말 돈을 떼어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대공인 그에게 내가 요구한 정도의 액수는 푼돈일 테니까.
다만 언제 신전이 이곳을 찾을지도 모르니, 그때를 대비해 미리미리 돈을 모아 놓을 생각이었다.
치료가 끝나기 전에 신전에서 찾아오는 경우가 가장 문제였다.
돈은 하나도 못 받고, 그대로 신전에 끌려가야 할 수도 있었다.
“싫어요?”
쐐기를 박듯 물었다. 데반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저것 봐주기 시작하니 네 위치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널 납치한 사람이야.”
“착각하고 있는 건 전하이신 것 같은데요. 돈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전하의 저주는요? 나밖에 치료할 수 없어요. 아닌가요?”
돈을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다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진 않겠지만.
거기에 실은 코델리아도 그의 저주를 치료해 줄 수 있을 테지만.
난 부러 세게 나갔다.
“돈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다?”
데반이 내 말을 가늠하듯 되풀이했다.
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그가 꼭 알면서도 속아 주는 것처럼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치료 한 번당 돈을 주지.”
“좋아요.”
난 혹여나 마음이 바뀔까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그리고 하나 더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지?”
“그…… 영지에 도는 이상한 헛소문은 어떻게 됐어요? 해결할 생각이 있으시긴 한 거죠?”
이곳에 젊은 여자가 있다는 소문.
그 소문이 제국 전체에 난다면 신전이 여길 찾아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일은 잠깐 내 동생이 왔다 간 걸로 하려고 한다.”
“동생이요?”
데반에게 동생이 있었나? 그것도 여자…….
난 멍하니 생각하다 번뜩 고개를 들었다.
“설마, 황태녀 전하요?”
미친놈 아냐?
내 고함에 데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인상 썼다.
아스트릴라 란티모스.
그녀는 데반의 동생이자 얼마 안 가 황좌에 오를 이 제국의 황태녀였다.
그녀가 데반보다 어림에도 후계자가 된 이유는 단순했다.
이 세계에선 황제보다 대신관의 위치가 더 높았다.
다음 황위에 오를 후계 역시 모두 신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 대신관이 정했다.
그 후계를 정하는 방법이라는 게 참 웃겼는데, 후계의 자격이 있는 자들을 신전에 모아 두고 하룻밤 재운 후 다음날 몸을 살피는 거였다.
신에게 선택받은 자는 그 증거로 몸에 새로운 표식이 생겼다.
즉, 아스트릴라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였고 데반은 아니란 소리였다.
데반이 저주에 걸려 눈이 먼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날, 신에게 선택받지 못했으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것보다, 데반이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이 사실이 아스트릴라에게 들어가선 안 됐다.
왜냐하면 제국의 황태녀 아스트릴라는…… 어마어마한 또라이였다. 그것도 데반보다 심한.
“황태녀 전하가 오셨다고 하면 어떡해요? 황태녀 전하께서 도대체 평민 하녀가 왜 필요하느냔 말이에요. 황궁에 시녀가 얼마나 많은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전하께서 그 소문을 들으면 어쩌려고요!”
“어차피 걘 나한테 관심도 없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너무 과한 걱정을 하는 것 같은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로 이 영지의 소문이 제도에까지 퍼질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난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이곳은 꽤 변두리였다.
후계자가 되지 못한 황자에게 작위를 주기 위해 명목상 내린 영지니, 제도와는 거리가 멀고 땅이 척박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차라리 외로워서 그랬다고 거짓말을 하지 그러셨어요.”
“뭐?”
“아, 거짓말 싫어하신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체 넌…… 내 명예 따윈 안중에도 없나 보군.”
황당하다는 말투에, 되레 내가 더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애초에 절 납치한 것부터 명예는 버리신 거 아니었어요?”
“……치료는 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지?”
데반이 티 나게 말을 돌렸다. 짧은 한숨을 내쉬고 내가 말했다.
“지금이요. 손 줘요.”
데반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저번과 같이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막 집중하려던 찰나였다.
“너도 오라비가 있다고 들었는데.”
“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기분에 팍 인상을 구겼다.
거기다 하필이면 왜 그 얘기야?
대공 저에 온 이후로 나는 애써 킬리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치료하자면서요.”
“본인 이야기가 하기 싫은 건가? 아니면 디에고 백작가의 이야기가…….”
“집중해요. 오늘은 몸 전체에 신력을 불어넣을 거예요.”
“몸 전체? 괜찮은 거 맞나?”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나 말고, 너.”
아무래도 데반은 저번에 쓰러졌던 일로 나에 대한 신뢰를 다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봐도 그날의 나는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나도 두려웠다. 이번엔 정말로 괜찮을까?
난 몸속 깊은 곳에 방대하게 잠들어 있는 신력을 찾았다.
어마어마한 양이 느껴졌다. 방금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을 것이다. 쓰러질 리가 없다. 손바닥까지 그어 가며 손수 확인하지 않았는가.
저번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
신력을 정리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번엔 아닐 거예요.”
*
말이라도 말 것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침대 위였다. 난 당연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는 사자를 빤히 노려봤다.
또 쓰러졌다. 도대체 왜?
이쯤 되니 화가 날 지경이었다.
분명 어제의 치료는 성공적이었다. 죽을 만큼 힘들긴 했지만, 데반의 몸 전체에 신력을 불어넣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왜지?”
“아가씨!”
내 혼잣말을 듣고, 침대에 엎드려 있던 힐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또 내 옆에서 밤을 지새운 모양이었다.
“왜 쓰러지는 걸까?”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힐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몸은 괜찮으세요?”
“왜냐고!”
답답한 마음에 베개를 침대에 내리쳤다. 힐다가 움찔 몸을 떨었다.
“호, 혹시 대공 전하도 신력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닐까요?”